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일 때 마르크스를 처음 접했다. 저작을 읽거나 사상을 공부했던 건 아니고, 참가했던 모임의 학생들이 『공산당 선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한구석에서 들은 것에 불과했다. ‘운동권’이라 할 수 있는 고등학생들의 모임에 깍두기처럼 참여하다 말다 했던 건 진지한 얼굴로 혁명을 논하는 학생들이 근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싶었기에, ‘이제부턴 진심으로 혁명을 믿고, 민중봉기의 도래를 믿고, 나를 투신해야지!’ 결심하고 참가했지만, 막상 모임에 가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기 일쑤였다. 전위가 어떻고 레닌이 어떻고 하는 말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려서 아무리 노력해도 대화에 온전히 빠져들 수 없었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입학과 동시에 ‘미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해방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의 포화에 휩싸였고,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시위 같은 데 따라다니며 최루탄 연기를 마셨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운동권에 편입해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가봤던 술집을 품평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시위에 가고 ‘불온서적’을 읽는 게 더 멋있어 보였기에, 운동권이라 불리는 이들의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운동권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십대와 이십대를 보냈던 셈이다.
사회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던 이십대 후반, 비로소 사회학과 인문학 도서를 ‘자발적으로’ 손에 잡았다. 세상의 쓴맛, 아픈 맛, 치사한 맛을 보며 제 손으로 돈을 벌게 되자, 선배들이 쥐어주던 책을 억지로 읽을 때와 달리 책 속 활자들과 뜨겁게 조우하며 독서에 빠져들 수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벌어먹이는 가운데 시간을 쪼개가며 하는 독서는 그 어느 때 했던 독서보다도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색깔을 띠었다. 회사에 다니는 틈틈이 이런저런 독서 모임에 참여해 사회학 책들을 추천받아 읽었는데, 어느 순간이면 어김없이 마르크스의 책들이 추천목록에 들어왔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나 『자본론』 같은 책들을 추천받을 때마다, ‘읽지 않았지만 나는 다 알고 있지’라는 근거 없는 자만심을 갖고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토론도서로 선정된 『공산당 선언』을 읽게 되었다. 비장함이 뚝뚝 떨어지는 문장도, 그걸 읽고 있는 내 모습도 꽤 마음에 들었지만, 그 책에 크게 이입하지 못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이 단결해 대동 세상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나부터도 소유욕이라는 동력이 있어야만 뭔가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세상 모든 이들이 소유욕을 내려놓고 평화롭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너무 이상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책이라 간단히 결론지으며 다짐했다. 내 다시는 이 전설의 고향 같은 인물의 책을 읽지 않으리라.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나이 마흔을 넘긴 어느 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마르크스와 만나게 되었다. 돈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사전작업으로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작성하다가 『자본론』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갖은 핑계를 대고 넘어갔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돈에 관한 이야기를 쓰겠다는 자가 어찌 『자본론』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쓴 약을 삼키듯 억지로 『자본론』을 손에 들었다. 내 안에서 일찌감치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로 폐기처분 되었던 철학자의 작품을 꾸역꾸역 읽어나가며 연신 인상을 썼다. 뭐야! 왜 이렇게 어려워!
수식과 알 수 없는 경제학 용어가 잔뜩 나오는 이 난해한 책은 그러나, 가르쳐주고 함께 공부해주는 이들의 도움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조금씩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변신해갔다. 난공불락이라는 첫 장을 끙끙대며 넘어서자, 책이 말하려는 바가 서서히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조금씩,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비로소 이해했다. 날 때부터 밥 먹듯 들어왔던 말의 의미를 처음으로 이해했던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조망해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자본론』을 읽기 전까지, 나는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꿨다는 이야기에 냉소하는 편이었다. 고작 책 한 권으로 인생이 바뀌었다니 너무 심한 과장이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뒤 그 말을 믿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진실이었다. 내가 그런 책을 못 만났던 것일 뿐.
그 후로 나는 틈만 나면 『자본론』을 읽으라고 설파하고 다니는 종족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 입에서 마르크스나 자본론이란 말이 나가면 안개에 휩싸인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안타까움과 약간의 비웃음이 섞인, 이삼십대의 내가 마르크스를 권해주는 이들에게 보냈던 그런 눈빛을. 그 눈빛이 어떤 심정에서 온 것인지 잘 알기에, 붙잡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하기엔 너무 영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오해하지 말아달라! 그러나 나는 그렇게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내가 추천책에 대한 추천 사유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던 것이 기회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이라는 얇은 책을 읽었을 때였다. 이 책은 마르크스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몇 가지를 들고, 그에 대해 해명하면서 서두를 연다. 사람들이 흔히 마르크스를 ‘소련’ 혹은 ‘스탈린’과 동일시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마르크스는 결코 지구상에 존재했던 공산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실제로는 일그러진 독재를 했던) 국가들의 지배층에게 동조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쉬운 말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폭력과 강제로 봉기해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공산주의를 성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파헤치고, 자본주의 내부에 도사린 모순이 어떻게 스스로를 갉아먹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부피를 키워갈지를 치밀하게 밝혔다. 미래를 책상머리에서 고안해낸 이상론을 기반으로 그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계(이윤 제일주의)를 해결해가는 결과로서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문제제기도, 그에 대한 설명도 어쩌면 이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가! 책날개에 쓰인 저자의 이력을 살핀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는 오랫동안 마르크스를 공부하며 사회 참여 활동을 해온 ‘이론가이자 활동가’였다. 그에 반해 나는 『자본론』조차 제대로 읽고 소화해 내 것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였다. 저 자신도 설득하지 못한 단계인데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읽으라고 설득할 수 있었겠는가!
이 책을 통해,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서는 그다지 감흥을 받지 못했던 내가 훗날 『자본론』을 읽을 때는 마치 개안을 한 듯 벅찬 감흥을 느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엔 그 이유를 주로 나의 연령에서 찾았다. 젊은 날의 내가 읽어내지 못했던 것을 연륜이 쌓인 마흔이 넘어서는 읽어낼 수 있었다는 식으로. 그러나 그것은 독자인 내가 인생의 어느 시점을 관통해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작가인 마르크스의 사상이 어떤 변화과정을 밟고 있었느냐의 문제였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쓴 것은 30세가 되기 이전이었고, 『자본론』을 쓴 것은 50세가 되기 이전이었다. 『공산당 선언』을 쓸 때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다면, 자본론을 쓸 때는 이상과 결기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기를 지나 성숙한 시선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어보는 중년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만일 내가 이삼십대 때 『공산당 선언』 대신 『자본론』을 손에 들었다면 마르크스에 이입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자본론』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기반한, 때문에 막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저작이므로.
이삼십대 시절, 사회학이나 인문학 강연을 들으러 가면 강연자에게 ‘대안이 무엇이냐’고 추궁하는 편이었다. 현실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당신의 진단은 잘 알겠어. 그 문제의식엔 나도 동의하는 바야. 그런데 그에 대한 대안은 뭐지? 따지듯 물으면 강사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고, 그러면 나는 생각했다. 아니, 대안 제시도 못하면서 왜 저 자리에 서 있는 거야! 서른 중반을 넘기고서야, 세상의 어떤 훌륭한 사람, 어떤 훌륭한 책도 ‘대안’을 제시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인이 강연이나 책을 통해 해줄 수 있는 최대치는 문제가 무엇인지 직시하게 해주는 차원에 그친다는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번쩍 손을 들고 대안을 요구했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것은 공교육 기간의 대부분을 네 개의 보기 중 한 개의 정답을 찍어 맞추는 데 소모하며 보내야 했던 한 인간이, 공교육기관을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모든 문제에 딱 떨어지는 단답식 정답을 기대하는 습성을 벗어던지지 못했던 후과였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간단하고 손쉬운 해법이 있을 거라 믿었던 어리석은 중생의 낯뜨거운 자맥질.
젊은 날의 마르크스가 썼던 『공산당 선언』에 초점을 맞추었던 이들은 인간이 본성으로 갖고 태어나는 소유욕을 간과한 채 이상에 치우친 제도를 설계했다가, 저 자신의 소유욕과 탐욕에 넘어가 괴물 같은 체제를 만들어내는 비극을 연출했다. 반면 중년에 이른 마르크스가 썼던 『자본론』에 초점을 맞추었던 이들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모순점을 직시하고 그를 보완하는 정책을 실시해 ‘복지국가’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살기 좋은 선진국’을 만들어냈다. 전자에는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들이, 후자에는 사회주의가 접목된 자본주의 체제를 정착시킨 북유럽 국가들이 해당될 것이다.
독서를 마친 뒤 책 표지에 그려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 그리고 밀물처럼 밀려오는 깨달음. 내가 좋아한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쓰던 시절의 마르크스가 아니라 『자본론』을 쓰던 시절의 마르크스였다. 복잡다단한 회색빛 세상에서 섣불리 흑과 백을 갈라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마르크스가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에서 조금이라도 나아가려 애를 썼던 마르크스. 쉽고 명쾌하게 쓰인 한 권의 책 덕분에 내게 좋아하는 인물을 설명할 정교한 언어가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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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소설가)
장편 소설『잠실동 사람들』등과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