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성의 날] 을유세계문학전집 ‘여성과 문학’ 리커버 에디션 - 김경민 편집자
‘여성과 문학’ 선집에는 제인 에어처럼 자신이 나아갈 길을 만들어 가는 인물도 있고, 타인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도 있습니다. 훗날 제가 나락에 떨어진다면 그 주인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글ㆍ사진 김윤주
202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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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여성의 날 특집 기획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욕망을 숨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여성들은 선입견을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소설, 영화, 과학,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형성을 부수고 다채로운 욕망을 보여주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을유세계문학전집이 ‘여성과 문학’을 테마로 리커버 에디션을 출간했다.자신의 운명을 헤쳐나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빛내기 위해, 책의 표지, 만듦새부터 역자의 검수와 섬세한 교정과 윤문까지 공을 들였다. 이번 리커버 에디션에는 아티스트 홍지희 작가가 참여해 책의 소장가치를 더욱 높였다. 깨진 유리와 한지가 만들어내는 은은한 반짝임이 고전의 감동을 현재의 독자에게 전한다. 리커버 기획부터 기념 전시까지 여성의 날 출간을 위해 숨가쁘게 달려온 김경민 을유문화사 편집자를 서면으로 만났다.



을유세계문학전집 ‘여성과 문학’ 리커버 에디션 출간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간 저희는 여성 작가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비롯해 논마마(non-mother) 같은 여성과 사회를 다룬 이야기나 『제2의 성』,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 등을 출간하며 꾸준히 여성과 여성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왔는데요, 그런 관심이 자연스럽게 여성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저자인 이번 리커버 에디션으로 이어진 듯합니다.

‘여성과 문학’이라는 키워드로 5권을 어떻게 선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여성과 문학’ 고전을 다시 모아서 살펴보는 일은 어떤 과정이었나요?

다섯 권 선정에는 저희 대표님 의견이 많이 반영됐는데요, 여성 작가가 쓴 작품 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과 어려움 속에서도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담겨 있는 작품을 선정했습니다. 장편소설과 중단편소설, 자전적인 소설, 시 선집까지 고르게 선정됐고요.

이 리커버 에디션을 맡게 됐을 때,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모은 이 선집을 어떻게 보여 주면 좋을지 고민이 됐습니다. 표지가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중요한 요소겠지만, 그와 더불어 뒤표지에 그 작품을 잘 보여 주는 대사나 문구를 간결하게 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것을 배제하고 문구 하나만 넣는 거니까 신중하게 골라야 했고, 그렇게 다섯 작품을 천천히 읽게 됐습니다. 근데 그런 의도를 가지고 봐서 그런지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소설 속 인물들이 더 또렷하게 보이고, 문장들이 허투루 지나가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희 전집이 지향해 온 ‘해당 작품이나 작가를 연구한 전문가의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만든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어렸을 때 읽은 번역본보다 인물의 개성이 더 잘 보이기도 했고, 역자 선생님께 일부 문장을 문의 드리기 전에 다른 번역본에서는 어떻게 번역됐는지 비교를 좀 해 봤는데, 저희 번역본이 원전의 의미를 제대로 담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다섯 권에 담겨 있는 작품들을 제대로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티스트 홍지희 작가가 문학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형상화한 표지 이미지가 인상적입니다. 디자인 과정에서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나요?

홍지희 화가님이 표지 이미지 작업을 해 주시기로 한 뒤, 우선 책을 보내드리고 읽을 시간을 충분히 드렸습니다. 그리고 디자인팀과 함께 미팅해서 화가님이 작업해 온 여러 스타일 중 세 가지를 추려서 제안했고, 그 스타일들로 만든 시안을 받기로 했습니다. 화가님이 샘플로 보내 주신 세 가지 시안 외에 이런 스타일도 있다며 같이 보내 주신 샘플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지와 유리로 만든 샘플이 ‘여성과 문학’ 리커버 에디션과 잘 어울린다고 느껴져 고르게 됐습니다. 추후 완성된 이미지를 봤을 때 깨진 유리의 반짝임과 한지 단(段)이 만들어 낸 그림자가 인생의 빛과 그늘을 표현한 듯한 느낌을 줘서 만족스러웠습니다.

흔히 고전 하면 묵직한 제본을 떠올리는데, 누드 사철제본을 택한 점도 독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기획되었나요? 

‘을유세계문학전집’이 양장본이라 이 선집은 기존과 다르게 무선제본(종이에 접착제를 발라 만드는 방식)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디자인팀에서 만든 시안 중 누드 사철제본에 띠지를 커버처럼 싼 시안이 이 리커버 에디션에 가장 잘 어울렸습니다. 『제인 에어』처럼 7백 쪽이 넘는 작품도 포함돼 있어서 무선제본으로 만들면 독자분들이 읽으실 때 불편할 것 같기도 했고요. 책등의 ‘흰 종이와 실’의 느낌이 한지로 만든 표지 이미지와도 잘 맞아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양장제본만큼 제작비가 많이 들지만, 돈 들인 티는 별로 안 난다는 게 아쉽지만요.



‘여성의날’을 목표로 책을 출간하기 위해 달려오셨는데, 출간일을 맞추기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나요?

준비를 꽤 오래전부터 하고 있던 터라 교정(뒤표지에 넣을 문구를 찾으면서 교정도 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문장은 역자 선생님께 문의해서 수정하는 과정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이나 표지 작업은 여유 있게 진행했습니다. 홍지희 화가님이 다섯 권의 책을 읽고 받은 영감을 작품별로 이미지화하는 데 고생하시긴 했지만요.

책 출간 외에 세계 여성의 날에 맞춰 특별히 준비한 게 있는데요. 작품별로 형상화한 미술 작품으로 표지를 만든 만큼, 원화 전시와 그 전시장에서 진행하는 아티스트 토크와 북토크예요. 저희 마케터분들이 준비하는 데 많이 애써 주셨습니다. 전시장은 서촌에 있는 ‘어피스어피스’인데요. 3월 7일부터 17일까지 전시하니까 원화가 궁금한 분들은 한번 들러 주시면 좋을 듯합니다.

‘여성의날’에 출간될 이 책들이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나요?

‘여성과 문학’ 선집에는 제인 에어처럼 자신이 나아갈 길을 만들어 가는 인물도 있고, 타인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도 있습니다. 진취적인 주인공도 물론 멋졌지만, 제 눈에는 떨어진 나락에서 쓰러져 있지 않고 일어나 걸어가는 주인공도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아니까요. 그 주인공이 그대로 주저앉지 말길 응원하면서 읽었는데요, 응원했던 기억과 주인공이 일어나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것들 때문에 훗날 제가 나락에 떨어진다면 그 주인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락의 크고 작음은 다르겠지만, 털썩 주저앉아 있다가 이제 일어나서 한 발 내디뎌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나 계기가 있잖아요. 문학 작품의 한 구절이나 인물이 그런 ‘순간이나 계기’가 된다는 건 멋지고 고마운 일 같습니다. 물론 쓰러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쓰러져도 일어나면 된다는 걸 아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좋은 거니까요. 살기 참 팍팍한 세상인데요. 다섯 권의 책 속에서 어떤 인물이나 문장이 독자 여러분께 작은 위안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를 준다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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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주

좋은 책, 좋은 사람과 만날 때 가장 즐겁습니다. diotima1016@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