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어서) 두 번째 길은 매력에 대한 탐구로서 읽는 방법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에세이 선집 『타오르는 질문들』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의상을 뺀 헨리 제임스, 특히 연보라색 장갑의 여성들이 없는 헨리 제임스는 상상할 수 없다.”(409쪽) 확실히 여성 캐릭터들의 패션에 대한 헨리 제임스의 관심은 유별나서, 『보스턴 사람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말하면서 그녀는 버리나에게 소파를 권해 자기 옆에 앉히고는 바라보았다. 자신을 두루 살피는 듯한 그 시선에 소녀는 금장 단추가 달린 재킷을 입고 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 요란하고 상스러운 옷을 입은 눈에 띄는 그 외모를 보면 줄타기 곡예사나 점쟁이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 점이 올리브에게는 소녀를 이른바 ‘민중’의 일원으로 생각하게 하는 어마어마한 장점으로 작용했다.”(124~125쪽) 이렇듯 제임스의 소설에 있어 캐릭터의 패션은 그 캐릭터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걸 넘어 그 캐릭터를 규정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자체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니 약간 달리 써보자면, 헨리 제임스에게 있어 패션이란 매력을 발동하는 기호로서, 인간을 앞서며 나아가 ‘인간적인 것’을 무효화하는 객체이다.
이에 대해선 이희우가 「매력의 두 문제」라는 글에서 잘 정리했으니 그의 말을 잠시 빌려보자. 그에 따르면 “배움은 필연적으로 ―숭고가 아니라― 매력과 관계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 (들뢰즈적 의미에서) 매력이란 내면이나 영혼 따위의 ‘인간적인 것’을 뛰어넘어 “한 인물을 비인격적인 조합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 조합을 이루는 “어떤 기호가 우리를 감각적으로, 심지어 폭력적으로 휘어잡”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패션은 매력을 발동하는 기호가 된다. 즉 (패션을 매개로 한) 매력이 어떻게 작동하며 어떻게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양면적인 효과를 생산하곤 하는지에 대해 헨리 제임스는 아주 예민한 소설가였던 것이다. (그가 19세기 ‘서양인’이란 사실은 이 점에서도 중요해진다) 그런 만큼, 캐릭터들이 어떻게 버리나에게 반응하며 그를 자원 삼고 또 그로부터 매력을 채굴하고자 하는 지에 주목하며 『보스턴 사람들』을 한 번 쭉 읽어 보기를 당신께 권한다. 가령 다음의 구절은 어떤가?
“그는 그들이 너무 우물쭈물하고 있다고 느꼈다. 어서 맨 앞줄에 앉은 버리나를 보고 싶었다. 그녀의 이름이 특대 전단에 찍히고, 그녀의 초상이 상점 창문에 붙는 걸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그건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녀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고, 오늘날에는 그러한 매력이 새로운 사상과 결부되는 게 꼭 필요하다. 그런 매력이 없어서 고사해버리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198쪽)
세 번째 길은 소설에 대한 자의식적인 도전으로 읽는 방법이다. 퍽 알려져 있듯 제임스는 자신의 소설론을 담은 산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곤 했으며, 최근 영미권의 헨리 제임스 연구에선 소설만큼이나 이 산문들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앞서 말했듯 헨리 제임스의 시대에 소설은 “가장 세속적인 문학 장르”로서 예술 아닌 예술이요 비천한 장르로서 주로 받아들여졌다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세속적인 문제들을 제재로 삼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접한 언어적 양식(시, 일기, 편지, 신문기사, 사전 등)을 흡수하거나 교란시킬 수 있는 잡종적 문학 장르로서 소설. 이런 국면 속에서 제임스는 소설이 가장 진지한 예술이라고 단호히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스스로 『한 여인의 초상』에 대해 말했듯 “본질적으로 […] 무언가에 대한 소동”(『아주 가느다란 명주실로 짜낸』, 160쪽)이길 충실히 감내할 때에만 가능한 명제인 것이다.
예컨대 『보스턴 사람들』에서 2부가 시작하고 나서 한참 동안 캐릭터들의 대사는 주어지지 않으며, 그 한참을 채우는 건 정체불명의 화자인 ‘나’의 도시 에세이적인 상황 설명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화자는 어디의 누구인 걸까, 누구 길래 이야기꾼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고 수다스럽게 자기 인상을 종종 풀어놓는 걸까? 이야기 속의 존재이자 이야기 밖의 존재라는 화자의 역설을 과도하게 전면화하며, 헨리 제임스는 이 장대한 소설을 꽉 짜인 내러티브의 허구적 이야기인 동시에 19세기 말 보스턴에서의 삶에 관한 인상학적 에세이로 만든다. 즉 여기서 헨리 제임스가 목표로 삼은 것은, 본질적으로 언어적 양식들의 소동인 소설을 더더욱 소동답게 뒤섞고 재구축하는 작품이었던 게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소설에서 사진이나 신문을 끌어들이는 방식들 역시 신중하게 읽을 필요가 생긴다) 그렇다면 헨리 제임스는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셀 프루스트 같은 후대의 모더니스트 소설가들과 조금 달리, 종래의 개념으로서 소설이 지탱될 수 있는 한계 수준을 자신의 목표로 삼은 야심가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네 번째 길은 선구적인 퀴어적 담화로서 읽는 방법이다. 저명한 퀴어 이론가인 이브 세지윅은 제임스를 퀴어 벽장(Queer Closet)의 문학적 판본을 제시한 대표주자로 거론한 바 있다. 작중 제대로 거론되거나 설명되지 않는 장면 및 개념이 종종 캐릭터의 극히 사적이고 친밀한(intimate) 영역에 대한 것임을 지적하며, 이를 범죄적/반사회적 대상으로서 퀴어를 취급하는 ‘정상성’의 언어에 대한 저항의 제스쳐로 해석한 것이다. 『보스턴 사람들』에서는 1부와 2부 사이, 즉 올리브와 버리나의 유럽에서의 여정이 작품 안에서 통째로 생략되는 것이나, 종종 버리나에 대한 올리브의 심리가 그 과잉행동에 비해 다소 얌전하게 묘사되는 순간들에 주목해 보면 좋을 터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다고 말하거나, 말과 행위의 간극을 벌리는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을 드러내는 효예(驍銳)한 우회. 말하자면 적극적인 실어증으로서 소설이라고 할까?
한편 퀴어한 신체의 역량을 뒤쫓는 소설로 『보스턴 사람들』을 읽는 방식 역시 퍽 설득력을 갖는다. 가령 여성 캐릭터들의 동선과 몸짓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유동화되는 데에 주목하여, 권력 속에 있는 몸이 늘 권력을 순순히 따르지만은 않음을 이 작품이 신중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푸코적 독해말이다. 물론 여러 아이러니와 거리 두기를 함께 묶는 『보스턴 사람들』에 있어 이 길은 대부분 간접적으로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발을 내딛기 다소 우려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대목을 읽으면 그런 우려도 금방 사라지지 않을까?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시가에 불을 붙이면서 그녀를 두고 웃을 테지. 아니, 나중에도 수일간 그들의 대화에는 ‘여권 운동하는 소녀’가 한 말이 양념 삼아 인용될 테지. 남자들이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비위를 상하게 하는지 놀라울 정도다.”(190쪽)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논의는 국내 여성적·퀴어적 영문학 독해의 권위자인 윤조원 교수나, 이 소설에 해설을 쓰기도 한 조선정 교수의 논문들을 찾아 읽어 보기를 권한다)
… 물론 이 외에도 헨리 제임스에게 향하는 길은 여럿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번역도 담론도 우리에겐 아직 턱없이 부족하며, 부족한 하급 사도인 나는 이 네 가지의 길을 당신께 잠시 보여드린 것에 적당히 만족할 수밖에 없을 성싶다. 아쉽다고 말하는 것 마저도 아쉽지만, 당신께서 여기 소개한 길들을 잘 쫓아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혹은, 이와는 전혀 다른 길들을 발견할 수 있길 내심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을 쓰는 동안 (지난번에 출간 예고를 했던) 단편선 『밀림의 야수』가 출간되었다는데, 『보스턴 사람들』의 옆에 이 책을 두고 천천히 함께 읽어보는 건 어떨까? 이런 ‘병렬 독서’가 오히려 또 다른 길을 열어줄지 누가 알겠는가.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