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열등의식에서 시작됐을 거예요. 정말 먹고 살려고 했기 때문에 대본이 저한테는 성경 같았어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 윤여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연일 화제다. 인용한 말은 수상 직후 LA 한국 총영사관에서 열린 한국 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연기 철학을 묻는 말에 대한 윤여정의 답변이었다. 이 말에는 윤여정의 연기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반영되어 있다.
책임의 연기
윤여정은 아카데미 수상 소감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고(故)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로 스크린 연기 데뷔한 이래 <미나리>(2020)로 연기 생활의 정점을 찍기까지, 40여 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TV 드라마까지 포함하면 100편을 훌쩍 넘긴다!) 영화로 한정하여 필모그래프를 살펴보면, 체계로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온갖 신분, 여러 성격의 캐릭터가 망라되어 있다.
같은 이름을 공유해도 <미나리>의 순자는 아픈 몸을 이끌면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20)의 순자는 아들과 함께 일궜던 횟집이 몰락하자 그 충격에 정신을 놓았다. 재벌가를 배경으로 하는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와 <돈의 맛>(2012)에서는 각각 허리를 굽신거리는 하녀와 하녀를 부리는 귀부인으로 출연했다.
출연한 작품의 장르도 다양해서 <산나물 처녀>(2016)의 판타지, <황진이>(2007)의 사극, <가루지기>(2008)의 코미디, <자유의 언덕>(2014) <다른 나라에서>(2011) <하하하>(2010)의 홍상수 영화 등 가리는 것이 없었다. ‘힙하다’는 수식과 다르게 <그것만이 내 세상>(2017) <계춘할망>(2016) 등에서는 가부장의 부조리를 가족 사랑으로 견뎌내며 끝내 눈물을 흘리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할머니를 연기하기도 했다.
<미나리>의 순자는 윤여정이 그동안 연기한 할머니 캐릭터의 종합판에 가깝다. 딸의 부름에 기꺼이 미국으로 건너와 사랑으로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 같은’ 할머니 연기에 더해 처음 접한 프로레슬링 TV 중계에 관심을 보이고 한 입 베어 문 밤을 손자의 입에 넣어주는 등의 독특한 모습이 개성으로 비추면서 관객, 특히 서양의 영화 팬에게는 더욱 입체적인 면모로 다가갔다.
“우리의 진심으로 만든 영화이고 그 진심이 통한 것 같아서” <미나리>가 세계의 관심을 받는 이유에 대한 답변처럼 진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윤여정의 연기는 예술가의 예민함이나 고집 대신 직업인의 성실함과 투철함을 기반으로 한다. “정이삭 감독이 맘대로 하라고 했어요. 맘대로 하라는 건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 더 책임감이 큰 거예요.”
윤여정은 창작자가 원하는 대사와 표정과 행동을, 거기에 자신의 색깔을 칠하는 데 있어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을 배우의 책임감으로 인식한다. “대사를 마르고 닳도록 외웠는데 현장의 동선이 생각했던 거랑 달라지면 막히더라고. 다리미질하면서 말하는 장면은 실제 다리미질을 하면서 외웠고, 식탁에 숟가락 놓으면서 말하는 장면에선 실제로 식탁에 숟가락을 놓으면서 대사를 외웠어요.” (<씨네21> ‘<미나리> 윤여정과 봉준호의 만남’ 중)
윤여정 연기의 고유한 성질은 눈빛에 감정을 담는 시적인 인상 제공보다 정확한 표현에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밑바닥 인생부터 상류층 캐릭터까지, 예술영화부터 상업영화까지, 드라마에서 영화까지, 한국에서 해외까지, 전방위적인 작업이 가능하려면 즉흥의 감정을 우선하는 연기로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각종 장르와 매체를 넘나들며 50년 넘게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이어질 연기
윤여정의 연기 인생은 크게 4기로 나눌 수 있다. 김기영의 <화녀>와 <충녀>(1972)에 연달아 출연하며 영화 연기에 눈을 떠가는 1기. 당시 연기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윤여정은 그녀를 관찰하며 특징을 간파했던 김기영의 연기 디렉션을 통해 연기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갔다. 무엇보다 그녀가 가진 배우로서의 조건이 전형성을 벗어난 캐릭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조금 다르게 하고 싶어요. 그건 내 필생의 목적이에요.”
결혼 후 미국에 갔다 10여 년 만에 돌아와 <사랑과 야망>(1987) <모래성>(1988) 등 다시 연기자로 인정받으려 드라마에 출연했던 1980년대~1990년대가 2기. 오랜만의 스크린 복귀작이었던 <바람난 가족>(2003)을 필두로 한 2000년대 이후 3기에는 임상수와 홍상수 등의 연출자가 윤여정의 재발견을 이끌었다. 임상수가 김기영 세계의 연장선에서 윤여정의 연기를 확장했고 홍상수는 있는 그대로의 윤여정의 모습으로 또 다른 연기로의 길을 열었다.
개중 이재용은 배우 윤여정의 쓸모를 가장 넓은 보폭으로 탐구한 감독이다. <여배우들>(2009)에서 윤여정이 가진 세련됨과 밉지 않게 톡톡 쏘아붙이는 현실의 왕언니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끌어오면서 그에 가려진 고민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와 다르게 <죽여주는 여자>(2016)에서는 생계를 위해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성(性)을 파는 박카스 할머니의 파격적인 모습으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윤여정의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엄마, 나 그런 거 하기 싫어요.” <고령화 가족>(2013)과 <장수상회>(2015)의 엄마,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의 월셋집 주인 할머니, 그리고 <미나리>의 할머니는 배우 인생 4기를 장식하는 영화와 캐릭터다. 자기 이름을 지우고 가족을 위해 삶을 희생한 엄마와 할머니의 전형적인 범주 같아도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 <미나리>의 손주 데이빗의 평가처럼 윤여정의 엄마와 할머니에는 전형성을 넘어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처럼 윤여정이 연기한 캐릭터는 어딘가 남다르다. “나는 한국의 윤여정입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이름을 축약해 잘못 부르는 유럽인들을 향한 귀여운 항의의 의미를 담은 것과 달리 개인적으로는 윤여정 연기에 관한 그 자신의 정의 같았다. 대본을 철저히 학습한다는 것은 캐릭터를 최대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얘기인데 윤여정의 연기를 보면 캐릭터에 충실하면서도 윤여정의 정체성이 어떤 방식으로든 담겨 있다.
“내가 원치 않은 경험에서도 얻는 것들이 있어요.” 식모로 서울 중산층 가정집에 들어와 가족의 질서를 파괴하는 <화녀>와 <충녀>의 윤여정 연기는 오래 기억될 만한 것이기는 해도 김기영의 세계를 충실히 기능적으로 이행하는 듯하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미나리>에서는 손자에게 밤을 먹이는 장면을 감독에게 제안했듯 연출자가 창작한 세계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튀지 않게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데 능한 연기의 경지에 올랐다.
이를 두고 윤여정은 “열심히 일했더니 이런 상을 받게 됐다.” 겸손하게 감사 표시를 했지만, 그 말에는 74년 차(1947년생) 삶의 경험과 53년 차 배우의 연륜이 윤여정의 지반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 ‘미나리’의 생명력과 적응력으로 연기를 하는 윤여정은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 수상으로 배우 생활의 변곡점을 맞았다. “상을 받았을 때는 정말 기뻤어요. 하지만 제 삶이 바뀌지는 않을 거예요.” 또한, 작품에 임하는 태도 역시 바뀌지 않겠지만, 앞으로 윤여정이 펼칠 연기의 무대는 더 넓어질 듯하다. 이제 막 시작된 5기의 연기 인생으로 또 어떤 놀람을 선사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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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수상이라는 타이틀보다, 나는 나일 뿐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더욱 빛나는 분인지라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네요. 지금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오래도록 대중들과 함께 해주시길 바라면서,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기사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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