읏-차. 지갑을 들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던 참이었다.
다리 사이로 따듯한 물이 흘러내렸다. 이 물은 고요히 흘렀다기보다 작은 폭포처럼 박력 있게 터져 나왔기 때문에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이가 세상에 곧 나올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미 40주를 꽉 채웠지만 뱃속은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고, 이틀 후면 유도분만을 해야 했다. 곧 있을 유도분만을 앞두고 아기는 드디어 용기를 냈다. 안온한 최초의 방을 박차고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그러나 엄마의 사정은 달랐다. '임박했다'는 강력한 예감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즐기지 못했다는 약간의 아쉬움이 일었다. 많은 미디어에서 출산의 순간을 감동적으로 그리지만 그 프레임 밖에는 여전히 현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가령 출산에 임박해서도 식욕을 제어할 수 없는 엄마라든지.
남편은 야근 중이었고 나는 나가서 콩국수를 사 먹을 생각이었다. 아기를 낳고 나면 당분간 미역국을 비롯해 모유수유나 몸 회복에 좋은 건강식 위주로 먹게 될 공산이 크다. 출산 전 한 끼 한 끼는 몹시 소중하므로 특정 메뉴가 떠올랐다면 그것이 최선인가 되묻고 후회 없이 먹어야 했다. 그날 저녁의 내 위장은 콩국수를 부르고 있었다. 시원하고 담백한 한 그릇. 미색 국물에 올려진 오이와 방울토마토의 명랑한 보색. 단연 여름의 시작은 콩국수와 함께 해야 마땅했다.
아, 지금 들어가면 미끄럽고 뜨거운 미역국만 2주 넘게 먹어야 한다는데. 그 고소하고 시원한 국물에 비밀스레 잠겨있는 면발 몇 번 후룩후룩 넘기고 가면 참 좋을 텐데. 나는 입맛을 다시며 대충 몸을 닦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택시 안에서 친정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출산 임박을 알렸다. 유월의 저녁은 아름다웠다. 반팔을 입고도 춥지 않고, 긴 팔을 입고도 덥지 않은 적당한 온도. 늦은 시간까지 밝고 푸른 하늘. 기분 좋게 불어오는 산들바람. 아무렴 뭐 어때, 하고 말하는 날씨였다. 차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배를 어루만졌다. 아가야, 곧 만나자. 씩씩하게.
얼마 후 나는 헉헉거리며 빨갛고 커다란 아기, 퉁퉁 부은 다소 충격적인 비주얼의 아기를 만났다. 앞서 말했듯 출산의 순간이 늘 뭉클한 것만은 아니다. 현실은 감동 옆에 보란 듯이 눈 뜨고 있다. 아무튼 뱃속에서 무럭무럭 먹고 열 달을 넘겨 나온 아기는 커다랗고 씩씩했다.
여름 아이는 젖을 먹고 이유식도 먹으며 기고 걸었다. 처음 맞이하는 계절마다 새로운 과일을 맛보았고,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볼록볼록 올라온 하얀 이로 고기도 잘근잘근 씹었다. 씹고 뜯고 즐기는 생활 만 육 년 만에 아이는 양념게장까지 섭렵한 K-어린이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정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콩국수.
그때 그 콩국수를 제지하며 양수를 터뜨렸던 아기는 여전히 콩국수 먹는 나를 지우개 가루 먹는 사람처럼 쳐다본다. 물론 가족 외식 메뉴로 콩국수는 가차 없이 탈락이다. 나도 어릴 때는 콩국수의 맛을 몰랐다. 세상에, 저 하얗고 걸쭉한 콩국물에 국수를? 심지어 설탕을 뿌려 먹기도 한다고?
아이도 언젠가는 콩국수를 즐기게 될지 모르겠다. 어쩌면 대쪽 같은 입맛으로 쭉 질색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이를 만나러 가던 길에 마주한 바람이 얼마나 상쾌했는지, 순산하라는 택시 기사님의 인사를 뒤로 하고 병원을 들어서던 그 공기가 얼마나 완벽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콩국수를 앞에 두고 하고 싶다.
어느새 아이와 함께 하는 일곱 번째 유월이다. 품에 안겨 울던 그 아기는 이제 친구와 비밀 이야기를 나누고 방탄 소년단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어린이가 되었다. 여름의 입구에 서서, 나는 그날 저녁 먹지 못한 콩국수와 빨간 얼굴의 아기를 떠올린다. ‘아무렴 뭐 어때’ 의 바람을 맞으며 나는 슬며시 웃는다.
정윤주 장래희망은 꾸준히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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