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시 지상주의자'라고 말하는 김복희 시인. 그는 시를 읽는 것과 '절대적으로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아주 비슷한 태도라고 말했다.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에서 시인은 '장점이 많은 장르'인 시,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시, 이 좋은 시를 같이 읽고 쓰자고 거듭 말하면서, 삶의 많은 선택을 할 때 시를 중심에 둔 자신의 경험을 소복하게 내어놓는다. 시를 두고 선택해온 것들, 그것이 자신을 어떻게 더 나은 곳으로 이동시켰는지 알기에 시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의 등을 살짝 떠밀어주는 책을 세상에 건넨다.
"어떤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안 내도 되잖아요. 그렇지만 시를 쓰는 사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차별적인 일을 봤을 때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게 돼요. 시가 이런 식으로 제 삶을 계속 움직여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시에 대해 지키고 싶은 게 있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 가는 거죠. 그전에는 나이도 물론 어려서 그랬겠지만, 많이 흔들렸던 것 같은데요. 지금은 내가 보고 있는 방향이 뚜렷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아요. 그저 이 선택이 얼마나 나의 시와 나에게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부분에 더 가치를 맞추고 선택하는 편인 것 같아요."
나는 '시 지상주의자'
첫 챕터가 아주 묵직했어요. 시 쓰기의 어려움, 곤란함에 대해 말하는 글이잖아요. 책의 첫인상만으로 훨씬 더 말 거는 느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간격 때문에 더 몰입이 됐던 것도 같은데요. 시인님은 이 책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생각하셨어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기보다, 이 책을 읽으면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운, 느낌을 불어넣고 싶었거든요. 반드시 시가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사실 시 창작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이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사람이 갖고 있는 개성에 따라 쓸 수 있는 표현이나 이미지가 아주 다양하니까요. 어떤 특정한 스타일을 알려주면 고정이 되어버리잖아요. 그렇게 써야만, 그렇게 시작해야만 하는 줄 알 수도 있고요.
이를테면 시 수업에 와서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게 시에 꼭 은유가 들어가야 하느냐는 거예요. 안 넣어도 되거든요. 게다가 우리가 쓰는 많은 부분이 은유고요. '시적인 은유'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지니까 그런 것들은 덜어내고, 어떻게 해야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담기로 했어요. 제가 어떻게 쓰는지, 어떤 식으로 시에 접근하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면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니까 이 책은 주춤주춤하는 분들을 뒤에서 살짝 밀어주는 느낌을 담으려고 한 거예요.
책 날개의 소개글에도 '많은 사람들이 시를 쓰고 시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죠. 한편으로는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아요. 나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닌데, 작가가 아니고 시인이 아닌데 왜 시인님은 많은 사람들이 시를 읽고 썼으면 좋겠다고 말할까, 하고요. 시에 어떤 멋진 것이 있기에 같이 읽고 쓰자고 말하는 걸까, 궁금할 것 같아요.
제가 사실 '시 지상주의자'예요.(웃음) '이 좋은 걸 왜 안 하지? 이거 너무 좋은데' 하면서 시를 영업하고 싶은 마음인 거죠. 시는 사실 어떤 키워드로 정리가 되지 않는 장르의 글이라고 생각해요. '실연의 아픔을 달래는 시'라는 식으로 정리가 뚜렷하게 되는 시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시들이 훨씬 많잖아요. 그래서 정리 안 되는 것을 읽으려고 꼼꼼해질 수밖에 없고, 섬세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를 사람들이 읽고 쓴다면, 그 꼼꼼함과 성실함 혹은 섬세함 같은 것들이 평소 자기 생활이나 태도에도 녹아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면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서로한테 너무 각박하게 굴지 않을 수 있게 될 거고, 더 헤아려줄 수도 있고, 더 헤아림을 받을 수도 있을 거예요. 제 안에서는 이 연결이 너무 자연스럽거든요. 그게 시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이거 너무 좋아" 하면서 영업하게 돼요.(웃음)
이 좋은 것 당신도 한번 해보세요, 하고 말이죠.(웃음)
맞아요, 그리고 시인만 시를 쓰는 것은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해요. 우리 모두 연예인이 아니지만 동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잖아요. 노래도 부르고요. 모두가 아이돌처럼 춤을 잘 출 필요는 없어요. 즐거워서 춤을 출 수도 있죠. 마찬가지로 시도 그냥 내 마음대로 쓰는 시가 있는 거고요. 그러면 새로운 시를 계속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돈을 내고 시집을 사서 읽기도 하지만 그저 내가 즐거워서 시를 쓸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길을 넓히고 싶어요. 이 즐거움을 모두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으니까요.
많은 시 독자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시 안 읽잖아요. 심지어 그때도 문제로 풀고 끝이죠. 그럼에도 우리 삶 속에 계속 시는 들어 있어요. 이를테면 우리에게는 짧은 문구로 뭔가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말로 뭔가 얘기하고 싶어 하는 욕구들이 있는데요. 그 욕구를 숨기지 말고 '시'라는 창고를 통해 펼치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에요.
'좋음'을 갖는 것
'나는 시 쓰는 이들이 품고 있던 기묘한 에너지가 좋았다'(19쪽)는 표현도 나오는데요. 쓰는 사람들, 일상에서 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안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다르던가요?
쓰는 사람은 일단은 어딘가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 같아요. 그리고 몰두한다는 건 선택을 확실히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뭔가를 선택하고 몰두할 수 있는 어떠한 영역을 가진 사람은 에너지가 있어요. 그리고 어쨌든 일상 언어와 시의 언어가 아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요. 서로 계속 영향을 주거든요.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들은 평소 삶에도 어떤 태도가 배어 있고요. 저는 그런 게 좋아요.
또, 돈이 전혀 되지 않는 이것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묘하지 않나요?(웃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은 좋아서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텐데요. 그 '좋음'을 갖는 것 자체가 그 사람 안에서 무언가를 계속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이유로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안 가진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고요. 특히 그중에서도 돈도 안 되고, 이해 받지 못하는 가능성이 훨씬 큰 시를 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 같은 게 신기하고, 그걸 계속 보고 싶은 거죠.
'시인들이 일상을 더 많이 누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상을 덜 누리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합니다.'(121쪽)라는 표현도 좋았어요.
지금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뭔가 쓰고 있는 거죠, 뇌가. 그럴 때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완전히 삶을 사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도 해요. 중간쯤, 어딘가 다른 데 발을 걸치고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발을 걸치고 있을 때 더 많이 느껴지는 것들도 있어요. 그것을 계속 저장하는 습관이 저한테 있고, 그런 면에서 일상을 더 많이 누리는 셈이죠. 누가 보면 "너 지금 집중 못하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나름대로는 되게 집중하고 있는 삶이에요.(웃음)
삶의 어떤 순간을 두 번, 세 번 사는 셈이네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덕분에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고 하지만 시를 쓰면 되돌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해요. 쓸 때에 그 시간을 다시 불러오게 되고, 불러올 때마다 그 시간이 달라지니까요. 저는 제가 쓴 시나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 또 재밌더라고요.(웃음) 왜 이렇게 썼지, 여기에서 다음 줄이 왜 나오는 거지, 하면서 저 스스로 쓰던 때를 떠올려봐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고 왜 여기서 이 표현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분석해보는 거죠. 그런 게 즐거워요.
'나는 한 번도 시보다 먼저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13쪽)고도 하셨고요. '저는 저 자신을 믿지 않아요.(중략) 그래서 저는 제가 쓴 시를 믿어요.'(112쪽)고도 하셨어요.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서 시라는 것이 시인님께 나침반처럼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시를 안 썼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못된 사람이나 나쁜 사람,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시를 써서 저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거든요. 진짜 시 지상주의자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요.(웃음) 기억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떠나버리잖아요. 그런데 그 기억을 시에 남겨놓으면 적어도 그 작품 속에서는 영원히 있게 돼요. 그렇게 한 번 했으니까 다른 걸 또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도 주고요. 저는 저 스스로는 안 믿어요. 하지만 제가 쓴 것들은 믿어요. 그리고 그것이 나의 삶을 계속 바꿔왔기 때문에요. 앞으로도 그것이 내 삶을 계속 바꿔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도 있어요.
삶을 바꿔주는 시 쓰기라는 것에 대해 들으니, 삶의 태도로서 시를 대하는 시인님의 마음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사실은 제가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을 강조하는 것도 있어요. 물론 경험이 모두 시가 되지 않을 가능성도 큰데요.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을까, 라는 것이 저한테도 고민이긴 했거든요. '많이 생각하자.' 이게 제가 내린 결론이었어요. 함부로 생각하지 말고, 더 많이 꼼꼼히 생각하자, 여러 번 보자, 하고요. 시가 나한테 해준 게 이렇게나 많은데 그렇다면 나도 존중을 표해야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대로 쓰고 싶다
시인님은 퇴고를 하기 위해서 초고를 쓴다고 말씀하시죠. 저는 그 뒤에 하신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온 기회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싶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글쓰기 원칙이기 때문에 퇴고를 끝에 끝까지 하고 싶다는 말씀이었어요.
저는 퇴고하는 거 정말 좋아해요.(웃음) 사실 퇴고가 안 힘든 건 아니에요. 힘들긴 해요. 그렇지만 퇴고를 할수록 더 좋아지니까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초고를 완벽하게 써야 된다는 부담감은 별로 없는 편이에요. 초고는 정말 엉망이죠, 그래서(웃음) 진짜 아무도 못 보여줘요. 다만, 계속 시간을 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저한테 시는 '시간을 들인 만큼 보답을 해주는 글'이에요.
퇴고 과정에서 특별히 나를 괴롭히는 시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정말 안 되는 시도 있긴 있어요. 어떻게 해도 시가 안 되는 경우도 사실 있죠. 할 수 없어요. 그럴 때는 그냥 엄청 망가질 때까지 계속 퇴고를 해보고요. 그래도 안 되면 일단 둬요. 당분간 놔뒀다가 다시 꺼내서 보고요. 그때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다시 해보고, 아직 아닌 것 같으면 그냥 두는 식으로 시간을 많이 주죠. 그렇기 때문에 한 편에 들이는 시간이 과한가, 생각도 하는데요. 별로 과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안다' 이런 느낌이 있죠.
엄밀함에 관한 이야기 같기도 해요. 친구 분의 자녀의 안부를 물으면서 했던 실수를 곱씹는 장면이 있죠. 거기서 '말이 죄를 짓는 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165쪽)고 썼어요. 그렇다면 시를 쓰실 때는 훨씬 더 조심하게 될 것 같거든요.
어쩔 수 없이 조심하게 돼요. 물론 초고는 그냥 써요. 조심한다는 건 퇴고할 때이고요. 늘 내 시에 대해서 책임은 내가 져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이런 식으로 할 수도 있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쨌든 내가 한 거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까지 해야 '시'라는 생각이 사실 있어요. 시를 쓰면서 아무한테도 안 혼나고 싶다는 생각은 없고요. 오히려 내가 쓸 수 있고, 쓰고 싶은 걸 제대로 쓰고 싶다는 마음에 더 가깝죠.
시를 쓸 때와 산문을 쓸 때 이 태도는 어떻게 달라지나요?
산문에서는 최대한 오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쓴다면 시에서는 오해를 늘리는 방향으로 쓰는 것 같아요. 산문을 쓸 때는 내가 쓰는 거라는 사실을 사실 인지하고 있으니 내가 더 많이 들어가고요. 시는 산문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시는 최대한 모르는 느낌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시가 가는 방향을 제가 감지하고 싶지가 않고요. 시를 쓸 때는 그냥 시가 가게 하죠. 이를테면 어떤 씨를 썼는데, 평소 내 생각과 너무 다른 느낌의 시가 나온 거예요. 그러면 무서워요. 지금의 나와 너무 다른데 괜찮나, 이런 시도 혹시 괜찮을까, 고민을 하게 되고요. 그렇다고 그걸 막 뜯어고치지는 않아요. 그 시가 그렇게 돼야 하는 결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니까요. 그럴 때는 시간을 두고 지켜봤다가 그래도 이대로여야 한다는 생각이 되면 그냥 발표해요. 그것까지가 모두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말씀 들으니까 시를 쓸 때 약간 아예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고, 자유로움을 많이 느끼실 것 같아요.
맞아요. 시는 "우리 같이 헤맬까요?" 이런 느낌이에요. 여기가 어딘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같이 가요, 이런 느낌인데요. 그게 너무 좋아요.
항상 쓰고 싶어요
'절대 독자'에 대해 얘기하신 부분도 아주 흥미로워요.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신 거예요?
시 쓰는 사람들은 다들 외로워 하거든요. 시가 워낙 안 읽히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누가 내 시를 읽을까? 팔리기는 할까?'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읽을 거란 말이죠.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 시를 좋아할 수도 있어요. 저는 '창작자'라는 이유만으로 내 작품을 폄하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언제나 절대로 잘 읽어주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분명히 시를 쓴 나보다 더 깊고 자세하게 읽어줄 사람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 독자 즉, 절대 독자를 상정하는 거죠. 그러면 일단 쓰자,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사람은 읽겠지, 하고 생각하면 쓸 수 있게 돼요.
두 번째 챕터에서는 구체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담으셨어요. 그 질문은 어떻게 선정이 됐나요?
'복희도감'이라는 메일링을 작년에 했었는데요. 거기서 독자 분들한테 쓰면서 궁금한 것이 있었는지 질문을 받았어요. 그렇게 받은 질문을 조금 다듬어서 싣고 답변을 길게 써봤죠. 근데 정말 다들 궁금해하는 질문이기도 하고, 저도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들인데 마침 물어봐주셔서 수록할 수 있었어요.
답변을 쓰면서 시인님이 품고 있던 고민도 해결된 부분이 있었나요?
앞서 얘기한 절대 독자는 저도 쓰면서 해결된 부분이었어요. 쓰면서 저 역시 '그래, 이거야' 하고 생각했죠. 또, 저를 믿지 않고 시를 믿는다는 이야기도 쓰면서 찾았어요.
시인님은 언제 가장 시가 쓰고 싶어지나요? 시를 쓰고 싶은 순간은 어떤 순간인지 궁금해요.
항상 쓰고 싶어요. 매일 쓰고 싶은데요. 잘 써야겠다는 부담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 같아요. 일단 쓴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니까요. 시 쓰기는 늘 새롭고요. 늘 저한테 자유를 주기 때문에 이걸 대체할 다른 것이 아직 저에게는 없는 것 같아요.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없었어요.(웃음)
사실, 살면서는 그렇게 자유롭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하거든요. 반면에 시는 저한테 너무나 큰 자유를 줘요. 늘 가고 싶은 곳인 거죠. 저는 평소에 메모를 진짜 많이 해요. 휴대폰에 주로 메모를 하는데요. 생각나는 구절이나 갑자기 떠오르는 말, 무언가를 봤을 때 쓰고 싶어지는 것들을 다 메모하거든요. 거기에 상황까지도 메모를 해요. 그래서 나중에 시로 쓰죠. 때때로 잘 안 될 때도 많지만 오늘은 그런가 보다, 내일 또 쓰자, 생각하고요. 그래서 특별한 때나 소재를 기다리지 말라고 늘 사람들한테 얘기해요. 항상 쓰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 자세로 자신을 만들어 두면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고요.
(장소 협조 : 카페꼼마 삼일빌딩점)
*김복희 김복희는 1986년 태어났다. 201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 『희망은 사랑을 한다』, 산문집으로 『노래하는 복희』『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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