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좀 더 생각을 했더라면 그런 말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넌 가면을 쓰지 않은 채 그 말을 쓴 거야. 그렇게 해서 적어도 우리는 네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거지.”
밀란 쿤데라, 『농담』 중에서
“이모님, 여기 콩나물 좀 더 주세요!”
식당에서 이 소리를 들으면 나는 속으로 흠칫 놀라곤 한다. 물론 나 혼자만 남 몰래 간직해온 아픔이기 때문에 놀란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나도 모르게 근엄한 표정을 짓게 되나본데, 간혹 같이 삼겹살을 먹던 동료나 친구들한테서 고기 뒤집다 말고 무슨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냐며 타박을 듣게 된다. 이모님이 만면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옆 테이블에 추가 콩나물을 전해 주실 때 나는 A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A는 일 잘하고 상황 판단 빠르고 자기 의견 제시에 똑 부러지는 카피라이터였다. 무엇보다 A에게 나는 믿고 따르는 선배였다. 선후배로서 우리 사이는 완벽했다. 내가 그 농담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큰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당시 회의실은 중압감에 짓눌린 긴장이 깨지기 직전의 유리 같았다. 아무도 입을 떼지 않던 회의실에서 나는 후배들을 보며 말했다.
“A 이모님이 먼저 얘기해보는 게 어때?”
맙소사! 이모님이라니! 후배들의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부른 대참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소에도 쓰지 않는 표현을 농담이랍시고 그것도 회의실에서 했을 리 만무하니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맹세코 식당 같은 곳에서 흔히들 이모님 하고 부르는 호칭을 단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을 뿐더러, 어느 쪽이냐면 그런 유사가족적 호칭에 오히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나였다. 그러나 어쩌랴. 실로 말은 마음을 배반한다.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건 그 말을 했을 때 웃고 있던 건 그 회의실에서 오직 그 말을 한 사람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이다.
회의가 끝난 후 A는 나를 찾아왔다. 왜 그런 말을 한 거냐고 물었다. 후배들한테 이모뻘 아니냐고, 긴장을 풀어주려 웃자고 농담한 거라며 내가 어물쩡 말했을 때 A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던 걸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농담이라면 재미있으라고 한 거냐, 난 재미도 없고 기분만 상했는데 그게 무슨 농담이냐 뭐 그런 얘길 내게 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러면서 A는 내 진심이 담긴 사과를 원했으리라. 어제 오늘의 일이었다면 내 실수에 대해 즉각 사과했을 텐데 지금보다 만 배는 더 어리석었던 그때의 나는 또한번의 만회 찬스를 허무하게 날려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사과인 듯 사과 아닌 사과 같은 어정쩡한 사과를 하고 나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후배 A와 이모님 이전의 관계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읽은 게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농담 한 마디에 인생이 그야말로 제대로 꼬여버리고 마는 루드비크의 스토리에 모골이 송연한 채 빠져들어갔던 것이리라.
대부분의 우리는 일을 해서 밥을 번다. 밥을 벌자고 일하러 나온 일터에서 그러나 일만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농담을 한다. 개그맨이나 코미디언이야 남을 웃기는 일로 밥을 번다지만 그렇지 않은 일을 하면서 왜 굳이 동료를 웃기려고 농담을 하는 걸까. 그런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한심하다는 표정과 함께 처음 보는 바보를 신기해하며 위아래를 한번 쓱 훑고 나서 일을 더 잘 하자고 그러는 거지,와 같은 명쾌한 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일을 더 잘 하려고, 또는 더 잘 하라고 농담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 말이 내 마음 같기만 할까. 의도를 배반하는 결과는 왜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 웃자고 한 농담 한 마디가 때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관계의 파국을 초래하기도 하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웃자고 하는 농담에 아무도 웃고 싶어지지 않는 참담한 아이러니!
광고라는 업은 관점에 따라 수많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을 테지만, 브랜드나 제품의 장점에 집중해서 그 매력을 극대화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고 카피라이터로 30년 가까이 일해 오면서 알게 된 것들 중 하나는 어떤 브랜드나 제품도 완벽하게 장점만 가지고 있거나 세상의 모든 단점들로만 똘똘 뭉쳐있거나 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의 존재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나는 그것이 타인이든 브랜드든 어떤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어디를 보느냐의 문제다. 앞서 말했듯이 광고는 장점을 찾아내어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것이 일의 반이다. 나머지 반은 그걸 전달해야 할 타깃에 맞게 표현하는 일이 된다.
눈치 채셨겠지만, 광고의 시선처럼 농담을 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농담에도 방향성이 있다. 동료의 사소한 장점에 주목하는 농담, 사기를 올려주는 농담, 우리 일에 당신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는 농담, 상대의 기여를 긍정하는 농담, 그런 방향성의 농담이야말로 우리가 일을 더 잘 하는 데에 진정 도움이 되지 않을까?
병아리 카피라이터의 시절 어느 퇴근길이었다. 친한 선배와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아 그날의 회의들을 복기하며 재잘재잘 수다꽃을 피우고 있었다. 선배의 공을 그럴듯하게 치켜세워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나름 괜찮은 시도였어요!” 카피라이터라는 녀석이 ‘나름’이라는 말의 뉘앙스도 모른다고 얼마나 박살이 났던지... 커뮤니케이션을 업으로 가진 자라면 말과 글에 충분한 전문성을 지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선배는 내게 심어주고 싶었던 게다. 생각해보면 나를 말없이 평가만 하는 사람은 상사였고, 쓴맛 나게 가르쳐주는 사람은 선배였더라. 아무튼 그날 이후 내 사전에 ‘나름’은 없다. 농담으로라도 ‘나름’을 입에 올려본 적 없다. 그렇게 나름 조심하며 살아왔는데 이모님이라니!
인간은 언어를 발명해냄으로써 만물의 영장이 되었으나 바로 그 언어로 말미암아 예기치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마음을 온전히 담기에 말이란 실로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과 더불어 뭔가를 도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말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루드비크처럼 미련한 나여, 출근할 때 잊지 말고 마스크를 쓰자. 솔직한 민낯 위에 가면을 쓰자. 일터는 가정이 아니고 일로 만나는 모든 이는 결코 또하나의 가족이 아니다. 우리는 일로 밥을 벌자는 것이니 그것은 프라이버시의 영역이 아니라 공공의 장임을 잊지 말자. 농담에도 방향성이 있다.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는 방향, 상대가 행여라도 불쾌해 하지 않는 방향, 나를 낮추는 겸손한 방향, 할 수만 있다면 모두가 함께 고양되는 방향. 그 방향성이 위선이라고? 일터의 농담에서 필요한 건 솔직한 진술이 아니라 어쩌면 위선이다. 기가 막힌 농담의 달인이 아닐 바에야 위선에 최선을 다 해봐야겠다고 나는 오늘도 그렇게 다짐하며 회의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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