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효 작가 “연필 한 자루쯤, 어른이 될 때까지 보관해보세요”
어린 시절, 잘 깎은 연필들을 칸칸마다 가지런히 놓고 살며시 뚜껑을 닫을 때면 제가 꼭 연필들의 잠자리를 봐 주는 것 같았는데, 이 책을 쓰는 내내 그 느낌이 따라다녔어요.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2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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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신선한 작품을 발굴하며 저학년 문학에 활기를 불어넣어 온 ‘비룡소 문학상’의 올해 수상작 『깊은 밤 필통 안에서』가 출간되었다. 아이들의 고민을 대변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대화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은 이번 작품은,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쓸 때, 어려운 문제를 풀 때, 매끈하게 깎일 때 연필들은 어떤 마음일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연필의 마음, 연필의 기분을 들여다보고 글로 풀어낸 작가의 마음이란 또 어떤 것인지, 길상효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제10회 비룡소 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작가의 말’에서 『깊은 밤 필통 안에서』를 쓰게 된 계기를 언급하시긴 했지만, 다시 한번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연필 이야기는 아마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떠올려 봤을 것 같아요. 저 역시 오래전에 구상한 적이 있는데 결국 완성하지 못했어요. 특별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써 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그렇게 잊고 있던 어느 날 ‘평범한 연필들의 하루는 어떨까’를 생각하자 작은 이야깃거리가 마구 들리고 떠오르는 거예요. 3학년 아이의 필통 속을 그저 들여다보기만 하자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단숨에 완성해서 저도 놀랐어요. 잘 풀리지 않아서 몇 년째 붙들고 있는 원고들도 많은데 말이에요. 참, 그리고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 제 어린 시절의 필통에 대한 기억도 일조를 했어요. 요즘에도 그런 필통이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의 필통에는 연필들이 뒤섞이지 않도록 낮은 칸막이 같은 것이 돋아 있었어요. 잘 깎은 연필들을 칸칸마다 가지런히 놓고 살며시 뚜껑을 닫을 때면 제가 꼭 연필들의 잠자리를 봐 주는 것 같았는데, 이 책을 쓰는 내내 그 느낌이 따라다녔어요. 

연필들이 주인인 담이의 생활과 마음을 대변하는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담이라는 아이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연필들의 세계가 뚜렷이 그려진 점이 좋았습니다. 

정확히 보셨어요. 연필의 주인인 담이에 대한 설정은 거의 없었어요. 다들 그러시겠지만 이야기를 쓰기 전에 등장인물과 세부 설정들을 명확히 갖춰야 하는데, 이 이야기를 쓰면서는 담이의 성별을 비롯해 생김새, 성격 등 그 무엇도 정한 것이 없었어요. 어떤 계획이나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연필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됐어요. 담이가 힘들고 피곤한 게 아니라 연필들이 힘들고 피곤한 게 보이고 들렸거든요. 지금도 저에게 담이라는 아이는 그저 뿌옇고 희미한 존재예요. 말하자면 담이는 이 이야기의 배경인 거지요. 물론 연필들의 상황 설정을 위해 늦잠을 자고 헐레벌떡 학교로 달려가는 아이라는 설정 정도는 필요했고요. 

『깊은 밤 필통 안에서』를 읽다 보면 연필들의 순한 대화에 미소 짓게 되고, 악역이라 할 만한 등장인물이 거의 없는 ‘청정 동화’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독자를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청정한 이야기를 쓰겠다는 의도는 없었어요. 연필들 사이의 큰 갈등이나 사건을 넣지 않은 것은 착한 연필들을 그리고자 해서가 아니라 담이의 연필들이 일종의 운명 공동체이자 서로의 분신 같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각자 전담하는 일이 있는 게 아니라 다 같이 담이의 하루를 일기로 쓰고 잘 안 풀리는 수학 문제도 풀고 때로는 누군가가 쓰던 것을 이어 쓰기도 할 테니 공감이 클 수밖에 없는 친구들인 거죠.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나 사건에 한마음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고요. 그 관계에 변화를 주는 존재가 새 연필과 남의 지우개인데, 사건과 사고가 발생하지만 결국 필통 안은 예전의 분위기로 돌아가요. 이러나저러나 모두가 담이의 연필과 지우개로 살아가는 거죠. 헐레벌떡 등교하는 담이의 책가방 안에서 멀미로 하루를 시작하면서요.

앞에서 어린 시절의 필통 이야기를 잠깐 하셨는데, 연필이나 필통에 관한 특별한 기억이나 일화가 있으신가요?

작가의 말에 잠깐 적기도 했는데, 제가 칼로 연필 깎는 걸 좋아하고 잘 깎아요. 나무 부분을 슥슥 깎아 낼 때의 느낌도, 연필심을 샥샥샥 다듬을 때의 느낌도 좋아해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가 연필과 칼을 가지런히 준비해 두고 저를 부르시더니, 앞으로 1년 동안은 아빠가 연필을 깎아 줄 테니 잘 보고 배워서 2학년 때부터는 스스로 깎아야 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버지의 다정함보다는 “지금부터 나는 떡을 썰 테니…” 했다는 한석봉 모자의 일화가 생각날 만큼, 뭔가 엄숙한 분위기가 먼저 떠올라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초등 2학년생이 칼을 쥐고 연필을 깎았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한동안은 아버지가 계속 깎아 주셨던 것 같아요. 아무튼 연필 깎는 법을 친구들보다 일찍 배운 덕에 친구들 연필도 많이 깎아 줬어요. 그땐 교실마다 연필깎이가 있진 않았거든요. 요즘도 가만있다가 갑자기 연필들을 죽 꺼내서 깎고는 해요.

‘작가의 말’에서 지금도 연필로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주로 뭘 쓰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작가님의 필통 안에서는 어떤 대화가 오가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궁금하고요.

요즘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 연필로 가장 많이 하는 건 도면 그리는 일과 견적 받아 적는 일이에요. 각 방의 사이즈를 같은 비율로 줄여서 자를 대고 그린 다음 가구들의 크기도 같은 비율로 그려서 오린 다음 이렇게 저렇게 배치해 봐요. 재미있어요. 이런 용도의 앱도 있다고 하는데, 네, 제가 옛날 사람이랍니다. 어렸을 때처럼 필통이 연필로 가득하지는 않고 연필, 볼펜, 만년필, 네임펜, 형광펜, 지우개 등이 하나씩 있는데요, 지금 막 이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아요. 

“만년필은 좋겠다. 혼자만 멋지게 사인하고.” 

“맞아, 우리도 사인 한번 해 봤으면.”

동화뿐 아니라 그림책과 과학 소설, 그리고 번역까지 다양한 작업을 하고 계시는데, 여러 영역을 넘나드는 데 어려움 또는 즐거움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어느 하나에 몰두하면 지금보다 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요. 그런데 그림책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도 떠오르고 동화 소재도 떠오르고 과학 소설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도 있고 하니 뭐가 됐든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작게 보면 다른 장르이지만 글을 쓴다는 큰 테두리 안에서는 같은 작업인 만큼 A라는 작업이 B라는 작업에게 영감을 주는 부분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엔 그림책 소재로 떠올렸던 걸 틈틈이 확장해서 청소년 장편소설의 밑그림으로 만들어 둔 것도 있고요. 다만 마감을 앞두고 있거나 제가 정한 기한 내에 끝내고자 하는 작업이 잘 안 될 때 누가 시키지도 않은 다른 작업을 기웃거리게 되는 건 단점 같기도 해요. 그런데 또 그렇게 딴짓으로 시작한 게 잘 완결되는 경우도 있고요. 이와 달리 번역 작업은 딴짓할 새 없이 몰두할 수 있고, 특히 저자의 글쓰기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많아서 좋습니다. 같은 책을 몇 번씩 통독하고 문장과 낱말을 곱씹는 과정이 힘들면서도 즐겁고요. 그리고 실은 어렸을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한동안 열심히 그리다가 손을 놓은 지 오래인데 얼마 전에 용기를 내 그림을 그렸어요. 물론 아주 단순한 그림이에요. 글과 그림을 다 맡은 첫 그림책인데 내년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깊은 밤 필통 안에서』를 읽을 어린이들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

어린 시절에 쓰던 연필 생각이 날 때가 있어요. 이 책을 쓸 때는 더더욱 그랬고요. 지금 쓰고 있는 연필 한 자루쯤은 잘 보관해 두시면 어떨까 해요. 어른이 되었을 때 꺼내 보면 작은 선물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그때엔 글쓰기와 독서가 전부 디지털화되어서 연필이라는 것이 아예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고요.




*길상효

어린이, 청소년들과 함께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신소재공학을 전공하고 영화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SBS 창사 기념 미니시리즈 극본 공모에 당선되어 청소년 드라마 [공룡 선생] 극본을 집필했다. 지은 책으로는 『점동아, 어디 가니?』, 『너를 만났어』, 『최고 빵집 아저씨는 치마를 입어요』, 『그 말 내가 전할게』, 『해는 희고 불은 붉단다』, 『골목이 데려다줄 거예요』, 『아톰과 친구가 될래?』 등이, 옮긴 책으로는 『산딸기 크림봉봉』, 『살아남은 여름 1854』, 『하나만 골라 주세요』, 『행복해라, 물개』, 『못된 녀석』, 『안아 드립니다』, 『아웃 게임』 등이 있다. 첫 SF 중편소설 「소년 시절」 로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동화 『깊은 밤 필통 안에서』로 제10회 비룡소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는 콩가루를 듬뿍 올린 우유 빙수이다. 여름에도 최고이지만 겨울에도 좋다. 줄 서서 먹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깊은 밤 필통 안에서
깊은 밤 필통 안에서
길상효 글 | 심보영 그림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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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