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는 중학교 3학년 때 다녔던 스파르타 학원에서 만났다. 여기서 '스파르타'라는 건 학원의 운영방식을 빗댄 표현이 아닌 실제 상호명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부모님의 위기의식이 가져온 결정이었다. 학원비 봉투를 들고 '스파르타'가 새겨진 준엄하고 거대한 간판 앞에 서니 나는 아득해졌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고대 도시국가의 정신을 받든 학원다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적을 올려준다"는 그들의 비결은 훌륭한 교육보다 강력한 처벌에 있었다. 그러니까, 죽도록 패서 학생의 생존본능을 통해 스스로 깨치게 만드는 데 있다고 봐야 할까. 매일 치르던 테스트에서, 오답 하나당 두 대의 체벌이 스파르탄의 룰이었다. 덕분에 99점을 받은 우수한 학생도 무려 두 대를 맞아야 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하물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배우는 시간보다 맞는 시간이 더 많았다.
외부의 위기는 내부 결속을 단단하게 하는 법. 스파르타의 혼령이 씌운 선생들의 탄압으로, 우리들은 누구보다 끈끈해졌다. 그건 일종의 전우애였다. 처벌을 기다리며 자율학습을 하던 방, 호명되어 매타작을 당하고 오면 누구랄 것 없이 모여 걱정해 주었다. 한편 다음 차례로 불려 나가는 전우에게는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했다.
S는 나보다 한 살 어렸는데, 역경 속에서도 무척 명랑한 친구였다. 하지만 교육과 폭력을 구분 못하는 학원 관계자들(선생이라 부르기엔 어려운)에 대한 반발심이 생존본능보다 컸다. 덕분에 도통 공부를 하지 않아 많은 매타작을 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와 함께 보내는 매일의 여섯 시간이 즐겁다고 했다.
S와 나, 그리고 몇 명은 그렇게 친해졌다. 저녁은 주로 컵라면을 먹었다. S는 새우탕면을 가장 좋아했는데, 뜨거운 물을 부어놓고는 아이돌 그룹 '신화'의 굿즈들을 정리하곤 했다. 컵라면을 먹고 우리는 종종 학원 앞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며 보냈다. 쉬는 시간에 오락실을 가는 것도 스파르탄의 규율에 어긋났던 것일까. 불시단속을 하러 나온 선생들에게 즉결 심판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의 우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스파르타의 교육 비결을 몰랐던 부모님께 몇 달간 당했던 폭력을 밝히고 그만두기로 했다. 마지막 날 떠나는 나를 친구들은 못내 아쉬워하며 멀리까지 배웅해 줬다. 인사와 함께 S가 건넨 편지에는 스파르타를 떠나서 행복하길 바란다는 기원과 나중에 대학교에 가면 같이 놀자는 약속, 그리고 이메일 주소가 있었다.
그 뒤로 이메일을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S를 다시 만난 적도 없다. 사실 얼마 전 물건을 정리하다 발견한 오래된 상자에서, 20년 전 S의 편지를 보고 겨우 기억이 났다. 꽤 오랜 시간 그 사람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변했겠지. 그때의 얼굴도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편지에 적힌 20년 전의 이메일로 "잘 지내?"라고 안부를 보낼까 하다 피식 웃고 말았다.
상자 안에는 그런 식으로 한때 알았던 사람들의 편지나 장난스러운 쪽지들이 있었다. 선명하게 기억나거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을 주고받을 정도였으면 소중한 친구였을 것이라 가늠할 뿐이다.
색 바랜 쪽지와 편지들을 뒤적이니, 지나간 인연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도 없고, "20년 만에 열어 본 상자에서 너 생각이 나서 연락했어"라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 같다. 그냥 그들은 상자 안에 담긴 것들로 기억하기로 한다. 그리고 20년쯤 더 지나고 다시 열어 봤을 때, 그때도 이 편지들을 뒤적이며 웃게 된다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다.
현재를 달려오느라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은 상자가 방에 있다면, 오늘 밤 한번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곳에서 잊고 지냈던 인연들을 떠올리고 웃음 지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는 유치하지만 그래서 즐거운, 지나간 인연들을 떠올리며 내 삶도 괜찮았다고 느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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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산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인게 인생이라던데 슬픔도 유쾌하게 쓰고 싶습니다. kysan@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