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승 칼럼] 미치고 펄쩍 뛰기의 언어로 쓸 수 있을까?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무엇은 대개 오랜 분노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곧잘 슬픔이나 무기력으로 위장하는 그것. 무식하고 교양 없고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너무 시끄럽고 과장할까봐 쓸 수 없는 그것.
글ㆍ사진 김지승
2024.05.07
작게
크게



분노는 너무 참한 말이다. 80대 여성노인이 햇무 한쪽과 함께 콕 집어 알려준 바로는 그렇다. 그만큼 살아도 자기만 학교에 보내지 않은 엄마 이야기를 할 때는 눈꼬리가 새초롬해진다. 나만 새 신발을 사주지 않았고, 나만 친척 집에 보냈고, 나만 때렸고, 내 결혼만 전혀 도와주지 않았고, 나만 사랑하지 않았어… 7, 80대 여성노인 다섯이 낯가림 위장술을 해제하고 쏟아내는 말 아래로 꼭 쥔 주먹들이 보였다. 그렇게 부르르, 분노에 떨었어요?

분노? 그거는 너무 참한 말이고.

미치고 펄쩍 뛸 지경인 거지.

그때는 똥물이라도 퍼다 남자들 밥상에 촥 뿌리고 싶더라만.

아이고, 똥물은 너무했다!

이 형님이 왜 잘 나가다 고상을 떨어?

똥 얘기는 80대도 웃길 수 있다. 쥐었던 손을 활짝 펴서 옆 노인의 어깨를 치며 와하하, 웃는 그들 맞은편에 “분노, 그거는 참한 말이고”에 충격을 받은 20대의 내가 있었다. 방언의 리듬까지 타니 “미치고 펄쩍 뛸 지경”에 비해 분노는 의심스럽게 묵묵했다. 앞의 것이 감정이라면, 뒤의 것은 그 위에 놓인 누름돌 같았다. 골똘하자니 노인이 햇무 한쪽을 내밀며 달다, 했다. 얼결에 입으로 받았다. 좀전까지 똥 얘기를 하지 않으셨던가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분노나 분뇨糞尿나. 그런 답을 들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자리였다.


며칠 후 녹취를 풀다가 10년 동안 모은 돈을 고스란히 도둑맞았다는 사연의 목소리가 실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동의 없이 몰래 가져갔으니 도둑질이 맞았다. 엄마가 작전을 짰고 아버지가 실행했으며 오빠는 당연한 듯 자기 결혼 비용으로 썼다. 마당을 뚫을 것처럼 발을 구르고, 동네 떠나가라 울고, 머리를 쥐어뜯고, 나중에는 드러누워 사지를 뒤틀며 아는 욕 모르는 욕을 곡소리에 섞어 하다가(한 노인이 끼어들었다. 미친년처럼? 응, 꼭 미친년처럼!) 결국 아버지와 오빠에게 두들겨 맞고 눈물, 콧물, 코피, 땀, 오줌이 뒤섞인(다시 끼어들었다. 더러운 미친년처럼? 그래, 더러운 미친년처럼!) 몸으로 집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 다른 가족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나중에 여동생이 그랬다. 아빠가 잘못한 건 알겠는데 언니가 계속 소리를 지르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감정적이었잖아. “도둑맞은 더러운 미친년”이었던 노인이 50년이 지나 대꾸했다. 오죽하면 그랬을라고? 녹취 파일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죽하면. 반대편에는 늘 “아무리 그래도”가 있었다.


여성에게 글을 쓰는 일은 오죽하면과 아무리 그래도 사이 어딘가에서 주춤거리는 언어와 합류하는 일이다. 글로 쓸 수 없는 무언가 앞에서 잠시 멈춤,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터뜨리기, 거의 삶 같은 죽음에 전율하기다.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무엇은 대개 오랜 분노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곧잘 슬픔이나 무기력으로 위장하는 그것. 무식하고 교양 없고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너무 시끄럽고 과장할까봐 쓸 수 없는 그것. 분노, 라고 쓰는 순간 미치고 “펄쩍”이, 똥물을 “촥”이 사라져버린다. 나비 표본 한 가운데의 시침핀 같은 언어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때로 어눌하고, 심지어 횡설수설하며, 기억을 더듬더듬 좇다가 자주 뭉개지는 언어.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거의 없는 언어(a little language)’라면 가능할까? 그러나 여성 안의 분노보다 여성을 향한 분노와 더 친밀한 우리가 “아무리 그래도” 앞에서 숨과 말을 고르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낸시 밀러의 말처럼 미치고 펄쩍 뛰기의 언어를 구하는 것이 “다시 한 번 원죄를 저지르고, 다시 한 번 남성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임을 안다고 해도 아니,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새벽 2시, 어둠과 적막이 서로를 끌어안고 누웠다가 화들짝 깨어난다. 창 밖 한 여자의 발과 말이 어둠을 고통스럽게 찌른다. 적어도 나는 내 감정을 알아. 소리 지를 만 하니까 지르는 거라고! 이후로는 뜻 모를 음절들이 반복된다. 펄쩍, 촥, 펄쩍, 촥… 일순, 억눌렸던 목소리가 반동적으로 솟구친다. 내 돈 내놔! “도둑맞은 더러운 미친년”은 도처에 있다. 내 방에도 있다. 나도 내 감정은 안다. 그건 말로 다 못해. 노인이 말로 다 못한다고 굳이 말한 것처럼 어떤 것은 쓸 수 없다고 기어이 쓰면서 오죽하면 쪽에 선다. 평균과 균형과 형벌의 세계에서 길을 잃은, 거듭 미치고 펄쩍 뛰는 한 여자 곁에서 촥.


덧. 오래전 이루어진 여성노인들과의 인터뷰 주제는 ‘복수’였다. 원고는 ‘황혼은 너그럽게!’라는 제목으로 빨갛게 수정되어 돌아왔다. 맞다. 때로 분노는 너무 참한 말이다.



0의 댓글
Writer Avatar

김지승

읽고 쓰고 연결한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