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손잡기』의 권누리 시인이 좋아하는 '소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세계를 지키기 위해 힘껏 달리는 '소녀'들을 만나보세요. |
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나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같은 것이 없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없다'는 것이 나의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이것마저 사라진 셈이다. 나의 면면을 모조리 말할 용기나 자신, 떳떳함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단지, 열심히 숨기고, 애써 감추고, 아껴 보관하고, 간절히 지키고, 몰래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나 일 같은 게 나에게 달리 없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 이야기하고, 모두 내보이고, 모두 건넬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진 것을 '모두'에게 '모두'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가끔은 나의 전부가 '비밀인 것처럼'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말해지지 않는 것'을, 나는 '비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화 『우리는 시간문제』(하양지, 유어마인드, 2021)의 등장인물 영화감독 '이새우'는 주인공인 '배수현'(이하 수현)과 '우유진'(이하 유진)이 '비밀을 만드는 순간'을 목격한다. '10대 후반의 여자애들'이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이새우는 친구의 딸인 유진을 인터뷰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하고, 유진은 수현과 동행한다.(이새우의 집으로 떠나는 날, 수현은 유진의 동생 성진에게 "우리가 소녀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올게"라고 말한다) 이새우는 두 주인공에게 아주 사소해서 이상하게 느껴지는 질문을 던진다. '다녔던 중학교 근처에 있는 문구점 이름'과 '수업 끝나고 울리는 종소리 멜로디' 같은 것들. 면담이 끝나고 이새우가 관찰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이런 식이다.
"어제 본 TV 프로그램, 그곳에 나온 예능인의 소심함, 우리나라에 없는 과일, 내가 생각하는 예쁜 손가락, '진짜 좋은 날씨는 1년에 열흘 정도야', 기숙사 학교를 다니는 교복이 특이한 학생, 이 집에 와서 꾼 꿈 등등..."
조용히 대화를 듣던 이새우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에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다시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수현과 유진을 보며 생각한다. '석양이 지는 시간까지 그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비밀을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우리는 시간문제』의 주인공인 경영학 전공생 1학년 수현은 고등학생 때부터 '탈모거북'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이상한 복식의 남학교>를 연재하고 출간한 작가이고, 유진은 그런 '탈모거북'의 오랜 팬이다. ('탈모거북'이 수현임을 알게 된) 유진은 집안 사정으로 인해 독립할 거처를 구하고 있던 수현에게 선뜻 동거를 권한다. 『우리는 시간문제』는 유진이 수현에게 갖고 있던 '환상'을 부수고 수현을 '수현'으로서 인정하는 과정, 수현이 유진의 '사랑'을 천천히 이해하며 서로를 경험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는 작품이다.
작중 어느 날, 유진은 수현에게 '너를 처음 만나면 뭘 할지', '상상'했던 것에 대해 말한다. '상상' 속에서 유진과 수현은 벌판에서 고상하고, 우아한 이야기를 나눈다. 유진은 이 '상상'에 말을 덧붙인다.
"네가 소설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어려운 방식으로 설명해도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왜냐면 난 다 이해할 자신이 있으니까."
또 어느 날은 수현이 유진에게 '진실게임 같은 거'를 하자고 한다. '아무거나 솔직하게 말하는' 거로 끝인 이 허무한 게임에서 수현은 '비밀'을 고백한다. "너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라고.
『우리는 시간문제』에서 유진은 '탈모거북'의 작품인 <이상한 복식의 남학교>를 좋아하면서 그 작품의 작가인 '탈모거북', 즉, '수현'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자신'을 갖게 된다. 누군가를 모조리 이해할 수 있다고 느끼는 마음은 다소 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타인을 '다 알고 (혹은 알 수) 있다'는 착각과 가까워질수록 오만함과도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 대상에게 '다 이해할 자신이 있음을 고백'하는 일은 우습고, 뻔뻔하고 또 사랑스러운 면이 있다. 네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말을 하든, 어떤 글을 쓰든, '이해'하겠다는 것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그리고 모든 걸 '이해받는 (것 같은) 느낌'을 '인정'하는 일에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할까.
내가 사랑하는 소녀들은 이처럼 조용하고 단단하게 '비밀'을 만들고, 또 기껍게 그것을 발설하고 고백했다. 소녀들이 비밀을 말하게끔 하는 용감함이 작동하는 원리는 (아마도) '믿음'과 '사랑'에 근간을 두고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고백을 듣고 이해하고 그 '일(또는 감정)'이 비밀인 채 '남겨두는' 데에도 꼭 그만큼의 믿음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나의 '비밀 없음'이 감정적 허무와도 이어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따금 '비밀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더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고백'하기 위해 '비밀 같은 것'을 만들어 작고 단단하게 뭉쳐 책상 서랍 가장 안쪽에 보관해두고 싶은 것이다. 나를 열고, 펼쳐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기꺼이 나를 사랑하는 여자애들'을 떠올린다. 나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나의 사랑을 받아주는 사람들, 내가 모조리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 그리고 그런 나의 오만함과 과오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아무렴, 나도 이미 알고 있다. '비밀'은 발설될 때 비로소 '완전한 비밀'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권누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