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 칼럼이 공개될 즈음에는 어쩌면 이미 새해를 맞이했을지도 모르겠다. 작년 이맘때에 어떤 블로그에서 읽은 별자리 운세에서는 나에게 업무량이 많겠지만 인간관계를 크게 넓힐 수 있는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꽤 들어맞았다고 생각한다. 그 외의 맞지 않는 여러 예언들이 있었지만, 원래 이런 미신은 좋을 대로 기억하는 게 이득이다.
은행이나 카드사 앱에 서비스되는 신년 운세를 기다리는 사람이 나 하나뿐은 아닐 것이다. 개인 정보를 가져다 바치며 여러 사이트를 전전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겹치는 말들이 있다. 오래전에 보았던 어떤 운세 앱에서는 내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고 욕심이 많은 사주를 가졌다고 했다. 한 곳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몇몇 곳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떠올려보면 첫 기억이 시작하는 다섯 살쯤부터 꾸준히 반짝이는 걸 좋아했다. 놀이터 모래밭에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외가 근처의 갯벌에 은화처럼 콕콕 박혀 있는 조개껍데기들, 이백 원짜리 뽑기 기계에 숨어 있는 싸구려 플라스틱 반지에 나는 환장했다.
틈만 나면 의자를 타고 올라 엄마의 액세서리 함을 열어봤다. 갯벌과 모래사장을 멤돌며 빛나는 것들을 주웠고, 용돈이 생기면 뽑기 기계를 돌려 반지를 뽑았다. 손에 넣은 반지는 고정 발을 벌려 보석만 빼냈다. 그것들을 엄마가 준 선물 모양 상자 안에 모아 보관했다.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았으니,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취향이었다. 나는 그냥 내가 모은 걸 보고 있는 게 좋았다. 그 역시 물욕이긴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이 천성을 설명할 더 적합한 단어를 찾아냈는데, 바로 '수집욕'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반짝이는 걸, 정확히는 반짝이는 것들을 모으는 걸 좋아한다. 내 눈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을 티끌 하나 묻지 않게 간직하고 싶다.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이 습성은 결국 진로에도 영향을 끼치고야 말았는데,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름만 듣고 금속 공예과에 지원한 것이다. 기대와 엇나가는 커리큘럼에 내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미 여러 인터뷰와 행사에서 구시렁거렸을뿐더러, 사실 그건 나의 부주의가 자초한 일이었으므로 할 말이 없다.(그렇다고 그 시간 전부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좋은 친구들을 얻었고, 당시의 모든 경험들은 그대로 내 안에 남아서 또 다른 양분이 되어 주고 있다)
지금은 그다지 미련도 없고 도망치길 잘했다 싶은 전공이지만, 그 안에도 심장을 뛰게 했던 지점들은 분명 존재했다. 이를테면 아주 찰나에 선명한 초록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이나, 일정 온도 이상에 다다랐을 때 반짝 빛나며 터지듯 녹아내리는 은의 모습, 그 은이 이어 붙인 동판과 동판의 매끄러운 틈새와 적절한 빛깔의 원석을 찾기 위해 누벼야 했던 종로의 뒷골목은 여전히 내 기억 한구석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나는 그것들을 꽤 열성적으로 사랑했다. 그때 나는 온갖 아름다운 오브제와 보석들을 찾아 동대문과 종로를, 을지로와 안국을 배회했다. 그러나 발품을 팔수록 낙담했는데, 왜냐하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고 나는 그것을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때 구경한 갤러리 중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삼청동 입구에 자리한 '바라캇 서울'이라는 골동품 갤러리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너머, 이솝과 국제갤러리 사이의 골목 안쪽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홈페이지의 소개 글을 참고하자면 아래와 같다.
150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바라캇 갤러리(Barakat Gallery)는 세계적으로 명망이 있는 박물관급 고대 예술 컬렉션을 4만여 점 소장하고 있습니다. (중략) 바라캇 가문은 5대에 걸쳐 예루살렘에서 수집한 성서 유물을 기반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비잔틴, 이집트, 이슬람, 아프리카, 선(先) 콜롬비아 등 시대와 지역을 확장하며 고대 예술품에 대한 집념과 열정, 헌신이 담긴 바라캇 컬렉션을 완성하였습니다.*
작은 박물관을 떠오르게 하는 그곳에는 낯선 문명의 조각품과 진흙이 굳은 동전,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단정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무려 5대에 걸쳐 고대 예술품과 보물을 모았다니. 그리고 동양의 낯선 나라에 그 소중한 것들을 보관할 수 있는 재력(!)과 능력이 있다니. 나는 부러웠다. 세계를 떠돌며 차곡차곡 보물을 수집한 그가, 그 갤러리의 주인이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어떤 전시를 보았을 때보다 낙담했던 것 같다. 내가 앞으로 쌈짓돈을 아껴 하나둘 모으게 될 어떤 공예품도 바라캇의 갤러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날, 뜻밖에 우울해진 삼청동 나들이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노트북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메일함에는 각종 기업의 서포터즈, 마케터즈 활동 지원서와 불합격을 알리는 메일이 번잡하게 공존했다. 머리를 비울 겸 동대문에서 산 원석들과 낚싯줄, 세공용 펜치를 꺼냈다. 비즈 공예는 손을 가만두는 걸 싫어하는 내 취미 중 하나였다. 노트북에 영화 한 편을 틀어둔 채 계속, 계속 원석 구슬을 꿰었다. 다 만든 다음에는 한 번씩 걸쳐보고서 다시 잘랐다. 그리고 다른 조합으로 또 구슬을 꿰었다. 그 취미는 단순 노동이라 눈이 심심할 수밖에 없었다. 영상 콘텐츠를 즐기기 시작한 건 그즈음부터였다. 나는 내가 만들고 자른 팔찌의 개수 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았다.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보다 보니 그 안에서 취향이 생겨났다. 손으로는 구슬을 꿰고, 눈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웃고 울었다. 나중에는 손을 움직이지 않고 영화만 보았다. 너무 이상하고 아름다우며 다양한 세상이, 삶이 그 안에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벼락같이 깨달은 것이다. 내가 종로의 보석상과 삼청동의 미술관들을 누비며 눈에 담았던 반짝임이 그 안에도 있다는 걸.
영화 <올드보이>의 마지막 눈밭 신은 정갈하게 균열이 간 맑은 원석을, <킬빌> 시리즈와 큐브릭의 <샤이닝>, 소노 시온의 몇 영화들은 피를 굳혀 만든 루비를, '에이리언'의 머리는 우주의 동굴에서 발견한 먹색 호박을 떠올리게 했다. 손에 쥐지 않고도 상상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훨씬 많은 반짝거림들이 그 안에 있었다. 나는 그만큼 그 세계에 매료되었다. 이야기와 캐릭터에, 일개 돌멩이가 외부의 압력으로 원석이 되고 그것이 가공을 거쳐 보석이 되듯, 작가의 의도 아래 태어난 캐릭터가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극복하거나 실수하며 끝내 사랑과 상실을 거쳐 다시 태어나는 모습에. 그건 직접 만지거나 진열장에 전시할 수 없지만 더욱 선명하게 내 안에 남았다. 가만히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끝없이 파고들게 했다.
내 수집욕은 범위를 넓혔고, 나는 이야기를 머릿속에 수집하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 견고한 유리 진열장을 하나 만들고서, 그 안에 내가 사랑하는 작품과 캐릭터들을, 어떤 명화보다도 아름다운 영상 속 장면들을 전시했다. 진열장은 얼마든지 넓힐 수 있었고, 나만의 머릿속 갤러리는 날이 갈수록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서 풍성해졌다. 그리고 나는 이 수집욕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졌다. 졸업 학점에 속하지 않는 교양 수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썼던 일기를 뒤적이다 몇 자씩 더 적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왔다. 이 결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기묘한 수집욕에 맞닿은 그 마음을 동력으로 글을 쓰고 있다.
삼청동 부지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한 어떤 진열장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남은 연재 동안에는 그 진열장 안에 보관해 둔 장면, 물건, 인물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기억들을 꺼내볼 계획이다. 무엇을 꺼낼지 상상하는데 조금 심란하기도 즐겁기도 하다.
요즘에는 유튜브 타로와 별자리 운세를 본다.
이 글을 읽는 모두, 신년 운세에서 뭐라든 가장 멋진 한 해를 보내길.
멋진 소장품도 많고 주기적으로 전시도 연다. 삼청동에 갈 기회가 있다면 꼭 가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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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소설가)
소설가.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등을 썼다. 스릴러, SF, 호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