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 작가
‘배명훈 SF’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정소연 소설가),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SF평론가 심완선), 2020년대 한국 SF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인 작가 배명훈이 국내 최초로 화성 이주를 주제로 삼은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를 출간했다. 깻잎 대신 셀러리를 들여온다던 온실 책임자를 우발적으로 살인한 사건, 지구-화성 간 통신 시차로 어려움에 빠지는 원거리 연애, 어느 날 대책 없이 빠져들게 된 간장게장을 향한 향수 등 배명훈 특유의 지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설정들이 돋보이는 이야기들이 담겼다.
작가님은 이제까지 인류가 진출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을 소설로 보여주셨어요. 가깝게는 달이나 화성도 있었고, 더 멀리서 움직이는 스페이스 콜로니 우주선도 있었고요. 그중에서도 화성은 인류가 정착하기에 어떤 장점이 있는 행성인가요?
우선 하루의 길이가 지구와 비슷하고, 자전축이 기울어진 정도도 지구와 비슷합니다. 소설에서는 하루의 길이가 조금 다르다는 점을 부각했지만, 사실 그정도면 대단히 비슷한 거예요. 자전축이 지구와 비슷하게 기울어 있는 행성에서는 계절이 변하는 원리도 지구와 비슷하겠죠? 인간이 적응하기에 꽤 괜찮다는 말이에요. 또 화성은 과거에 두꺼운 대기가 있고 물이 흘렀던 적이 있어요.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한때 그 일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소위 테라포밍이라고 하는, 다른 행성의 환경을 지구처럼 바꾸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니까요. 달은 중력이 너무 작아서 대기를 유지하지 못해요. 이런 데서는 테라포밍이 불가능하죠. 아직은 화성도 생명체가 살기에 매우 부적합한 곳이지만, 영원히 불가능한 곳은 아니라는 게 이 행성의 장점이에요. 새 문명이 들어설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화성 이주 초창기에는 박사가 세 개는 되었다는 언급이 여섯 작품 전반에서 등장하더라고요. 박사학위 중에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가진 학위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초기에는 화성 탐사가 중요할 테니, 광물학이나 지질학, 기상학 같은 행성과학 관련 학위가 많겠죠. 생물학도 마찬가지고요. 또 크게 보면 공학으로 묶일 수 있는 광범위한 분야가 있겠고, 생존과 정착을 위해 농업이 주목받을 거예요. 우주선마다 의사가 하나씩만 포함되어 있어도 전체 인구 대비 의사 비중이 아주아주 높을 거고요, 이 사람들이 다 수학을 잘하는 부류겠죠.
그런데 저희 같은 ‘문과’에게도 희망이 있을까요? 「붉은 행성의 방식」의 희나는 정치인이고 지요는 문헌정보학자잖아요. 그렇지만 화성에 인간을 보내는 비용에 비해 실용적이지 않은 구성원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요?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이 좋은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정해진 목적을 해결하는 데 특화된 기술이 있는 사람이나 그런 일을 하는 시간은, 그 일이 해결되고 난 다음 시간보다 우월할 수 없다고. 더 완전한 시간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보다 목적이 달성되고 난 시간이잖아요. 화성에서 살아남는 기술이 없는 인간이 화성으로 넘어가는 시기란, 생존 문제가 해결된 시간일 거예요. 쓸모없는 인간은 그때서야 화성에 나타나서 어슬렁거릴 텐데, 역설적이게도 문명이 완성되는 건 이때부터예요. 소위 ‘문과’도 사실 아주 쓸모가 많고, 진짜 쓸모가 없는 건 소설가 같은 건데, 그래서 소설가나 다른 예술가들이 화성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누가 봐도 문명이 완성됐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필요가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헷갈리는 말이겠지만, 예술이 원래 좀 그래요.
만약 작가님이 화성으로 이주하시기로 한다면, 그런데 개인 짐은 딱 기내용 캐리어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시겠어요?
이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에요. 저는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것과 짐 싸는 게 싫어서 외국 여행이 부담스러워요. 짐을 잘 싸려면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시뮬레이션을 잘해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들어요.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되면 신발을 하나 더 챙겨야 하고, 현지 기온에 따라 두꺼운 옷을 가져가야 할 수도 있어요. 또 근사한 식당에 갈 예정이면 점잖은 옷도 넣어야겠죠. 화성 이주도 마찬가지일 텐데, 아마 고민을 줄이기 위해 『화성 이주자를 위한 짐 싸기 가이드』 같은 걸 찾아보고 그대로 할 것 같아요. 그런 다음 무언가 귀여운 것을 잔뜩 챙겨가겠죠.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저는 귀여운 것을 사 모으는 운명이거든요. 화성에는 아직 귀여운 물건들이 충분하지 않을 거여서, 지구의 귀여운 것들을 챙겨가야 할 거예요.
작품 집필 전 미팅했을 때 몇 가지 아이디어를 말씀해주셨는데요, 산수화 속 작은 사람의 모습처럼 광활한 화성의 스케일과 그 안에서의 인간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익숙한 국가라는 틀을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 건설 가능성과 의의를 제시한다, 등등이 기억나요. 신선한 충격이기도 하고 사실 좀 아리송하기도 했거든요. 저는 이제 원고를 읽고 나니까 확 이해되어서 좋더라고요. 다 쓰시고 나서 되돌아보니 특별히 만족스럽거나 조금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어요?
“화성과 나”라는 제목이 딱 이 구도를 보여줘요. 나와 우주 사이에는 집, 동네, 도시, 지역, 국가, 지구, 우주, 이런 수많은 공간의 층위가 있어요. 저걸 다 지나야 내가 우주 층위에 있는 화성에 닿게 되는 거죠. 중간에 있는 걸 다 생략하고 나와 행성을 나란히 놓은 게 저 제목이었어요. 아주 큰 공간과 아주 작은 일상 공간을 한 화면에 담은 구상이죠. 저는 SF 작가 중에서도 세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요즘은 소설에서 세계와 인물이 얽히는 구조를 꽤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요.
저는 기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국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그 국가들의 관계인 국제정치 때문에요. 우리는 근대라고 하는 시대를 지나온 시기에 살고 있는데, 근대의 궁극적인 주어는 ‘국가’였어요. 지금도 우주 관련 컨퍼런스 같은 데서 자주 듣는 말인데요, 어떤 연사가 “우리가 달에 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질 때 이 문장에 등장하는 ‘우리’란 국가를 지칭해요. 월드컵 축구 경기나 올림픽 중계방송에서처럼요. 그런데 이 ‘국가’는 행성에 관심이 없어요. 우주에 대해서도 사실 별로 흥미가 없어 보여요. 왜냐하면 인간이 우주에 도달하기 전, 근대에 만들어진 국가니까요. 그래서 우주쓰레기 문제 같은 행성 차원의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정말 없고요, 마찬가지 이유로 행성 전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기후 변화도 해결이 안 돼요.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건 새로운 공동체 건설 이야기가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국가 없이’ 행성 규모의 공동체를 꾸려가는 방법에 관한 상상이에요. 존 레논의 노래 가사 같은 거죠.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저는 쓰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담아냈다고 생각하는데, 늘 어려운 부분은 독자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예요. 그래서 편집자와 상의해서 난이도를 조절하는 작업이 제게 중요해요. 모두에게 통하는 난이도 같은 건 없기 때문에 포괄하지 못하는 독자가 반드시 생기니까요. 그러면서도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아야 하고요. 이런 걸 다 고려해서, 가능한 여러 배합 중 하나를 적절히 선택한 게 아닐까요?
이번에 쓰려고 했다가 못 쓰신 에피소드나 소재도 있어요? 혹시 차기작으로 생각하는 게 있으신가 해서요.
차기작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데, 안 쓴 건 몇 개 있어요. 공부하다가 재미있는 구상을 본 적 있거든요. 화성은 지구의 밴앨런대처럼 방사선을 막아주는 전자기장이 없어서 사람 몸에 해로운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대한 전자기장을 생성하는 방사선 방패를 라그랑주 포인트에 띄워놓자는 구상이었어요. 각주가 잔뜩 달린 짧은 학술논문이었는데 말이죠. 또 화성 지상에 세워진 우주공항 안에 있는 식당 혹은 매점 이야기도 구상했는데 쓰지는 않았어요. 그런 게 몇 개 있어요. 하지만 결국 안 쓴 데는 이유가 있었겠죠. 지금은 까먹었지만.
‘작가의 말’에서 미래의 화성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보고 좀 짜릿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쓸 때 어떤 기분이셨어요? 나중에 이 소설집을 화성인들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으세요? 나중에 화성에서 고등학교 교과서로 채택되면 진짜 감동일 것 같아요.
SF가 미래를 예측하는 장르는 아니고, 제 소설도 마찬가지인데요, 그 작가의 말을 보게 될 화성인은 아마 더 먼 미래의 사람일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엉터리라고 생각할 부분도 많겠죠. 그건 지구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이에요. SF의 예언이란 백 개쯤 던져서 두세 개쯤 맞히는 방식이거든요. 중요한 건 예언이 아닌 다른 것들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작가가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하는 것들이죠.
SF 작가는 단순히 미래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좀 더 큰 단위의 시간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100년 뒤를 이야기하려면 100년 전부터 100년 뒤까지, 나무의 수명 같은 규모의 시간을 다루어야 하는데, 저는 그 시간을 버텨내지 못하지만 제 책은, 제 책 중 몇 권은 그때까지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작가는 다 그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지만요.
물론 더 가까운 시기에 지구의 교과서에 실려도 저는 진심으로 감동할 게 분명하니까, 일단 어디에라도 실리면 좋겠습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