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의료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문제에 가깝다. 죽음은 개인적인 일인 동시에 내가 사는 일상,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이야기로 국한할 수 없다.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론 보도에 등장하는 명의, 신약, 의료 기술, 자기 계발 담론에 귀 기울이는 만큼 왜 사람들이 일하다가 죽고, 가난해서 죽고, 학대로 죽고, 고립으로 죽고, 차별로 죽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사건 사고'가 어떻게 나의 노화, 질병, 돌봄, 죽음과 연결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전환 해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의료인류학자 송병기 저자가 쓴 『각자도사 사회』에서 읽었습니다. 오늘은 이 저자를 만나보겠습니다. <황정은의 야심한책>, 시작합니다.
<인터뷰 - 송병기 의료인류학자 편>
오늘은 노화, 돌봄, 죽음에 관심이 많은 의료인류학 연구자를 모셨습니다. 『각자도사 사회』를 쓴 송병기 선생님입니다.
황정은 : 자기소개를 부탁 드릴게요.
송병기 : 저는 의료 인류학 연구자이고요. 현재 노화와 돌봄, 특히 죽음을 의료와 금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요양원이나 요양 병원, 호스피스 같은 의료 시설에서 연구를 해왔습니다.
황정은 : 의료 인류학이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가요?
송병기 : 먼저 인류학을 간략하게 소개를 하면, 여러 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저는 일종의 '왕복 승차권'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다른 사회 과학 분야와 다르게 인류학자는 연구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 직접 가서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수 년 동안 '참여 관찰'이라는 연구 방법을 사용해서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고요. 그러고 나서 처음에 본인이 질문을 했던 장소로 돌아와서 내가 무엇을 배웠고 깨달았는지 성찰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연구를 마무리하는 학문 체계거든요. 그 중에서 의료 인류학은 질병과 돌봄, 그를 둘러싼 의료 체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연구자들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황정은 : 선생님은 왜 의료 인류학자가 되셨나요?
송병기 : 처음부터 의료 인류학자가 되겠다고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작용한 것 같아요. 부모님이 맞벌이로 항상 바쁘셔서, 학교 갔다 오면 조부모님 댁에 있었거든요. 조부모님이 저를 돌봐주셨는데 그때 어르신들을 많이 봤어요. 그분들이 하는 이야기들 그분들이 저를 대하는 방식 이런 것들이, 그때는 몰랐는데 인류학을 연구하면서 눈에 보이더라고요. 사람들이 돌봄에 대해 생각을 너무 너무 납작하게 하는 거 아닌가, 누구나 질병을 겪는데 너무 의사 이야기만 정답처럼 되고 있는 거 아닌가, 내가 외국에서 본 죽음과 한국의 죽음이 너무 다른데 왜 다를까, 그렇게 연결이 되면서 이것을 나의 화두이자 연구 질문으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황정은 : 책 제목이 『각자도사 사회』인데요. '각자도사'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강렬하잖아요. 이 말을 왜 책 제목으로 삼으셨어요?
송병기 : 주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세요. 각자도사라는 말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서도 '각자도생에서 온 말이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고 하시는데요. 첫 번째는, 저는 마음이 좀 안 좋았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공감한다는 건 사실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각자 살 길을 도모하는 것만큼이나 죽는 것도 그렇게 외롭고 고립된 상황에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가, 이런 씁쓸함을 남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감을 했다고 보는데요. 두 번째는, 삶과 죽음이 그만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고요.
그리고 세 번째는, 삶과 죽음이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문제도 풀어보고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각자도사라고 하는 게 각자 알아서 죽을 방법을 도모하자는 게 아니라, 일종의 역설이죠. 존엄하게 죽고 싶다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먼저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 우리가 모여서 내 생의 끝자락을 상상해보는 것이 시작점이 아닐까. 그러면 삶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식의 희망을 담아봤습니다.
황정은 : 『각자도사 사회』 표지에 주사위 그림이 있어요. 왜 주사위 그림이 들어갔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송병기 : 저는 주사위가 굉장히 흥미로운 사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연을 운명으로 전환하는 사물이 아닐까. 그것을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물인 거죠. 우리가 우연의 장난이라고 말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관용어처럼 쓰는데, 우리는 주사위의 결과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잖아요. 마치 누구의 개입도 없는 공평한 것처럼. 이게 게임을 할 때는 재밌는데, 질병과 노화와 죽음은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지 않습니까. 진짜 우연의 영역일 수 있거든요. 건강하게 살던 사람도 갑자기 아플 수도 있는 거고, 노화는 계속 진행되는 거고. 그랬을 때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괜찮은 사람도 있을 거고요.
예를 들면 별로 안 아프다가 짧게 아프다가 임종을 했다, 혹은 가족이 자원이 굉장히 많아서 너무 잘 돌봐줬다, 운이 좋게 의료진을 잘 만났다, 혹은 운은 나쁘지만은 돈이 많아서 운을 돈으로 대체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이런 확률이 어느 정도 되겠는가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것을 계속 운과 우연과 운명의 문제로 가져가는 건 아닐까 싶은 거죠.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안심하고 평온하게 살다가 생의 끝자락도 맞이하고 잘 죽을 수 있는, 그런 환경과 관계가 살아있는 게 좋은 사회잖아요. 그에 대한 고민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주사위를 생각을 해봤습니다.
황정은 : 지금은 가능성이 곧 사행성이 된 사회이기도 하잖아요. 그쪽으로 논의는 있었겠죠. 선생님 같은 연구자들이라거나 여러 분야의 당사자들의 논의는 많았지만 이게 사회적으로 크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이유가 대체 뭘까요? 모두가 언젠가는 겪을 일 아닙니까.
송병기 : 제 생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요. '죽음'이라는 것이 이제 의료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인 열 명 중에 여덟 아홉 명은 병원에서 사망을 하거든요. 뒤집어 이야기하면 생의 끝자락과 죽음에 있어서 의료를 절대 간과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의료는 생애 말기와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하는가' 이 질문이 더 중요해지겠죠. 한국의 의료뿐만이 아니라 서양의료도 그럴 텐데, 한국 의료는 좀 더 심합니다. 특히, 진단과 치료를 중심으로 체계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병원의 대다수는 민간 시설이죠. 그렇기 때문에 진단과 치료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또 의료진들도 규범이 있는데, 치료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과 실천 방법 같은 것들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통용되고 있는데요. 이것이 또 실제로 수익을 창출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MRI, CT 이런 거 찍으면 비싸잖아요. 소위 말하는 돈이 되는 거거든요. 문제는 뭐냐 하면, 모든 질병을 다 치료할 수 있으면 좋겠죠. 하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고, 모든 질병에는 말기가 있거든요. 말기가 오고 생의 끝자락이 옵니다. 이건 나이에 상관이 없어요. 그랬을 때, 더 이상 치료가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 거냐. 그때는 말기 돌봄 계획을 생각을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는 사실 별 관심이 없죠. 왜냐하면 진단도 없고 치료도 없고 돈도 안 되고. 이런 돌봄 영역은 민간 병원들이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고.
황정은 : 돈이 안 되니까요.
송병기 : 네, 그게 첫 번째 이유일 것 같고요. 두 번째는, 삶에 대한 강력한 애착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데요. '열심히 해야 된다', '꼭 살아야 된다', '행복해야 된다' 이런 표현들, 물론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문화들 혹은 성과가 너무 중요하고 필요한 사회라는 말도 있지만, 뒤집어 이야기하면 다른 의미의 가치를 추구해야 되는 돌봄이나 생의 끝자락이나 죽음과는 좀 안 맞는 거죠. 이런 우리의 일상이 별로 인기 없는 이야기인 거죠.
황정은 : '여는 글'에서 삶이 불평등하기 때문에 죽음은 의료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문제에 가깝다고 쓰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럴까요?
송병기 : 결국에는 내 죽음, 내 생의 끝자락에 다양한 사람들이 관여한다는 것이죠. 내 가족과 의료진도 있지만 또 그들을 둘러싼 관계들도 있지 않습니까. 의료인들이 개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를 둘러싼 법체계도 있을 거고, 의료 보험도 있을 거고, 그 과정에 필요한 자원들도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은 사실상 개인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그 사회의 복지라든가 보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거든요. 그랬을 때 이것은 의료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이야기로 봐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우리가 내 죽음을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전환해볼 수 있는 상상력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황정은 :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라고도 쓰셨는데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 조건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송병기 : 사실 이것은 제가 질문을 던진 것이죠. 제가 '이게 존엄한 사회입니다'라고 해서 그게 정답일 리는 없고요. 결국에는 무엇이 존엄한 삶이고 죽음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과정이 오히려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면 물어봐야 되는 것이죠. '도대체 존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회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다양한 토론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헌법을 근간으로 만든 민주 공화국에 살고 있는데, 그 헌법에서 말하고 있는 존엄이 있을 겁니다. '개인 모두에게 내재된 어떤 가치로서의 존엄이 있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믿음, 상상력에 기반 한 사회인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 일상에서 존엄이 절대적 가치로 막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살기만 해서 나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에는 그 존엄과 자유, 평등이라는 것도 관계 속에서 확인되고 승인되는 것이거든요.
나의 존엄이 중요하다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타인의 존엄도 인정할 수 있을 때 그 존엄이 계속해서 확장된다고 봅니다. 확인돼야 되고요. 그런 의미에서 존엄은 과정적인 것이죠.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요. 그런 식의 토론을 우리가 좀 해보고, 그러면 사회는 또 무엇인지 묘사를 한번 해볼 수 있겠죠. 우리가 사회 안에서 다 똑바른 평평한 곳에 서 있는 건지,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냥 사회에 무조건 맞춰야 되는지, 이런 식의 다양한 질문들이 있을 수 있는데요. 다양한 시민들이 많은 시민들이 계속 (질문) 하다 보면 존엄한 사회가 무엇인지 존엄하게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윤곽이 잡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 것은 일종의 촉구인 거죠. 지금 이런 질문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모색이 필요합니다, 라는 긴급한 촉구 정도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황정은 : 지금의 말기 의료 결정은 "환자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 아니고 환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었다"라고 쓰셨는데요. 책에 실린 다른 주제인 '연명 의료'나 '콧줄'과 연결을 해서 생각해 보면 섬뜩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까지'를 먼저 셈하는 의료 과정에는 존엄한 죽음을 생각할 자리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예요. 그렇지만 선생님도 계속 말씀하셨다시피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말기 의료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까요?
송병기 : 굉장히 복잡한 주제죠. 그런데 하나씩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렇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은 치료 계획, 우리가 말하는 치료 계획에 대해서는 선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질병이 생기면 어떤 약이 좋아, 어떤 병원이 좋아, 명의, 이런 거 인터넷 검색하면 쫙 나오잖아요. 이런 치료 계획에 대해서는 굉장히 예민해요. 건강 보조 식품의 인기라든지 건강관리 이런 것들 너무나도 익숙하잖아요. 뒤집어 이야기하면 아프면 안 되는 사회인 거예요. 아프면 큰일 나는 거죠. 그것이 일종의 가치 판단일 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암 투병을 했던 분이 완치 판정을 받아서 기존의 직장으로 복귀를 해야 되는데 회사에서 계속 미룬다든지, 혹은 새로운 일을 알아보려고 하는데 투병 기간 동안 (경력에) 공백이 생긴 거죠. 그때 뭐 했냐고 물어보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채용을 꺼린다든지. 일상에서도 큰 병 걸렸다고 하면 개인의 문제로 질타하는 방식으로 (반응이) 돌아오죠. 그렇게 쫙 연결되니까 아프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거예요. 그리고 가족 안에서도, 예를 들면 50대 중년 여성이 암 투병을 한다고 상상을 해보면, 죄책감을 느끼세요. 실제로 보면 내가 집안일을 해야 되는데, 우리 애들 학교 가는 거 봐야 되는데... 기존의 성별 분업이라든가 돌봄의 불평등이 질병을 만나면서 훨씬 더 강화되거든요.
황정은 : 그렇죠.
송병기 : 그리고 또 한편 돌봄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취약한 또 다른 여성이나 또 다른 사람의 취약성이 드러나기도 하고, 그러니까 불평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황정은 : 그래서 요즘에는 질병권에 대한 이야기도 활발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은 좀 다행이기도 한 것 같고요.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이 되지는 않은 것 같아서 그렇긴 합니다만.
송병기 : 네. 그래서 이야기를 조금 마무리를 하면, 생애 말기 결정에 있어가지고 의료 결정에서 중요한 건 말기 돌봄 계획도 중요하거든요.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좀 이야기를 해야 돼요. 실제로 치료 계획만큼이나 돌봄 계획을 갖고 있어야 되는데, 처음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로만 가겠지만 필요한 부분들이 나올 겁니다. 사회가 뭘 더 지원을 해야 되고, 어떤 것이 확충되어야 되고, 무엇이 필요한 시설인지에 대해서. 이런 돌봄 계획과 실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되어야 되고, 그것이 없던 것을 새로 이야기하면 힘드니까 '호스피스'라는 제도를 일종의 좋은 모델로 삼아 가지고 논의를 좀 해볼 수도 있겠죠.
황정은 : 송병기 선생님은 죽음을 그리고 죽음 앞에 선 인간을 자주 생각을 하실 텐데요. 그런 시간들은 선생님 본인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해요.
송병기 : 저도 당연히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의 죽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이 연구에 대한 질문은 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뭔가' 이걸 계속 묻고 있는 거거든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언제나 임시적인 대답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지금 현재 단계에서의 제 죽음은, 혹은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그 질문을 하는 개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 자체가 좋은 죽음을 만들어낸다고 봐요.
왜냐하면, 오늘 이야기한 걸 요약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내가 잘 죽고 싶다고 해서 잘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거든요. 그러면 나의 고민과 생각을 누군가와 함께 나눠야 되고, 의료진과의 대화이기도 하고요. 이 고민을 하는 개인과 그를 둘러싼 또 다른 개인들이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에는 제도라든지 이런 것들이 붙을 텐데, 이것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정도에 따라서 죽음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하는 개인들이 모여 있으면 내가 죽을 때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고 죽는다, 죽고 싶다'라는 이야기가 그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지켜지고 존중될 것 같습니다.
*송병기 의료 인류학자. 파리대학교병원(AP-HP) 의료 윤리 센터와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생애 말기 돌봄을 연구했다. 프랑스와 모로코의 노인요양원, 일본의 노인요양원 · 호스피스, 한국의 대학병원·호스피스·노인요양원·노인요양병원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했다. 동료들과 함께 쓴 책으로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가 있다. 현재 죽음과 불평등의 관계를 의료, 금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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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