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통 사람들의 서사를 좋아한다. 그 안에는 가깝고도 먼 이야기들이 있고, 각자의 상황과 선택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박혜수 작가의 작업은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꿈과 사랑, 나이 듦과 죽음과 같은 삶에 대한 질문들을 하고 대답을 수집하며, 그것을 회화, 미디어, 설치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작가의 해석을 거쳐 내 눈에 들어온 작업들은 더 다양한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기도 한다.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작업적으로 풀어갈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고, 나에겐 다음 작업이 항상 기다려지는 작가 중 한 분이기도 하다. 책을 만드는 일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이렇게 평소에 관심 있게 보던 작업을 하는 작가를 저자로 만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저자와의 소통은 편집자가 하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직접 소통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디자인하는 것만으로 기대감은 충분히 차오른다. 『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은 그래서 더 흥미롭게 표지 디자인 작업을 했던 책이다.
원고를 읽으며 이전보다 박혜수 작가의 작업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의 내용 중에는 지금의 내게 특히 와닿는 작업과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이 책을 또 읽었을 때 내 경험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작업과 이야기들이 와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생각은 디자인적인 큰 방향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두고두고 소장해서 읽어보는 책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 책 표지의 디자인은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면 좋을 것 같았다. 크게 나아가고 싶은 방향을 잡았다면, 이젠 어떻게 이 책에 맞게 그 느낌을 만들어가야 할지 디테일한 부분들을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은 '상실'과 '애도'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고 담당 편집자는 표지 의뢰서에서 이야기해 주었다. 이러한 인간의 필연적인 삶의 일들을 작업에서 다루기 위해,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끊임없이 그 '흔적'을 찾아나가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 부분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려고 작가의 작업 이미지를 활용한 배치를 만들어보았다. 배치하고 보니,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물건들이 묘한 시각적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 본 이미지는 재배치되어 띠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이라는 여운 있는 제목에 화려한 이미지로 시선을 빼앗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제목만으로 생각할 여지와 여운이 많다고 생각했고, 박혜수 작가의 작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작업에 대한 이미지를 저마다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작업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여운을 가지고 있는 분위기로 다가가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것이 이 표지에서만큼은 이미지를 배제한 디자인을 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당신은 당신을 좋아하나요?"라는 독자들에게 가장 묻고 싶었던 중요한 질문을 끝으로 책을 마친다. 이 질문을 책의 하단, 띠지에 가려진 부분에 넣고, 움푹 들어가는 오목 형압으로 질문이 '흔적'을 남긴 것처럼 처리하였다. 그리고 띠지가 들떴을 때 하얗게 보이는 뒷부분이 보라색의 묵직한 분위기를 방해할 것 같아 양면인쇄로 진행하였고, 면지는 보라색과 금색을 교차시킨 패턴으로 디자인하여 표지와 전체적인 톤과 균형을 맞췄다. 이러한 과정으로 지금의 표지 디자인이 나오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제작 방식도 분위기를 더하는 데 큰 몫을 했다. 표지와 띠지를 모두 벨벳 코팅으로 하고 금박에 오목형압까지, 한 개의 특수 코팅과 두 개의 후가공이 들어갔다. 이 책에 담긴 의미와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가공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내용을 파악하는 것부터 담당 편집자와 어떤 방향으로 갈지 합의를 만들고, 누구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어떤 느낌으로 다가가야 하는 지까지 모든 것을 고려해서 이미지와 실물로 실현시키는 과정 자체가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이라는 책의 표지를 디자인하면서, 이 모든 과정이 흥미로운 경험으로 남았기에 칼럼에서 꼭 얘기해 보고 싶었던 책이었다. 담당 편집자와의 소통도 작업을 흥미롭게 느끼게 하는 데에 큰 몫을 차지했다. 이렇게 나온 책의 디자인을 박혜수 작가도 좋아해 주셔서 매우 뿌듯했던 기억이다.
여섯 번의 칼럼을 쓰며 돌이켜보니, 내가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만들었던 책 뒤에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서로에 대한 존중과 지지의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을 해오면서 지금까지 내가 봐 온 북디자이너들은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마음과, 디자인적으로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을 성실함과 노력으로, 그리고 결과로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나도 이런 사람들 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칼럼의 마지막에는 나와 함께 일해 온, 그리고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계속되는 마감에 맞춰 살다 보니 내 삶이 너무 단조롭게 느껴지고 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는데, 글쓰기라는 낯선 기회를 통해 내 시간도 잘 흐르고 있었음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해주신 <채널예스> 편집부와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마지막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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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해
북 디자이너. 돌베개 출판사에서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