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모험
할아버지의 제삿날. 어른들이 부산스럽게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일곱 살 보리(김수안 분)는 뭐든 도움이 되고 싶다. 마침 콩나물 사는 걸 잊었다고 말하는 엄마. 보리는 아껴두었던 용돈 천원을 꺼내들고 콩나물을 사기 위해 길을 나선다.
윤가은 감독(이하 윤가은)의 단편 <콩나물>(2013)은 하루 동안 펼쳐지는 보리의 모험을 쫓아간다. 보리는 시장을 찾아 헤매면서 어려움에 처한 아주머니를 돕고, 또래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 다투고, 어르신들에게 막걸리도 한잔 얻어 마신다. 그리고 마침내 시장에 다다랐을 때, 보리는 무얼 사러왔는지 잊어버린다. 보리가 임무를 완수했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새로운 도전을 했다는 것, 그렇게 마음껏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보리에게서 활달하게 동네를 뛰어다녔던 <우리들>(2015)의 선이, 지아와 <우리집>(2019)의 하나, 유미, 유진의 모습을 본다.
영화 <콩나물> 포스터
윤가은은 영화에서 “소녀들의 활동성을 포착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어린 소녀들은 “많이 뛰고, 동서남북으로 다닌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여성들이 얼마나 익숙하고 고정된 포즈로 물신화되는지, 그리고 더 멀리, 더 넓게 움직이는 남성들에 비해 좁은 공간에 매여 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확실히 윤가은의 소녀들은 특별하다. 물론 <콩나물>을 구상했던 건 ‘소녀의 모험’을 그리겠다는 목적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견한 ‘귀여운 이야기’에 가까웠다.
<콩나물>을 만들기 전, 윤가은은 학교 워크숍 작품으로 단편영화 <손님>(2011)을 연출했다. <손님>에서 중학생 자경(정연주 역)은 아버지의 애인과 담판을 짓기 위해 그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하지만 애인은 없고, 어린아이 둘이 집을 지키고 있다. “애까지 딸린 여자가 잘 하는 짓”이라고 중얼거리는 자경. 그러나 아이들과 한나절을 함께 보내면서, 그는 두 아이가 그저 ‘불륜녀의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만큼이나 고군분투 중인 이복동생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너네 집도 우리 집만큼이나 엉망진창”이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자경의 혼란스러운 심경을 역동적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클레르몽페랑 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예상치 못하게 큰 상을 받고 나니, 그다음 작품이 문제였다. “진짜 잘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줄 알았지 “잘 만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세 번을 뒤엎고 겨우 써 간 시나리오를 보고 제작 수업 지도교수였던 이창동 감독이 말했다.
“나쁘지는 않아. 그런데 너는, 이 이야기를 믿니?”
윤가은은 그 질문에 매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그저 “있어 보이는 무언가”에 대해 만들려고 했다는 것을. 그래서 대학생 때부터 쭉 써왔던 메모 노트 열 권을 찬찬히 뒤졌다.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이 <콩나물>의 아이디어였다. 한 소녀가 심부름을 갔다가 실패한다. 하지만 그 과정만은 참 재미있었다는 이야기.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래서 생각했다. “실패해도 괜찮다. 대단한 걸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자.”
소녀가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자신의 공간을 넓히는 영화 <콩나물>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정곰상을 수상한다.
마음의 모양은 다양하다
‘우리 유니버스’. 윤가은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우리들>과 <우리집> 두 편의 영화에서 펼쳐지는 영화 세계를 부르는 이름이다. 이 영화 세계는 윤가은의 첫 단편이었던 <사루비아의 맛>(2009)에서부터 서서히 움트고 있었다. 윤가은의 작품에선 언제나 10대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상한 나라’를 들쑤시고 다니는 앨리스처럼 일정한 기간 동안 토끼 굴 속을 돌아다니며 사건을 일으키고, 변신을 하며, 어디엔가 도착한다. 두 친구의 관계를 그린 <사루비아의 맛>은 <우리들>로 녹아들고, <콩나물>과 <손님>은 <우리집>과 연동된다. 그리고 <우리들>과 <우리집>은 서로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다섯 줄기의 소녀들의 시공간은 ‘우리 유니버스’를 다채롭게 확장시켜왔다.
이렇게 형성된 ‘우리 유니버스’는 음악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음악은 어떤 영화적 장치보다 인물의 감정을 (쉽게) 고양시키고, 그걸 바라보는 관객의 감정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어린 아이의 세계를 묘사할 때, 그 감정에 쉽게 코멘트를 달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마음은 모양이 아주 다양하다. 그걸 정확하게 그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음악을 붙이면 감정이 결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동시녹음 감독과 믹싱 감독이 고생이 많다며 윤가은은 웃었다. 매미 소리나 숨소리 같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존재하는 장소의 공간성을 드러내는 앰비언스로 사운드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공들인 앰비언스 디자인이 관객들을 ‘그 시절/그 장소’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특정된 감정이 아니라 복잡한 마음을 빚어내는 마법이 ‘우리 유니버스’에서 펼쳐진다.
관객이 아이들의 마음과 접속하여 공진(共振)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미학적 장치는 카메라의 눈높이다. 윤가은은 카메라의 아이레벨을 아이들의 눈에 맞추고, 고집스럽게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관객들이 이 친구들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함께 체험하게 하고 싶었다. 내 영화는 모두 1인칭이다. 주인공이 모든 장면에 등장한다. 관객들은 주인공이 보는 딱 그만큼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이레벨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유니버스’가 관객의 마음을 두드리는 건, 아마도 윤가은이 영화에 진심이기 때문일 터다.
그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떠올렸나”,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되었나” 같은 시시(하지만 물을 수밖에 없기도)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모르는 걸 아는 척 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 역시 한국 사회가 “진짜 영화답다”고 평가하는 ‘좀 더 큰’ 영화를 만들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매번 “내 안에 있는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가은의 작품들은 자전적이다. 그 ‘자전’은 꼭 본인이 직접 경험한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를 둘러보고, 나에게 관심을 가졌을 때에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이야기”에 더 가깝다.
끝까지 영화를 만들 것
윤가은에게 ‘여성’은 하나의 레이블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창작 활동의 지반이자 원천이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영화를 하기 위한 길을 오랫동안 탐색해왔다. 그때 롤모델로 삼았던 것이 이정향, 임순례 같은 여성감독들이었다. 프랑스 파리에 여행을 갔을 때, 임순례 감독이 유학했던 영화학교 교정을 찾아가기도 했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여성감독’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궁금했다. 어째서 ‘감독’이 아니라 ‘여성감독’을 꿈꿨을까?
“그게 유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여성 선배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나와 시작하는 위치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훌륭한 남성 감독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역사를 살 수는 없다.”
영화 공부를 시작하고서는 린 램지, 안드레아 아놀드 같은 영국 여성감독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선배들에게 빚진 것이 많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 역시 끝까지, 많이 만들어서,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선배 여성감독들을 따라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그 길 위에서 ‘우리 유니버스’가 등장했다. 이 우주가 숨기고 있는 또 다른 별과 만날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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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