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출근하는 남편이 머리를 말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잘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잠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소리에 이번에는 별 수 없이 눈을 뜬다. 알아서 나간 남편과 달리 아이 등원 준비는 내 몫이다.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 분주히 움직이며 아이를 버스에 태우고 비로소 한숨 돌린다. 그렇다고 마냥 쉴 수만은 없다. 서둘러 커피 한잔을 내리고 출근 준비를 한다. 노트북과 수첩은 잘 챙겼는지 확인하고 여분의 마스크를 집어넣는다.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른다. 어렸을 때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고 그게 싫어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 그러니까 자유를 얻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자유롭다고 자신 있게 말할 자신이 어렵다. 물론 나도 잘 안다. 지금의 부자유는 내가 자처한 삶의 여러 선택들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을 말이다. 천연색으로 가득하리라 믿었던 어른의 삶이었는데 가끔은 흑백 속에 갇혀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그림책학교에 도착하니 『삶의 모든 색』이라는 그림책 한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백 쪽에 달하는 두꺼운 그림책은 짧은 문장들과 함께 아름다운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책은 우리 삶을 여섯 단계로 구분한다. 아이의 삶, 소년의 삶, 자기의 삶, 부모의 삶, 어른의 삶, 기나긴 삶. 나는 아마도 부모의 삶 부근을 지나가고 있겠구나, 혼자짐작해 본다. 책을 펼쳐본다. 한 두 줄의 응축된 문장들이 마음을 사로잡았고 문장과 호응하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나를 위로했다. 생로병사를 관통하는 우리의 삶이 그림책 한권에 스며있었다. 그림책의 안내에 따라 나는 30여 년 전 나의 어린 시절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덟 살 때였을까? 밤사이 허리까지 쌓인 눈. 온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로 모여들었다. 이것저것 간섭하고 통제하기 좋아하는 우리 엄마였지만 눈 온 날만은 예외였다. 놀이터에서 마음껏 뒹굴어도 괜찮았고 장갑이 다 젖도록 눈사람을 만들어도 문제없었다. 눈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돼 집으로 돌아갔지만 적어도 그날만큼은 잔소리가 없었다. 추운 겨운, 난로를 틀어놓고 가족끼리 모여 앉아 고구마를 까먹던 기억도 생생하다. 거실에 이불을 깔아놓고 가족들과 함께 천장을 올려다보던 나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날의 풍경은 3인칭 시점으로 여전히 생생하다. 이처럼 따뜻한 시간이 길고 오래 이어지기를 나는 강렬히 소망했다.
평온하고 충만했던 유년기와 달리 나의 사춘기는 조금 유별났다. 공부를 잘하고 싶었지만 학습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고 차라리 공부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날라리가 되고도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겁이 많았다. 스스로가 느낀 그 어중간함은 애매한 반항으로 이어졌다. 나는 꽤 길었던 사춘기 시절을 이도 저도 아닌 사람으로 지냈다. 욕심과 깜냥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어른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당시에는 참 길고 힘든 시간이었는데 돌아보니 시간은 빠르게 그리고 무심하게 흘렀다. 나는 대학을 가고 취업을 했으며 이제는 결혼을 해 한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 시간은 더 이상 느리게 흘러가지 않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그림책을 넘기다보니 어느새 ‘부모의 삶’에 다다랐다. 압축되고 농축된 문장들과 생생한 그림들이 지금 나의 삶을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었다.
“누가 좀 가르쳐주면 좋겠어요. 이 힘든 아침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낮에도. 밤에도. 하지만 자초한 일인걸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자신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될 거예요. 시간에 쫓긴다는 게 무슨 뜻인지 결국 알게 될 거예요. 혼자 있는 순간이 황금같이 소중할 거예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어요’라는 문장에서는 나는 서늘함을 느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 모든 인생의 선배들이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선뜻 건네주지 않았던 삶의 진리가 그림책 한가운데에 툭하니 놓여 있었다.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무렵 이어지는 한 문장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가끔은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할 때도 있어요.”
이 문장과 함께 온 가족이 모두 껴안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과거 어느 겨울밤 가족들과 함께 누워 천장을 보며 했던 바로 그 생각. 그리고 지금 나의 남편과 아들과 신나게 놀 때 생각하는 바로 그 생각 말이다. 그림책은 말해준다. 우리 인생은 대체로 고달프고 잔인하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 삶은 순간순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의 한 생애를 이렇게나 진지하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본 그림책을 또 있었을까?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우리 삶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다는 점이다. 고통스럽지만 직시하는 것. 그 정직함을 통해 이 그림책은 우리 삶을 관통한다. 내가 아는 모든 이에게 추천해주고픈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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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작가, 방송인)
방송을 하고 글을 쓰며 애TV그림책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