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매혹스러운 지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해서, 그 순간을 공유하지 않은 이에게 매혹을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자주 매혹당하는 이들은 비밀이 점점 많아지고, 비밀이 많은 이들은 갈수록 외로워진다."
정은 작가는 산문집 『기내식 먹는 기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작가는 비밀이 많고 외롭습니다. 자주 매혹당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통증이 오듯 저릿저릿한 작가의 이야기에 매혹당합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기내식 먹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작가가 가르쳐준 대로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하면서 기꺼이 낯선 곳으로 용감하게 한 발 내디딜 준비를 합니다.
『기내식 먹는 기분』. 책 제목만 보면 참 설레는데요.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기내식 먹는 기분'은 비장하기까지 하더라고요. 제목에 대해 이야기해주시겠어요?
기내식과 똑같은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으면 아마 망할 거예요. 맛으로만 따지면 기내식이 맛있다고 할 수는 없죠. 그런데도 항상 기대가 되고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기내식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흥분된 마음 아래에 감춰진 핵심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고요.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살면서 죽음을 의식하게 되지는 않지요.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시속 800킬로로 하늘을 날고 있으면 죽음의 가능성을 한 번쯤 생각하게 되고, 그때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도 가장 크게 느끼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기내식 먹는 기분'은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기분입니다.
이 책은 15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한두 달을 생활인처럼 지내다 온 기록의 총합이기도 해서, 여느 여행 에세이와는 많이 다릅니다. 오히려 삶의 본질을 깨우치게 된다고 해야 할까요?
제목 후보 중에 '나를 보러 갔었어'가 있었습니다. 여행은 다른 동네를 구경하러 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와 거리감을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행을 떠나도 나의 일부는 내가 떠나온 곳에 남아 있게 됩니다. 가까이에서는 잘 안 보이던 것이 거리가 생길 때 잘 보이고 알게 됩니다. 매번의 여행에서 나에게서 내가 아닌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고 세공하듯이 점점 나인 것만 남게 됩니다. 여행은 나와 거리를 둠으로써, 내가 정확한 내가 되도록 스스로를 찾아가는 작업인 것 같아요.
내가 나 자신과 함께 있다고 할 때 그건 어떤 영혼적 관점이니까 물리적인 공간과는 상관이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내 생활 공간'과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었을 때 내가 나를 보게 되더라고요. 그런 걸 자기 객관화라고도 하죠. 처음으로 날짜 변경선을 지나 다른 나라의 도시에 있을 때, 내가 나로부터 물리적으로 떨어져서 나 자신을 들여다본 것처럼 자기 객관화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여행은 먼 땅에 거울을 하나 만들어 두고 오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이 끝까지 포기 못한 수동 카메라 덕에 저희는 가보지 않았거나 갔어도 보지 못했던 장면들을 작가님의 시선으로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무엇인가요? 아니면 카메라에 정말 담고 싶었는데 끝까지 담지 못한 장면이 있다면요?
'누군가의 눈빛'이요. 카메라에 정말 담고 싶은데 늘 실패하는 것이 '눈빛'입니다. 눈빛은 아무리 카메라에 담으려고 해도 다 담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땐 1초라도 더 오래 보고 기억 속에 남기는 것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카미노에서 에리히와 개의 모습을 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지만 전 생애를 통틀어 단 한 시간 정도만 마주 볼 수 있는 인연이었다면, 그 시간을 사진 찍는 데 낭비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생각합니다. 눈빛과 마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공간이 건네는 말'을 예민하게 감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뭔가 비법 같은 게 있을지요? 독자들에게 꼭 가보시라고 말씀해주고 싶은 공간이 있다면요?
영화를 전공해서 친구들하고 단편 영화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공간의 사운드를 녹음하고, 촬영하는 작업을 하면서 빛과 소리 등에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 촬영할 때는 '앰비언트'라고 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공간의 자체음을 따로 녹음합니다. 아무 소리가 없는 것 같아도 그 공간의 기본음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 영향을 우리가 알게 모르게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천하고 싶은 공간은 인도의 여행자 거리라 불리는 '뱅갈리토라'예요. 갠지스강의 성스러움과 뱅갈리토라의 세속성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이 좁은 골목길이 그림자처럼 갠지스강을 떠받치고 있거든요. 인간들과 오토바이들과 소들이 뒤섞여 있는 이 골목길은 먼지가 많아서 필터를 입힌 것처럼 빛이 은은하지요. 그래서 모든 게 물속을 떠다니는 것처럼 먹먹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다른 공간은 '손모니 호텔'인데, 그건 책을 읽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기내식 먹는 기분』에는 작가님의 첫 책 『산책을 듣는 시간』의 모티프가 된 장면들이 실제로 나와 『산책을 듣는 시간』의 애독자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결국 순례길을 걷고 나면 작가가 된다는 친구의 말이 맞았던 걸까요?
순례길을 걷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고 싶지만 이렇게 작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산책을 듣는 시간』의 많은 장면들은 그 길에서 만난 장면들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지만, 인생 자체가 순례길이라고 생각하면, 살면서 제가 만난 사람들, 많은 순간들이 모두 작품에 녹아 있습니다. 『산책을 듣는 시간』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저는 그래서 순례길을 걷든 말든 누구나 책 한 권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상에서 발이 조금 떠 있는 상태로, 유령처럼 서성이는 마음'에 기거할 자리를 마련해준 '합정동 359-33번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 '커피발전소'란 어떤 의미인가요?
커피발전소는 말 그대로 땅에 조금 떠 있던 제 발을 땅바닥에 붙여주었습니다. 커피발전소에서 일한 이후로는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환대의 마음으로 저를 받아준 곳이고, 제가 저의 모습 그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기분이 들게 해주었습니다. 그 공간 자체가 좋은 친구였던 것 같아요. 커피발전소가 문을 닫고서 몇 달은 마치 특수복을 잃어버린 히어로처럼 힘이 빠진 채 지냈습니다. 덕분에 명상을 시작했지만요. 현실의 공간 없이도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살 수 있도록 내면을 다지고 있습니다.
『기내식 먹는 기분』은 비행기 티켓 4장 값을 주고 읽어도 아깝지 않을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읽기를 권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예전의 저처럼 유령처럼 서성이는 마음을 가진 분들, 땅 위에 발이 0.1밀리미터 정도 떠서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지도 못하고 어디 한 군데 정착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 시간을 서성거리는 사람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슬아슬해지는, 가서 붙잡아줘야만 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그분들에게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거든요.
*정은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영화를 배웠고 현재는 대학원에서 서사 창작을 공부하고 있다. 여러 편의 단편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서점, 극장, 출판사, 고시 학원, 선거 캠프, 방송국, 드라마 편집 회사, 무인 경비 회사, 비서실, 절, 식당, 카페, 문화재 보존 업체 등에서 일한 적이 있다. 매년 한 달 이상 다른 도시에 머물면서 쓴 글과 찍은 사진을 두 권의 독립 출판물로 만들어 독립 서점을 통해 판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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