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아름답고 진귀한 백조의 노래,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 Op.85
‘엘가’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그가 작곡한 « 사랑의 인사, Op.12(1888)»와 « 위풍 당당 행진곡 1번, Op.39(1901) »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만큼 유명합니다.
글ㆍ사진 송은혜
202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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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엘가_ 레지날드 헤인즈 사진(1912)

‘우아함’과 ‘장중함’을 음악으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금할 때는, 역사적으로 왕실 행사에 사용되었던 곡을 살펴봅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를 위해 연주했던 장-바티스트 륄리(1632-1687)의 음악이나 궁정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헨리 퍼셀(1659-1695)의 음악이 그 예지요. 너무 멀리 떨어진 시대의 음악이라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현재까지도 왕실이 살아있는 영국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왕실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여러 행사에서 선택된 음악은 위엄있고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에 가장 어울린다는 증명과도 같기에 행사가 끝나자마자 각종 언론에서 앞다투어 음악 목록을 발표해 관심을 끕니다. 전 세계가 주목했던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식(1981)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세기의 결혼식에서 자신의 작품을 두 곡이나 울린 작곡가가 있으니, 바로, 영국이 낳은 국민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1857-1934)입니다.

‘엘가’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그가 작곡한 «사랑의 인사, Op.12(1888)»와 « 위풍 당당 행진곡 1번, Op.39(1901) »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만큼 유명합니다. 19세기 후반, 다른 작곡가들이 새로운 음악을 찾아 서둘러 클래식 전통을 탈피하고 있을 때, 엘가는 브람스와 바그너 전통에 머무르며 대중에게 안정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 영국 작곡가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친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클래식 전통 안에서 영국 특유의 우아함과 장중함을 살린 엘가의 작품은 20세기 초반, 구스타브 홀스트(1874-1934)나 랄프 본 윌리암스(1872-1958)와 같은 후대 작곡가들이 영국 음악을 새롭게 고양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았습니다. 


« 사랑의 인사 Salut d’Amour », 고티에 카퓌송 첼로 연주  


« 위풍 당당 행진곡 Pomp and Circumstance » 1번, D장조,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BBC 관현악단 연주



작품이 시작될 때, 엘가는 ‘고귀하게’라고 악상기호를 적어 놓았어요. 

하지만, 대체 ‘고귀하게’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_자클린 뒤 프레


우아함, 고귀함이 가진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연주자가 있습니다. 자클린 뒤 프레(1945-1987)였지요. 한 인터뷰 중, 엘가의 ‘첼로를 위한 협주곡, Op.85(1919)’에 관해 답하면서 악보에 쓰인 악상기호, ‘고귀하게 Nobilement’가 구체적으로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 반문했습니다. 

깊고 사색적인 이 협주곡은 작곡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뒤 프레를 통해 뼈와 살을 입어 무대에 다시 오르게 됩니다. 열일곱 살 첼로 연주자가 처음으로 엘가 협주곡을 연주한 다음 날, 가디언지에는 "사라져가는 아름답고 진귀한 백조의 노래 "라는 평이 실렸습니다. 엘가가 악보에 적어 넣었던 ‘고귀하게’이라는 악상기호가 뒤 프레의 첼로를 만나 40년이 훌쩍 넘어 현실에서 구현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뒤 프레 연주를 통해 엘가가 협주곡에 담은 시적인 아름다움과 내면의 고통을 비로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연주하는 엘가 협주곡을 들으면 왜 그를 탁월한 의사소통가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존 바르비롤리가 지휘하는 연주와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연주에서 뒤 프레는 전혀 다른 해석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바르비롤리와 함께 한 연주에서는 브람스를 거쳐 바그너를 계승하는 깊고 진지한 작곡가 엘가의 음악이 드러납니다. 반면, 바렌보임이 지휘한 연주에서는 독주자가 앙상블 연주자처럼 지휘자를 배려하고, 서로의 개성을 듬뿍 담은, 사랑에 빠진 연인의 음악이 들립니다. 마치, 바렌보임이 머리로 꿈꾸는 이상을 뒤 프레가 첼로로 실현해 주는 것처럼 보일 정도죠.  


존 바르비롤리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워너 클래식)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자클린 뒤 프레와 엘가 협주곡 »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영상)


-사람들이 당신과 엘가 협주곡이 닮았다고 합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죠. 

-사랑했다고요?

-사랑했어요

-이제는 아닌가요? 왜, 과거형이죠?

-이제는 연주할 수 없으니까요....


다큐멘터리 감독인 크리스토퍼 뉴펜이 뒤 프레와 함께 진행했던 인터뷰에 담긴 내용입니다. 뉴펜은 1969년, 자클린 뒤 프레, 핀커스 주커만, 이차크 펄만,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을 주제로 음악 다큐멘터리(‘숭어’)를 만들었던 감독입니다. 24살,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나던 뒤 프레를 화면에 담았던 감독은 1980년, 다발성 경화증으로 첼로를 놓은 지 7년이 지난 그를 다시 화면에 담았습니다. 대답이 끝날 때마다 자동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는 왜 천재 첼리스트의 별명이 ‘스마일리’였는지, 청중뿐 아니라 관현악 단원들까지도 아낄 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애써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그의 시선은 대답이 멈출 때마다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그토록 사랑했던 연주를 대신할 것을 삶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에 연주를 멈춘 천재 첼리스트는 남은 시간 동안 교육자로 살다가 1987년, 마흔두 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영화와도 같은 뒤 프레의 인생, 사랑, 음악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는 그가 남긴 엘가 협주곡에 그의 농도 짙은 생을 겹칩니다. 다가올 운명을 알지 못해도, 그 순간에는 세상이 끝난다 해도 상관없을 만큼 더없이 충만한 그의 연주는 우리에게 생의 덧없음과 예술의 영원성을 동시에 전해 줍니다.    

자극적인 소리와 빠른 속도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우아하고 장중한 음악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질적 감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클린 뒤 프레가 들려주는 꾸밈없이 진솔한 연주와 고귀한 엘가의 음악으로 우리에게 내재한 존엄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아무리 비참하고 지루하고 절망스런 실존의 순간에도 다르게 보기를 선택하는 것, 그런 순간들을 행복하고 의미 있고 성스러울 뿐 아니라 더없는 희열의 경험으로 보는 방법을 " 우리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지음, 『모든 것은 빛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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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혜

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