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와 불신이 지배하는 시대, 사랑의 위기에 로맨스 영화는 어떻게 답해왔을까? 『로맨스 영화를 읽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제 '노라 에프런'의 영화부터 퀴어 로맨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까지, 문화 기획자 김호빈이 영화사에 빛나는 로맨스 작품 19편으로 읽는 사랑의 인문학이다.
'샤이 로맨스 팬'이라고 하셨죠?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가장 아끼는 로맨스 영화를 꼽는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시리즈, 에리크 로메르의 <겨울 이야기>(1992),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프랭크 캐프라의 <멋진 인생>(1946) 같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가장 아끼는 로맨스 영화를 꼽자면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에요. 이 영화는 식민 지배, 이념 갈등, 한국 전쟁, 산업화 등 한국 사회의 거시적 맥락과 궤를 같이해 온 영화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 영화가 드디어 개인의 낭만적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촌스러울 정도로 순애보적인 사랑이 신파나 판타지로 느껴지지 않고 이상한 뭉클함을 전해주죠. 마치 어떤 상처와 기만의 시간들을 힘겹게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주 순수한 사랑 고백처럼요.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로맨스 영화의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 로맨스 영화의 대표적인 특징이 무엇인가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대체로 삶의 희망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남녀 주인공의 결혼 같은 해피 엔딩을 제시하죠. 그런데 그 과정이 결코 간단하거나 허무맹랑하지 않아요. 근대 정치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일컬어 유클리드 기하학에 버금가는 치밀한 논증 체계로 이뤄진 저작이라고 하잖아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역시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감정 변화가 두서없이 펼쳐지는 게 아니라 섬세하고 치밀한 내적 논리를 통해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게 제시되죠. 로맨스 영화는 사랑을 긍정하고 삶에 대한 낭만적이고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해요. 이를 위해 감정에만 호소하거나 감각적인 측면을 앞세우면 된다고 여길 법하죠. 그런데 로맨스 영화가 해피 엔딩의 지점까지 관객들과 동행하려면 감정과 논리를 섬세하고 치밀하게 결합시켜야 해요. 그러려면 시대상과 사회적 변화에도 기민하게 반응해야 하죠.
『로맨스 영화를 읽다』는 신자유주의, 대도시의 일상, 여성주의, 퀴어 같은 동시대의 화두에 로맨스 영화가 어떻게 응답하는지 탐구합니다. 이중 로맨스와 가장 어긋날 듯한 '여성주의'를 본격적으로 다룬 로맨스 영화를 추천하신다면?
저는 '여성주의'를 여성의 권리에 관한 정치적 입장을 포함하여 우리의 삶과 사회를 새롭게 구성하는 하나의 원리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추천 드리고 싶은 로맨스 영화는, 책에서 언급된 아녜스 바르다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1977)를 비롯해서 유럽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영화감독인 마를린 호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1995), 패니 플래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1992)입니다. 이 영화들에는 다정하고 부드럽게, 사려 깊고 섬세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이 등장하죠. 그리고 그 사랑은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공존하며 연대하는 사회상과 결합돼 있어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여성주의'와 로맨스가 조화된 사랑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을 넘어 우리가 사랑하고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르로서 로맨스 영화는 확실히 퇴조하는 분위기입니다.
단일 장르로서 로맨스는 하락세지만, 장르 간 경계를 허문 다양한 복합 장르 안에서 로맨스는 여전히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죠. 로맨스 영화 역시 시대 흐름에 맞춰 기민하게 변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가령, 남녀의 변화된 역할 구도를 도발적으로 보여주는 정가영 감독의 <연애 빠진 로맨스>(2021)나 퀴어 코드를 내세운 조은지 감독의 <장르만 로맨스>(2021)처럼 한국에서도 새로운 로맨스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죠. 하지만 장르로서 로맨스 영화가 퇴조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낭만적 사랑을 불신하게 된 것이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사랑을 불신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환승 연애>, <돌싱글즈> 같은 연애 예능이 올해만 20개 이상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연애 예능이 왜 이렇게 성행한다고 생각하나요?
낭만적 사랑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커진 만큼 이를 대리만족해주는 미디어에 대한 욕구도 커지는 것 같아요. 너무 바빠서 밥을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든 현실이 먹방 열풍을 불러온 것처럼요. 그런데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을 단순히 현실의 결핍을 보상해주는 판타지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사람들은 거기서 연애의 설렘과 환상만큼 날것의 관계와 감정이 주는 리얼리티의 질감을 느끼고 싶어하니까요. 그러니까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인기에는, 연애의 리스크가 소거된 대리만족을 통해 효율적으로 설렘 지수를 높이면서도 나름대로 사랑에 관해 성찰하고 사랑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측면이 공존한다고 봅니다.
『로맨스 영화를 읽다』가 로맨스 영화 덕후가 쓴 '영화 에세이'가 아니라 '영화 인문학'인 이유는?
저와 로맨스 영화 사이에 거리가 있는 것 같아요. '덕후'들은 로맨스 영화와 사랑에 빠져 그 안의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영화 속 장소에 가거나 소품들을 갖고 싶어 하겠죠. 그런데 저에게 로맨스 영화는 강렬한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거리감이 있긴 하지만, 자꾸 대화하고 싶어지는 친구 같아요. 제가 던지는 사랑과 인생에 관한 질문들에 로맨스 영화는 아주 섬세하고 사려 깊게 답해줘요. 그런 '우정'이 바로 인문학의 다른 이름 아닐까요?
어떤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하나요?
우선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어요. 우리의 한 시절을 수놓았던 추억의 작품들, 동시대의 풍경과 호흡하는 로맨스 영화들과 함께 영화 장르로서 로맨스 영화의 여러 면모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예요. 그리고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의혹 혹은 믿음'이라는 부제처럼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이 책이 답은 아니더라도 좋은 질문들을 드릴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질문은 비단 연애와 사랑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거예요. 갈수록 혐오가 커지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사랑의 가능성' 그러니까 정말 사랑이 존재하는지, 우리 삶에서 사랑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사랑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김호빈 문화 기획자. 시민들이 독립·예술영화를 친숙하게 향유해 문화 예술의 저변을 넓힐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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