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중한 우편물, 생명보다 더 귀중한 우편물. 그래. 삼만 명의 연인을 살려줄 테니까. 연인들이여, 조금만 참아라! 석양빛을 헤치고 그대들에게 도착할지니.
- 생텍쥐페리 『남방우편기』 150쪽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나서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구나. 축하한다. 비록 네가 최선으로 목표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차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마땅한 태도라 믿기 때문이다. 그냥 너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최선이란 갖고 싶은 미래로서의 명사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동사로 쓸 때만 비로소 진짜 의미를 갖는 말이 아닐까 싶어. 그러나 이젠 너도 충분히 어른이니까 고백해도 된다면, 아비인 나도 실은 너와 같은 과정의 인간일 뿐이라 일에서도 삶에서도 모르는 것들 투성인데다 천지사방 분간 못하고 헤매기 일쑤라네. 하아! 일과 삶의 이 한결같은 어리버리함이여.
네가 하는 일은 분야도 다르고 또 내가 일을 시작하던 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라서 축하한다는 말 다음에 내가 하는 이 모든 말들은 자칫 사족일 수도 있겠다. 지금이 어느 때냐. 충조평판이 금기인 시대가 아니냐. 그러니 사뭇 조심스럽구나. 충고도 조언도 평가도 판단도 아닌, 단지 후배가 행복하길 바라는 선배의 당부라 하면 괜찮을까 하는 마음으로 아비의 말을 이어가련다. 며칠 전 퇴근한 네가 회사에서 일을 잘 하는 선배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우리가 나눈 대화를 기억하니? 고마운 선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면 그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고 내가 말하자, 너는 당연히 그렇게 하고 있다 했지. 일에서 리스펙트할 사람를 만나는 건 아주 큰 행운이며 그 행운에 마땅한 태도는 궁금해 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지. 선배가 보기에 지금 내가 잘하고 있냐고, 선배가 보기에 아쉬운 부분이 뭐냐고, 앞으로 선배처럼 일을 잘하려면 지금 내 시점에 필요한 게 뭐라 생각하느냐고 궁금해하고 물어보라고 말이야. 골똘히 생각할 때 너도 모르게 짓게 되는 표정과 눈썹의 각도를 만들며 넌 말했지. 아! 그 생각은 못해봤네.
딸아, 기억하렴. 너는 실패할 것이다. 좌절할 것이다. 정당한 노력이 무시될 것이며 눈부신 기여는 남의 공로가 될 것이다. 너를 싫어하는 이유를 끝내 알지 못하는 채로 너를 싫어하는 동료들과 일하게 될 것이고, 너로서는 억울한 오해와 억측의 수근거림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에 직면할 것이며 누구에게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는 시간이 예고 없이 찾아 올 것이다. 그것이 일하는 자의 기본값이다.
우리가 함께 좋아했던 드라마의 대사, 알지?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이 바뀐다는. 그 말의 뒷면은 이런 게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겐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때론 그렇게 상황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며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면서 스스로의 성장을 도모해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면 나쁜 모든 것들도 네 일과 인생에 좋은 후일담이 되어줄 거야.
위안부 이슈가 뜨거웠을 때 우리나라 외교의 고위 관리가 할머니들을 찾아갔었어. 그야말로 외교적 제스처와 미소로 다가오는 그에게 위안부 할머니가 뭐라고 첫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 “당신 누구예요?”여러 해 전의 일이지만 나는 그 장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당신 누구냐,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냐,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사느냐. 딸아, 나의 말을 기억해주렴. 하는 일이 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해야 할 말이 뭔지도 정확히 아는 법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말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지. 그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야. 할머니의 질문에 그 관리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단다. 그 관리를 만난다면 나는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생텍쥐페리의 남방우편기를 읽으셨나요? 읽었다면 저 대목의 문장들을 기억하나요? 저 문장들을 당신의 일과 연결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물론 남방우편기가 일의 의미를 주제로 한 작품은 아니니까, 내 물음에 대한 그의 답이 전부 부정이라 한들 이해 못할 건 아니지.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이 됨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자기 일의 의미 규정이 태도를 만들고 성장의 방향성을 만들고
어쩌면 행복의 디테일들을 만드는 시작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의 우편배달이 삼만 명의 연인을 죽고 살리는 일이라는 생텍쥐페리의 저 주체적인 자부심을 보렴. 이번 달 이십몇일에 들어올 월급만을 위해서라면 과연 석양빛을 헤치고 저렇게 뜨겁게 달려갈 수, 아니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내 딸이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흔쾌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일은 함께 하는 것이고 완벽한 인간은 없는 것. 흔쾌한 사람은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야. 오늘 점심은 파스타가 어떠냐고 먼저 묻는 사람이야. 아침에 출근하면 먼저 눈 마주치며 인사하는 사람이야. 혹여 잘해보려다가 실수를 하거나 일을 그르친 책임이 네게 있다면 장황한 의도 뒤로 숨지 말고 씩씩하게 인정하길 바란다. 그것은 정말 드물고 귀한 태도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씩씩하게 말하고 쓴 질책을 달게 받아라. 씩씩하다는 건 뻔뻔하다는 것과는 달라. 또 흔쾌한 사람은 회의실에서 좋으면 좋다, 아니면 이래서 아니다 리액션에 적극적인 사람이며 동료의 장점을 먼저 발견해주는 사람이야. 동료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를 궁금해 하지 않으며, 궁금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뭔가를 묻는 일은 없겠지. 모든 질문이 답을 얻는 건 아니지만 질문하지 않는 자는 어떤 답도 들을 수 없지 않겠니?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제대로 실행할 수가 없는데 그 시작은 질문이고 질문은 존중과 리스펙트에서 비롯되는 거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해도 될까? 일을 하면서 우리가 가진 것 이상을 욕심내지는 말자. 일하는 자의 목표가 스티브 잡스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것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할 뿐이야. 나는 스티브 잡스가 아니며 앞으로도 스티브 잡스가 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걸 단호히 밝혀두고 싶구나. 우리는 간신히 우리 자신이 되거나 마침내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을 뿐이지. 그러니 매순간 백퍼센트 나 자신으로 일하자. 회사나 세상이 알아주면 행운이고 끝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고 말이지. 무엇보다 내가 알면 되는 거지. 그리고 나와 함께 일한 동료 누군가 한사람은 알겠지. 그러면 됐지, 뭐. 폭풍과 구름을 뚫고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우편물을 자신의 612호 기에 싣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시키면 그 뿐. 그곳이 물론 다카르나 툴루즈는 아닐 테지. 쓰고 보니 죄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구나 싶네.
사랑하는 딸아, 석양빛을 헤치며 너는 어디로 달려가려나. 나는 또 누구를 향해 조금만 참고 기다려달라 말하고 있는가. 내일 아침도 아이폰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새로운 행성에 느닷없이 도착하기라도 한 듯 눈을 떠 출근 준비를 서두를, 너를 가만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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