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그 사람은 복숭아를 좋아했습니다. 생일이 한여름이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가을이면 사과나 감, 겨울이면 귤처럼 계절을 대표하는 과일이 있지요. 여름은 뭐니 뭐니 해도 복숭아의 계절입니다. 수박이나 참외가 들으면 서운할지 모르지만, 여름의 여왕 자리에는 복숭아가 제격이지요. 시장에 솜털이 부숭부숭 올라온 복숭아가 진열되면 ‘그 사람의 생일이 다가왔구나’ 하고 짐작합니다. ‘맛있는 복숭아를 사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얇은 껍질이 저절로 벗겨질 만큼 농익은 복숭아, 작은 충격에도 멍이 드는 보드라운 피부를 지닌 복숭아, 코끝을 감도는 은은한 향을 지닌 복숭아, 한입 베어 물면 턱을 타고 과즙이 흐르는 복숭아.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복숭아를 만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복숭아는 호락호락한 과일이 아닙니다.
복숭아는 오랫동안 우리가 사랑한 과일입니다. 손오공이 백 년에 한 번 열리는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고 바위에 갇혀 사는 벌을 받았다고 『서유기』에도 나오지요. 『삼국지』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했다는 곳이 복숭아밭입니다. 한데 저장 기술이 발전한 요즘도 보관이 쉽지 않은 복숭아를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요즘이야 통조림이라도 만들지만 19세기 이전 사람들은 어떻게 관리했을까요. 아마도 린 할머니처럼 하지 않았을까요.
『린 할머니의 복숭아나무』를 지은 탕무니우는 조각을 하던 예술가라고 합니다. 국내에는 『후두둑!』, 『아주 무서운 날』 같은 그림책이 여러 권 출간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그림책상을 여럿 수상한 대만 작가입니다. 『린 할머니의 복숭아나무』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데 작가는 단순한 형태를 잡아내 그림을 그립니다. 이런 스타일 때문에 대만의 '레오 리오니' 혹은 '고미 타로'로 불린다고 합니다.
형태는 물론이거니와 색을 쓰는 방식도 심플합니다. 린 할머니 집에 있는 복숭아나무 한그루에 꽃이 피고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복숭아꽃이나 열매만 분홍빛이 아닙니다. 린 할머니 뒤의 산도 하늘도 땅도 심지어 할머니의 머리카락도 모두 복숭아색으로 물들었습니다. 너무 심한 비약인가 싶지만 잠시 복숭아나무 아래 서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잘 익은 복숭아에서 피어나는 달콤한 냄새가 온 세상에 가득하겠지요. 그 황홀한 기분을 작가는 온 세상이 복숭앗빛으로 물든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단순하지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복숭아 열매를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아기 다람쥐였습니다. 은은하게 퍼지는 다디단 복숭아 냄새를 맡았다면 참을 수가 없겠죠. 아기 다람쥐가 린 할머니에게 부탁합니다. “복숭아 한 개만 먹어도 돼요?” 할머니가 복숭아 한 개를 따 주자 다람쥐는 맛있고 먹고 단단한 복숭아씨를 땅에 묻습니다. 이 모습을 염소가 보았군요. 염소들도 할머니에게 가서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조릅니다. 역시 복숭아를 느릿느릿 먹고 시냇가에 복숭아씨를 품은 똥을 눕니다. 이어서 찾아온 호랑이도 복숭아를 먹고 퉤퉤 씨를 뱉습니다. 이제 모든 동물이 린 할머니를 찾아옵니다. 심지어 복숭아가 열렸다는 소문을 듣고 거북이도 느릿느릿 할머니를 찾아옵니다. 할머니는 달랑 하나밖에 남지 않은 복숭아를 나눠 먹을 묘안을 짜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 많던 복숭아를 모두 나눠준 린 할머니는 속으로 아깝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하지 않을까요.
이탈리아에 갔던 후배가 공동 부엌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 냉동실이 없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냉장고가 작고 심지어 냉동고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식재료를 사서 바로 조리를 해서 먹어야 합니다. 꾸역꾸역 사서 냉동고에 보관할 수 없으니까요. 냉장고가 인류의 삶에 비약적 발전을 가져온 건 사실입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삶을 뒷걸음치게도 했습니다. 인류의 지혜라 부를만한 각종 저장 방법은 냉장고가 없었기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무엇보다 냉장고가 생기고 난 후 우리는 더 이상 나누어 먹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읽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시금치와 파가 흐물흐물하고 끝이 노래져 있습니다. 호박과 오이는 한쪽이 물렀습니다. 오래 보관하겠다고 냉장고에 넣어두지만 결국 쓰레기를 만들곤 합니다. 무엇이든 쟁여둘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맛있게 먹는 최고의 방법은 상하기 전에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보관법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여름에 이웃에게 나눠준 복숭아는 다양한 먹거리로 돌아옵니다.
복숭아를 받았던 이웃은 사과나 고구마를 수확해 나누어주겠지요. 냉장고에 넣어둔 사과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과입니다. 이웃에게 나눠준 사과는 감이 되고 배가 됩니다.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보다 훨씬 더 신선하게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지요. 앞으로 맛있는 복숭아를 만나거든 린 할머니를 떠올려주세요. 저온에 약하고 쉽게 무르는 복숭아는 보관이 어렵습니다. 냉장고에 두어봤자 단맛이 떨어지기만 합니다. 복숭아는 잘 익었을 때 남김없이 먹어야 합니다. 복숭아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린 할머니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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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화(어린이책·출판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