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마감 때 무엇을 먹을까? 염승숙 소설가와 윤고은 소설가가 글쓰기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번갈아 연재합니다. 매주 목요일을 기대해주세요. |
마감에도 단계가 있는 법. 내 경우엔 편집자와 교정지를 주고받기 전에 송고하는, 맨 처음 원고를 끝마쳤을 때가 가장 힘이 든다. 홀로 완성시킨 초고를 다시 매만져서 마무리하는 첫 번째 원고. 이때는 원고를 '쓴다'는 표현보다는 '만든다'로 봐야 옳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하겠지만, 서사를 진행시켜나가는 개연성과 필연성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쓰인 이야기가 말이 되는가, 그럴듯한가 등에 대해 고심하길 반복하다 보면 일인 다역으로 젠가를 쌓아 올리는 기분이다. 어느 장면에선 나무 블록을 제대로 빼내지 못하고, 어느 장면에선 가까스로 빼낸 나무 블록을 또한 제대로 쌓지 못하는 식으로, 나는 자꾸만 서사의 탑을 무너뜨리는 패배자가 된 것처럼 초조하다. 이 게임에서의 승리는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다는 듯이.
그러니까 진짜 마감은 조판된 지면에 교정을 마치고, 수정 사항이 반영되고, 잡지 인쇄 직전의 PDF까지 확인한 뒤에야 이루어진다. 이 기간은 길게는 한 달이나 보름, 짧게는 며칠이나 단 하루인 경우도 있는데(믿기 어렵지만 서너 시간이었던 적도 허다하죠) 사실 이건 꽤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면서, 작가로서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과정이다. 사소하게는 오탈자부터, 크게는 문장의 배치가 뒤바뀐다거나 공들여 쓴 단락이 통으로 사라지는 공포(!)를 발견하고 싶지 않다면 눈을 부릅뜨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오래전의 지난날, H잡지에 실린 소설 전문이 단락이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봤을 때의 절망감이 제 트라우마입니다...)
젊었을 때는(세상에,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이야!) 마감을 마치고 나면, 닥치는 대로 뭔가 더 읽는 쪽을 택했었다. 미용실에서만 접하는 패션 잡지들을 두세 권씩 사서 깨알 같은 글자들을 몇 시간씩 읽어치운다든가, 당시에 즐겨 읽었던 식민지 시기나 전후 소설들의 세로쓰기 판본들에 집중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게 내가 정신이 한껏 고양된, 흥분 상태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돌아보면 마감 이후에 활자 중독자처럼 무모하게 구는 게 건강에 좋았을 리가 없어서, 나는 눈에 온갖 염증을 달고 살았는데 안통의 괴로움을 알게 된 이후로는 읽는 것보다 먹는 쪽으로 바꾸려고 애를 썼다. 일단 먹어서 허기를 달래고, 배 속을 채우고, 또한 잘 먹어서 소진된 기력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잘' 먹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고백하자면, 평소에도 나는 사실 음식에 대해서라면 '상당히' 무관심한 편인 데다가 뭘 먹든 다 '괜찮은데?'라고 생각해버리는 무미(無味!)건조한 타입이라서 그렇다.(누구보다 친밀한 대학 선배 '정'은 일찌감치 저란 인간을 간파해서, 이미 아주 오래전에 "얘는 미각이 없어!"라고 신인류를 발견한 듯 선언한 적이 있습니다. 자정이 넘어가는 무렵의 어느 식당에서였던가요) 그러니까 "뭐 먹고 싶어?"라는 질문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우리 뭐 먹을까?"라는 질문이 세상에서 가장 곤란한 사람, 그게 나다. 소위 '땡긴다'고 말하는, 먹고 싶은 음식이 별로 없어서 그리고 메뉴 선정 자체를 너무나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혼자라면 고민 따위 필요할 리가! 오랜 자취 경력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는 것에 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는 나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 매일의 식단 고민이 얼마나 나의 영혼을 쪼아대는지 알게 되었다. 새끼 고양이 같고 아기 새 같은 나의 아이가 입 벌려 오물오물 먹는 모습 앞에서는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게 스륵 사라지기도 하지만, 매번 눈앞에 당도하는 '오늘 뭐 해 먹지?'는 '왜 사는가?'와 비슷하게,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난제 같기만 하다. 아이가 조금 자랐지만, 사실은 요즘에도 다르지 않다. 냉장고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며 항상 반찬을 걱정하고, 엇비슷한 메뉴들을 반복한다. 아이의 것을 따로 차리기란 어려우니까 간을 세지 않게, 맵지도 않게 만들어서 함께 먹는다. 미소된장으로 국을 끓이거나, 부드러운 양지를 넣고 뭇국을 만들거나, 어묵과 불고기를 볶거나, 고등어를 굽거나... 누구나 예상 가능한, 한국인의 밥상 무한 반복.
그런데 (해)먹고 살기에도 바쁜 이 와중에 마감을 끝냈다면? 나이 들며 체력이 부족해지는 걸 절감하는 시기, 아이 때문에 하루하루 허방 짚듯 살아가는 상황에 마감까지, 끝마쳐야 했다면? 그렇다면 더더욱 단백질과 미네랄 등 영양소를 보충할 수 있는 식단을 고민하고 만들어 먹는... 어림없는 소리! 슬프지만, 건강을 생각하는 것도 기력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원고를 손보느라 내버려둔 집에서 일단 청소부터 해치워야 할 것 같지만 초연히 미뤄두고, 나는 외식과 배달 중 어느 쪽이 좋을지 고심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당연히, 남이 해 준 밥이니까.
사실 배달을 시킨다면 간단하다. 상식적인 선에서 메뉴를 고르고, 주문한다. 치킨이나 피자 등 생각 없이 먹어치울 수 있는 것들. 별로 특별할 것이 없어서 특히나 기억나는 것도 없는 게 흠이라면 흠. 배달 음식 중에 유독 기억에 남았던 건 두 가지였다.
어느 날은 마감 후에 입맛이 없어서 "우리 뭐 먹을까?"했더니 마침 아이가 뜻밖에도 "나는 단팥죽이 먹고 싶어요!"하고 손을 번쩍 들기에 죽을 주문해봤던 적이 있다.(당시 읽었던 전래 동화의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 재밌는 건, 배달되어 온 포장을 열었을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도 함께 들어 있었다는 건데, 나는 그제야 주문 과정에서 '□커피', '□식혜' 두 가지의 체크 박스가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커피에 체크하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걸 들킨 듯해서 조금 머쓱해졌지만 무심코 마셔본 그 커피는 정말이지 놀랄 만큼 맛이 좋았다. 사이즈도 무려 대용량! 단팥죽을 맛있게 먹는 아이 옆에서 '아아'를 마시며 나는 내가 주문한 가게를 다시 살펴보았고, 매장 정보에서 '특급 바리스타 출신 주방장'이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놓쳤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체크할 수 있는 박스는 세 가지였던 것이다.
□커피
□식혜
□붕어빵
또 다른 한 가지는 김치찌개. 마감을 마치고 너무 피곤한 상태라서 기름진 건 싫고, 그저 내가 만들지 않은, 소박한 집밥이 먹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아주 평범한 메뉴였는데 주문과 동시에, 배달이 지연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인기가 많구나'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한 시간을 기다린 내게 도착한 건 한눈에 봐도 '이걸 어떻게 다 먹나'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김치찌개였다. 나는 내가 주문한 게 2인분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고, 그제야 대다수의 리뷰에 쓰인, "양이 많아서 좋아요, 감사합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 집의 김치찌개는 1인분이 3인분처럼 왔다. 나는 2인분을 시켰으니까 체감으론 무려 6인분 가까이... 사실이고, 정말이다. 두 개의 용기 중에서 하나만 뜯었는데도 둘이서 다 먹지 못했고, 남은 것을 다음 날에 또 먹었다. 랩을 뜯지도 못하고 냉장고로 직행한 어마어마한 양의 다음 용기도 며칠에 나누어서야 다 먹을 수 있었다. 맛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 후로 나는 가끔씩 김치찌개나 먹을까, 하는 마음이 무심결에 들라 치면 은근히 긴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배달이 아니라면 마감을 마친 홀가분한 기분으로, '자, 나가볼까?' 싶은 마음도 들게 마련! 피로에 찌든 속을 달래려고 즐겨 찾아가는 식당들이 몇 곳 있다. 나의 만찬은 화려하지 않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니 주메뉴를 제대로 먹거나 즐기고 있지는 않다는 다급한 심정이... 순댓국밥집에 가서 "내장은 빼고 순대로만 주세요"라고 말하는 건 그다지 이상하지 않겠지만, 나는 다들 줄 서서 먹는 설렁탕집에서 김치만두를, 연식과 명성을 두루 갖춘 냉면집에서 양지탕밥을 주문해 먹는다. 설렁탕이나 냉면을 싫어하진 않지만, 각각의 그 집에서는 김치만두와 양지탕밥이 내 입에 더 맛있다. 또 애정하는 즉석 떡볶이집에 가면,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이 떡과 어묵을 다 먹는 것을 기다린다. 남은 국물을 퍼내고 김과 참기름을 뿌려 밥을 볶아주는 때만을 고대하는 것이다.(선배 '정'의 말대로 저는 미각이 없는 걸까요...)
거듭 말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 사실은 그다지 대단할 게 없다. 일상의 곳곳에서 특수한 이벤트가 벌어질 리 없고, 노동요를 부르는 누구나의 삶이 그러하듯 대부분은 일상적이고 반복적이다. 읽고 쓰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나 특기를 가지지 못한 나의 경우는 더 그렇다. 운동이나 음주가무를 즐기지도 않으니까. 심지어 미식도!
서머싯 몸은 "작가의 삶에서 등장인물을 떼어내면 외롭고 쓸쓸한 삶"이라고 말했는데, 그건 어쩌면 한평생 중독적으로 글쓰기에 임했던 그 자신 또한 자신의 '쓸모'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작가'라는 존재 가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분투의 과정이 '씀' 그 자체임을, 나는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 싸움과 씀, 쓰기 위한 싸움. 작가의 삶은 그것뿐이다. 그러니 잘 싸우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한다고, 이제야, 이제 와서야, 조금씩 깨닫는다. 잘 먹고, 잘 싸우고 싶어진다. 가능한 조금 더,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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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승숙(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