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는 경제, 경영서의 재테크 비법도, 한 줄로 간결하게 정리되는 자기 계발서의 따끔한 지침도 없다. 소설은 그저 한 인물이 사는 삶의 풍경을 펼쳐 보이고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바쁠 때, 한자리에서 다른 이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 볼 뿐인 소설을 읽는 건 과연 무용한 일일까? 2009년 등단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정용준 소설가가 첫 에세이집 『소설 만세』를 출간했다. 그의 에세이에서 소설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소설 안과 밖에서 부지런히 우리에게 안부 인사를 건넨 정용준 소설가를 만났다.
등단 이후 첫 산문집입니다. 어떻게 에세이를 출간하게 되셨는지와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문학잡지 <릿터>에 소설에 관한 에세이를 연재했습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에세이를 썼지만 그것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요. 이번엔 조금 달랐습니다. 소설에 관해 쓰다 보니 계속 쓰고 싶더군요. 저는 소설가니까 소설을 쓰고 또 쓰는 것이 당연한데 소설을 왜 그렇게 쓰고 싶은지, 그러면서도 왜 그렇게 쓰기 힘든지, 도대체 소설이 무엇이고,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나씩 표현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에세이를 연재하는 동안 '나'와 '소설'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아는 만큼 이해하게 되는 것도 많더군요. 연재는 끝났지만 소설에 대해 더 쓰고 더 썼더니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쌓였습니다. 그것을 모아 『소설 만세』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게 됐습니다. 쓸 때는 좋았는데 막상 출간하고 보니 '소설에 관해 이렇게 사적인 마음과 생각을 담은 글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까?' 약간의 걱정도 됩니다.
이번 에세이에 수록된 일부는 출간 전 <릿터>에서 연재되었어요. 연재 당시에도 독자분들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오로지 소설에 관해서만 얘기하고 있는 글이지만 독자들에게는 용기와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작가님의 글에서 독자분들이 찾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점이 있으셨는지요?
소설에 관해 썼지만 저는 그냥 제 삶에 관해 썼어요. 이 책은 소설을 잘 쓸 수 있도록 돕는 작법서가 아닙니다. 소설의 역사를 살피고 미래를 전망하는 이론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소설은 저에게 일이고, 취미이고, 일상이고, 잘 하고 싶은 것이고, 더 알고 싶은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려운 것이고, 잘 모르는 것이고, 무서운 것이고, 답답한 것이고, 관두고 싶은 것이고, 절망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어도 소설을 계속 쓰고 싶고 쓸 것이다'라는 제 다짐이 읽는 이로 하여금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힘쓰고 노력하는 것을 떠올리게 했던 것 같아요.
소설에 푹 빠져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고, 소설가로 글을 쓰게 되었지만 문학 문외한인 시절도 있다고 해요. 단숨에 작가님을 소설에 빠져들게 한 작품과 감상이 무척 궁금합니다.
대학 시절 비교적 늦은 나이에 철이 들었습니다. '그만 놀고 제대로 살아 보고 싶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습니다. 열정은 있었지만 그 열정을 쏟을 대상이 없었죠. 그때 학교에 문예창작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고 취미 생활에 불과했던 책을 실컷 읽어 보자는 마음으로 전과를 결심했죠. 하지만 학점이 너무 낮아서 전과는 할 수 없었고 복수 전공으로 문창과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읽기와 쓰기를 만났습니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취미처럼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 책을 놓고 한 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좋은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때 읽었던 책 중, 이청준 작가님의 『소문의 벽』은 읽은 후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며칠간 밤잠을 설칠 정도였습니다. 소설이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닌 인식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만난 최초의 비극이자 아이러니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처음 소설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와 여러 작품을 펴낸 소설가가 된 지금, 소설을 대하는 마음의 차이가 있을까요?
예전보다 '두려움'이 커진 것 같습니다. 처음 소설을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열정을 쏟을 대상을 만난 것이 행복했고 쓰고 읽는 것이 마냥 기쁘기만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갑자기 식을까 두렵습니다. 어느 순간 소설에 대한 사랑이 식어, 읽기와 쓰기에 마음이 동하지 않고, 욕망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책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쓰시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최근 읽으신 책 중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계속해서 읽어도 읽을 때마다 작가님의 마음을 깨우는 소설이 있는지도요.
최근에 즐겁게 읽은 책은 윤혜정 작가님의 『인생, 예술』입니다. 책방 '고요서사'에서 아무 정보도 소개도 없이 그냥 느낌이 좋아 구입했는데, 참 좋았습니다. 읽는 동안 즐겁게 밑줄 그어 가며 고개 끄덕이며 독서했어요. 제목이 『인생, 예술』이라니... 이렇게 직설적일 수 있나 싶었는데요, 다 읽고 나서 정말로 이 책은 제목과 '딱'이었습니다. 인생과 예술이 왜 짝꿍인지 근사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읽어도 때마다 마음을 깨우는 소설, 시간과 상관없이 언제나 현재인 것처럼 느껴지는 소설도 당연히 있지요. 하지만 그런 책들 너무 많고, 왜 그것이 그렇게 좋은지에 대해서는 짧게 답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언젠가부터 <한 사람을 위한 문학 이야기>라는 제목의 팟캐스트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제 마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문창과 수업을 들으며 이장욱, 이승우 소설가 등으로부터 받은 배움을 깊이 간직하고 계신 것 같아요. 작가님께서도 창작 수업을 하고 계신데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에게 꼭 남겨주고 싶은 것이 있나요?
학생들은 글 쓰는 방법을 몰라서 글을 못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모두 소설의 3요소인 '주제, 구성, 문체'를 알고 구성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압니다. '기승전결'도 알고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도 알고 있어요. 새로운 소설을 써야 하는 것도 알고 있고,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종종 말합니다.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지 않았으면 그냥 할 수 있는 것인데 근심하느라 쓰기를 못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늘 했고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면 행동이 어색해지죠.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방법을 몰라도 자연스럽게 말하고 생각하듯 일단 그냥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글쓰기에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용기'입니다. 용기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기 위해 엄청난 결심은 필요하지 않죠. 하지만 '일어나자', '씻자', '나가자'하는 마음은 필요합니다. 그 정도의 일상의 용기를 내자는 것이죠.
앞으로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좋은 소설,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압니다. '내 마음과 의도를 독자에게 전하는 것 너무 어렵구나'라는 새삼스럽지 않은 진리를 느낄 때마다 의기소침해집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기와 쓰기를 지속하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때때로 좋은 소설 한 편씩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용준 소설가.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선릉 산책』, 장편 소설 『바벨』, 『프롬 토니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중편 소설 『유령』, 『세계의 호수』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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