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에서 '팡'하고 터지는 사탕. 『칵테일, 러브, 좀비』부터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까지 조예은의 소설을 읽으면 언제나 서늘한 청량함을 느꼈다. 두번째 단편집 『트로피컬 나이트』 역시 '조예은 월드'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더욱 선명하게 폭주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괴물과 유령, 꿈을 빨아먹는 악마와 고양이 외계인. 영화를 보면 인간보다 기이한 '괴물'에 마음이 간다는 그에게, 이야기는 꾹꾹 눌러 담은 취향의 세계다.
로맨스, 정말 좋아해요
출간 전부터 신작을 기다리는 팬들이 많더라고요.
사실 평소에는 검색도 잘 안 하고 SNS도 닫아두거든요. 너무 휘둘릴까 봐. 보기보다 겁이 많은 성격이에요.(웃음)
인기를 실감한 적은 없어요?
동네에서 중고 거래를 할 때, 알아보는 분이 있었어요. "설마 작가님이세요?" 물으셨는데, 너무 쑥스러운 거예요. 아니라고 하면서 얼른 도망쳤어요.
대학 교양 수업에서 한 페이지 소설을 쓰고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고요.
전공은 미술이었는데 적성에 안 맞았어요. 원래 장르적인 영화나 소설, 만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교양 수업을 신청해서 처음으로 소설을 써 봤어요. 딱 한 페이지였지만 완성하니 큰 성취감이 밀려오더라고요. '나도 뭔가를 할 수 있구나' 처음 느꼈던 것 같아요.
특히 여성 독자들이 조예은의 소설을 읽고 나서 스릴러와 호러 장르를 다시 읽게 됐다는 평이 많아요. 첫 단편집 『칵테일, 러브, 좀비』는 여성 빌런이 등장하거나, 데이트 폭력을 다루기도 했으니까요.
오랫동안 장르물을 즐겨온 사람으로서 저 역시 불편함을 느낀 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처음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 여성에게 불편한 점이 없는 장르소설을 써보고 싶었죠. 또, 장르물의 관습적인 문법을 깨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어요. 클리셰를 잘 사용하는 작가분들은 정말 많잖아요. 그럼 내가 잘 하는 건 뭘까, 최대한 새롭게 쓰는 게 아닐까. 그렇게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와 이야기를 떠올린 것 같아요.
세상이 종말을 향해가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자주 등장해요. 한 인터뷰에서 "디스토피아는 사랑을 그리기에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조건"이라고 말했죠.
낭만적 이야기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제가 쓰는 이야기에도 낭만이 늘 있었으면 좋겠고요. 건조하기만 한 디스토피아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요. 인간적인 면이 없는 디스토피아는 배경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사랑을 말할 때 극한적 조건을 끌고 오는 이유는,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더 잘 보이듯이 그래야만 사랑이 더 반짝이고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거예요.
서로 다른 존재가 사랑에 빠지는 상황도 자주 등장해요. 「고기와 석류」에서는 중년 여성인 옥주가 인육을 먹는 괴물을 거두고, 「나쁜 꿈과 함께」는 악몽에 숨어드는 악마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죠.
두 인간, 특히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랑 이외의 다른 요소가 얽혀서 해석되잖아요. 순수한 사랑의 감정만을 말하려면 이런 것에서 벗어나서 이야기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사랑을 하는 주체들이 일반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기괴할수록 그 감정은 더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다 제가 로맨스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
관습을 깨며 나아가는 스릴러
「새해엔 쿠스쿠스」는 여성 빌런이 나오는 단편 「초대」가 떠오르는 작품이었어요. 가족 안에서 서로 비교당하던 두 여성이 복수를 꿈꾸는데요.
소설을 쓸 땐, 늘 일상적인 소재에서 출발하거든요. 「새해엔 쿠스쿠스」도 명절에 친척들과 모여서 본 다큐멘터리 장면에서 아이디어가 시작됐어요. 방에 모여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뭘 볼지 싸우다가 가장 나이가 많은 사촌이 리모콘을 뺏어서 다큐멘터리를 튼 상황이었죠. 사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면이 많잖아요. 평소에 연락 한번 안 하는 친척들이 모여서 불편하고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죠. 그걸 포착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폭력적인 상황은 가족 바깥에도 있죠. 사립 학교에 교사로 취직한 주인공이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이 묘사되는데요.
그건 실화를 바탕으로 했어요. 실제로 친구가 비슷한 일을 겪었고 저한테 소설로 써달라고, 일종의 고발을 한 거예요. 친구는 사립 학교를 배경으로 다 죽이는 소설을 써달라고 했는데 차마 그렇게 쓰지는 못하고 작품의 디테일로 넣게 됐죠.(웃음)
「릴리의 손」은 작가님에게도 각별한 소설일 것 같아요. 이 소설을 기점으로 세상을 좀더 희망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다고 했죠.
초기작부터 꾸준히 소설을 읽어준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가 「릴리의 손」과 초기작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가 결이 비슷한 소설처럼 느껴졌대요. 그리고는 그때보다 지금 네가 세상을 더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제가 그리는 세계를 되돌아보게 됐어요.
「릴리의 손」은 세상의 틈으로 서로 다른 시공간이 연결되는 이야기예요. 등장인물들은 차원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닫힐 때,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죠.
다층의 시간이라는 건, 작가나 독자는 여러 시간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지만, 인물들에게는 인지할 수 없는 세계잖아요. 그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하다가, 어쩌다 한번 닿았을 때 인물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재밌어요. 한 사람이 타인을 만나는 일도 비슷한 것 같아요.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세계를 갖고 있다면, 타인과 내가 접촉하는 순간이 평행 세계를 만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는 동화 『푸른 수염』이 떠오르는 로맨스 판타지예요. 원작 동화에서 푸른 수염의 방을 열어본 여성들이 무고한 피해자가 됐다면, 이 소설에서는 여성 주인공 메리블루가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요.
원작 동화 『푸른 수염』을 최대한 비틀어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어요. 동화 자체도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는 작품인데요. '푸른 수염' 캐릭터가 폭력적인 남편을 대표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렇다면 나는 최대한 통쾌하게 바꿔보자. 반대로 도끼로 살인을 하는 푸른 머리칼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면 어떨까?' 그렇게 발전시켜 나갔어요. 그런데 그냥 설정을 비트는 것에서 끝나면 안되겠더라고요. 늘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선 안되고 그 이상으로 사람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써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너머를 상상하다 보니, 중세의 마녀사냥이 함께 떠올라서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전개할 수 있었어요.
늘 최악을 상상하며 쓴다
예전에 안전가옥 블로그에 남긴 글을 보니, 전업 작가로 살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더라고요. 전업 작가가 된 지금은 어떤가요?
당시엔 정말 그런 고민이 많았어요. 남들은 다 취업 준비를 할 때, 뜬금없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기도 했고,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소설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했거든요. 어찌저찌하며 정신을 차려보니까 계속 소설을 쓰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매 순간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이야기를 하자는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한 인터뷰에서 늘 최악을 상상한다고 했지만, 추진력이 좋은 면도 있어요.
맞아요. 항상 최악을 상상해놓고 이것만은 피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면 끝까지 하게 돼요.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죠.
그동안 쓴 이야기가 많이 쌓였잖아요. 스스로 생각하는 조예은의 현재는 어떤가요?
이번 단편집을 묶으면서 예전 소설을 다시 봤어요. 처음 소설을 쓸 때보다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상태였는지 일기처럼 떠오르고요. 소설 쓰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야기를 만드는 게 너무 좋았지만, 어떤 세계를 만들고 싶은지는 잘 몰랐어요. 시간이 흐른 지금은 내가 원하는 세계는 무엇인지, 어떤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지 확신하게 된 것 같아요.
'좋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목표라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조예은이 생각하는 좋은 이야기에 대해 듣고 싶어요.
하나의 장면이 마음에 깊이 남는 이야기, 다 읽고 나서도 며칠 동안 그 장면이 불쑥 떠오르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좋고, 그렇게 쓰고 싶어요.
*조예은 디스토피아 속 사랑을 꿈꾸는 소설가.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등을 썼다. 스릴러, SF, 호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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