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파라파냐무냐무』에서 ‘이파라파냐무냐무’를 외치며 평화로운 ‘마시멜롱’들이 사는 숲을 대혼란에 빠지게 했던 ‘털숭숭이’는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털숭숭이에게도 고향이 있을까? 4년만에 털숭숭이의 또 다른 이야기로 돌아온 이지은 작가의 『츠츠츠츠』는 마시멜롱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먼 바다로 떠나는 털숭숭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환상적인 바닷속 풍경을 지나고, 드넓은 바다를 표표히 건너 도착한 곳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색으로 뒤덮인 어느 섬. 털숭숭이의 입 속에서 졸다 깬 마시멜롱 넷은 갑작스레 마주한 낯선 섬에서 낯선 생명체를 발견한다. 하지만 쓰러져버린 털숭숭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마시멜롱은 섬의 위협으로부터 털숭숭이를 지키려 고군분투 하는데...
언제나 자신의 그림책이 “장난감 같은 책”이기를 바란다는 이지은 작가는 『츠츠츠츠』를 통해 다시 한번 특유의 유쾌함과 따뜻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자신 안에 자리한 편견을 깨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이지은 작가의 렌즈를 통해 『츠츠츠츠』를 따라가다 보면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가 주는 놀라운 해방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마저도 편견이었다는 깨달음
『츠츠츠츠』 출간을 앞두고 인스타그램에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은 틀렸다”는 글을 남기셨더라고요. 이번 작품을 내는 작가님의 마음이 담긴 말씀 같았어요.
제 작업 방식이 언제나 그런 것 같은데요. 뭔가를 하다가 방향을 잘 틀곤 해요. 『이파라파냐무냐무』가 나온 지 4년이 지났잖아요. 연결된 이야기로, 그동안 진행하던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약간 무난하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작업할 때 가장 좋아하는 상태가 ‘아하’ 모먼트가 크게 올 때거든요. 아하, 하고 딱 터져주는 전개를 가지는 서사가 있잖아요. 하지만 원한다고 쉽게 가질 수 없죠. 그러니까 진행하던 이야기가 밀도가 낮은 이야기라기보다는, 아하 모먼트가 없는 상태의 이야기였던 거죠.
그러다 우연히 짧은 영상 하나를 보고 그 모먼트가 생겼어요. 바로 출판사에 연락을 드렸죠. 제가 원하던 에너지가 생겼다, 하면서 떠오른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더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츠츠츠츠』 이야기가 됐어요. 사실 『이파라파냐무냐무』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계속 만드는 중이었어요. 이들이 어떤 곳에서 사는지, 생태는 어떤지, 인구가 어떤 식으로 조절이 되는지 등을 설정하고 있었는데요. 그마저도 편견이었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요. 틀을 깨겠다고 이것저것 구상하고 있었지만 내 안의 캐릭터들도 정형화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가족 관계라든지, 구성원을 완전히 바꾸고, 새로운 섬을 지도 안에 만들면서 이야기를 풀었어요. 이런 과정 때문에 그 문장이 나온 것 같아요. 그것은 어쩌면 저 자신에게 하는 얘기일 수 있어요.
어떤 영상을 보셨던 거예요?
기억의 왜곡이 있을 수 있지만, 떠올려보면요. 어느 싱글맘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어요. 아이가 TV를 보는데요. 거기서 ‘엄마는 아이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 신이 만들었다’는 내용 같은 게 나온 거죠. 아이가 5-6살 정도 된 것 같은데, TV에서 흘러나온 그 말이 엄마에 대한 애정을 더 크게 했나 봐요. 그래서 아이가 엄마한테 “엄마의 엄마는 어땠어?”라고 물어요. 그 순간 엄마가 너무 당황하면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을 하고는 “엄마는 엄마가 없어.”라고 대답하거든요. 그 말이 아이에게 어떤 형태로든 혼란을 줄 것 같아 난감해하는 얼굴로요. 엄마가 우왕좌왕 하니까 아이가 “그래서 내가 엄마를 사랑하려고 태어났나봐.”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털숭숭이’랑 ‘마시멜롱’이 다 자기의 엄마, 아빠와 군을 형성해서 살 거라고만 생각하고 세계관을 만들었거든요.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에 편견 갖지 말라고 말해왔으면서 말이에요. 그러면서 털숭숭이가 누구에게 사랑을 받아서 이렇게 커졌을까, 하는 부분이 그 자리에서 샘솟듯이 떠올랐어요.
그 뒤로는 작업이 잘 진행되었나요?
꽤 빠르게 진행됐어요. 이야기는 거의 하루 만에 나왔고요. 본 작업은 약 8-9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그 영상으로부터, 서로 다른 존재가 상상 이상으로 친밀한 관계일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발전하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이 있으셨던 건지 궁금해요.
제가 경험한 신비로운 일이 있어요. 개와 함께 사는데요. 개와 진짜 말이 통한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저희 강아지가 겁이 너무 많아요. 코로나 시기에 온 식구가 붙어있었잖아요. 그러다 가족들이 외출을 하려니까 문 앞에 앉아서 침을 흘리고요. 잠깐이라도 나가려고 하면 그 큰 덩치로 자기도 제발 데려가라고 구석에 머리를 붙이고 그러는 거예요. 대형견 계의 간달프 같은 분이 계신데요. 제 고민을 말씀드리니까 강아지한테 말을 해주고 나가라고 하셨어요. 그냥 “다녀올게, 기다려”가 아니라 무슨 이유로 외출을 하는지 가만히 앉아서 말해주고 가라고요. 만약 사람이었다면, 불안해하는 아이 곁에서 왜 외출하는지 얘기했겠죠. 그걸 똑같이 강아지한테 하라는 거였어요.
그 말을 듣고 진짜로 우리가 나가는 이유와, 너를 혼자 두려고 한 게 아니니까 기다려달라는 얘기를 사람한테 얘기하듯 했는데요. 그 다음부터 강아지가 정말로 안 따라 나왔어요. 마법처럼 말이에요. 물론 정서적인 문제 외에 행동 교정이 필요하다면 또 다른 문제일 텐데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츠츠츠츠』를 작업할 때 너무 수월했어요.
놀라운 이야기네요.
『츠츠츠츠』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언어가 다르잖아요. 출판사에서도 서로의 말을 어떻게 배웠는지 물어보셨는데요. 제가 경험을 했잖아요.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내 얘기를 하면 얘가 알아듣고, 얘가 뭘 원하는지도 가만히 보면 알게 되는 게 있었으니까요. 아주 구체적인 단어를 아는 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는 걸 경험했으니까 “츠” 한 마디 속에 그렇게나 많은 말이 있다는 걸 이해하는 거예요. 이 설정이 저한테는 하나도 어렵지가 않았거든요. 헷갈릴 수 있으니까 설명을 넣자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저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독자 분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고요.
그래서 ‘작가의 말’도 그렇게 그리셨던 거군요.
맞아요, 사실 제가 말을 하면 강아지한테도 “츠츠츠츠” 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까요. 혹은 “마마마마”로 들리든지 말이에요. 그렇다 해도 우리가 서로에게 얘기하는 걸 다 알게 되잖아요. 그래서 작가의 말에 “츠츠츠츠” 하면 “내 말이 딱 그 말이야”라고 한 거죠. 동물 친구와 같이 사시면 꼭 한 번 해보세요.
『츠츠츠츠』 중. 사계절출판사 제공.
긴장되는 작업이었죠
‘츠츠츠츠’의 캐릭터를 만들 때 곤충을 상상했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셨어요?
털이 달린 지렁이를 상상했어요. 분홍색 털이 뾰족뾰족하게 난 지렁이인데 다리가 훨씬 많은 지렁이의 모습이요. 그냥 머리에 떠오른 건데요. 초안을 남편한테 보여줬더니 너무 징그럽다는 거예요. 저는 제가 만든 캐릭터가 징그러울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웃음) 그제야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싶더라고요. 어린이들이 읽을 책이고, 이야기에 집중해야 되는데 징그러움을 이겨내고 보면 안 되잖아요. 그렇지만 이 캐릭터가 가진 약간은 낯설고 무서운 면은 있어야 해서 그것을 조율하는 부담감이 컸죠. 무서울 수도 있어야 하는데 징그럽지도 않아야 하고, 곤충의 모양이 나와야 하니까요.
사실 그러려면 차라리 곤충이 아닌 게 편하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귀엽고 엉뚱하게 만들면 되잖아요. 그런데도 왜 곤충이어야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저 완전히 이질감이 있는 두 종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고요. 그래서 곤충 중에 귀여운 걸 찾아보려고 무척 노력했어요. 그럼에도 곤충에게 혐오스러운 포인트가 다소 있어서 그것을 조율하는 게 긴장되는 작업이었죠.
이전, 털숭숭이 캐릭터 작업을 했을 때와 많이 달랐겠어요.
털숭숭이는 별로 무섭지 않았어요. 까맣고, 동글동글하니까요. 눈만 잘 찍어주면 이렇게도 보였다가 저렇게도 보였다가 하잖아요. 눈 표정에서만 느낌이 잘 드러나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요. 이번에는 다리도 여러 개고, 몸의 마디도 여러 개라 캐릭터의 볼륨감과 컬러감 등을 생각하는 게 힘들었어요. 무엇보다 얘네가 사는 세상이 어디서 본 거 같은 섬이 아닌 완전히 다른 섬이었으면 했거든요. 그래서 섬에 왜 그 색감이 존재해야 되는지를 오래 고민했죠. 등장하는 캐릭터의 색을 분홍색으로 정했으니까 그 색과도 어우러지는 색감이어야 하잖아요. 또 섬 생태, 토양의 역사와도 맞아야 하고요. 캐릭터만 설정하는 게 아니라 배경 등 다른 것들을 한꺼번에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게 제일 긴장됐어요. 낯선 섬에 가는데 색감이 우중충하고, 책을 펼쳐보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면 안 되니까요. 섬을 떠올렸을 때 그래, 거기 벌레들이 살 만했어, 이렇게 느껴지길 바라진 않았어요.
털숭숭이가 헤엄쳐서 섬으로 가잖아요. 가는 길에서 만나는 바닷속 풍경도 그렇고, 섬이 딱 나타났을 때 펼쳐지는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너무 좋아요. 『이파라파냐무냐무』의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지만 정말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라는 걸 색으로도 느낄 수 있었거든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오감이 충족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거든요.
바다를 헤엄쳐 가다가 『이파라파냐무냐무』에서 마시멜롱들에게 선물 받은 칫솔을 바닷속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스치듯 나오죠. 그렇듯 책에는 말을 하지 않는데도 들여다보면 굉장히 많은 요소가 있거든요.
얼마 전에 유튜브 라이브를 했는데요. 어떤 어린이가 선물을 이렇게 취급하다니 나빴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선물인데 너무하다고요. 그래서 죄송하다고 했어요.
털숭숭이는 이가 아팠기 때문에 칫솔을 소중하게 지니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상상하게 됐죠. 칫솔이 없으니까 다시 칫솔이 필요해지겠구나, 마시멜롱을 다시 만나겠구나, 하고요. 작은 요소 하나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주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그림책의 매력이기도 한 것 같아요.
맞아요, 그림책의 매력은 사실 작가가 만드는 게 아니고 독자님들이 만들어주시는 것 같아요. 이렇게 다양한 상상을 하시니까요. 어떨 때는 그렇게까지 설정한 건 아닌데 막 물어보실 때가 있어요. 그러면 뭔가 직무 유기를 한 것 같고(웃음)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지,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독자님들이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자체가 고맙고 즐거워요.
이번 책을 출간하고 받은 뜻밖의 감상이나 재미있었던 리뷰가 있었을까요?
이야기에 대한 리뷰는 아니었는데요. 어떤 분이 굉장히 시크하게 ‘댓글도 얼마 없고 평도 많이 없어서 살까 말까 하다 샀는데 애들이 좋아하네요. 잘 샀네요.’ 하고 남기신 것을 봤어요. 아주 덤덤하게 달린 글이었는데요. 그게 최고였던 것 같아요. 정말 관심 없는 책이었던 거잖아요. 리뷰도 없고, 댓글도 없었지만 그냥 샀는데 아이들이 굉장히 잘 읽더라, 이 말이 마음에 크게 와닿더라고요.
또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감사했어요. 가끔 사인회 등에 갈 때면 왜 『이파라파냐무냐무』 2권은 안 나오는지 질문하는 독자님들이 있었어요. 뭔가를 하고는 있었지만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으니까 시원하게 답을 못 하고 있었는데요. ‘기다렸는데 이렇게 봐서 반갑다’는 얘기를 보면 참 반갑더라고요. 4년이나 기다려주고 계셨던 거잖아요. 한편으로는 그 사이에 어린이들이 다 컸을 텐데 미안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태도는 가볍게
이야기가 사랑스러워서, 특별히 신나게 작업하신 장면이 있는지도 궁금하더라고요.
처음부터 머리에 있던 장면이 있었어요.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 이 장면으로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해하게 만드는 기쁨이 있어서 정말 신나게 그렸어요. 그래서 이 장면을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작업을 했죠.
말씀 드렸듯이 캐릭터나 섬의 색감이나 설정 등이 어려운 난제였고요. 그런 게 안 풀릴 때는 제일 선명한 것부터 빨리 작업을 하면 쉽게 풀리기도 하거든요. 그런데도 이 장면은 끝까지 아껴뒀어요. 다른 장면을 작업하면서 손이 다 풀리고, 이 세계에 익숙해진 다음에 이 장면을 그리겠다고 다짐했죠. 그래서 이 장면을 너무 즐겁고 재미있게 그렸어요.
『츠츠츠츠』 중. 사계절출판사 제공.
『이파라파냐무냐무』에서도 그렇고, 『츠츠츠츠』에서도 두 쪽에 걸쳐 압도적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있잖아요. 서사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데요. 이런 부분은 어떻게 구상하시고 결정하세요?
처음에 『이파라파냐무냐무』를 만들면서 이 판형을 선택했던 이유 중 꽤 큰 부분이 그거였어요. 세로로 길게 펼쳐서 캐릭터의 크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요. 물론 걱정도 됐죠. 왜냐하면 책을 읽다가 갑자기 방향을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되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츠츠츠츠』에도 그런 부분을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도 하니까요.
저는 클라이맥스에서 엔딩으로 치닫는 부분에서의 낙차가 큰 걸 좋아해요. 툭 떨어지게 만들거나 쭉 올라가는 것을 즐기는데요. 양쪽 면에 하나의 그림을 넣는 것이 그런 느낌을 표현하기에 좋은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가능하면 넣고 싶어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앞서 편견 이야기를 했는데요. 초록색 열매가 등장하잖아요. 되게 맛없게 생겼어요.(웃음) 그렇지만 그것 역시 편견이었죠. 그런 작은 요소도 계속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제일 맛없었던 게 오이였어요. 저는 오이 냄새도 되게 싫어했고요. 집에 오이 비누가 있었는데 그것도 너무 싫었어요.(웃음) 그래서 제일 맛없는, 식욕을 떨어뜨리는 색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실은 여기에도 어떤 글에서 본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아빠가 집에서 자기 아이와 친구가 놀고 있는 걸 봤는데요. 아이의 친구가 이 아빠를 보더니 “저 얘랑 놀아도 돼요?”라고 하더래요. 그 친구의 엄마가 다른 인종의 사람이었나봐요. 그걸 보고 아빠가 너무 속이 상했던 거죠. 그동안 내 아이랑 놀지 말라는 시그널을 얼마나 많이 받았으면, 이미 집에 놀러 온 상태에서도 자기한테 허락을 받을까, 하고요. 그래서 피자도 사주고, 게임도 하며 논 뒤에 돌려보냈는데요. 이 친구가 엄마가 자기 나라 음식을 해준다고 했다면서 아이를 초대한 거예요. 초대해서 엄마가 하는 낯선 음식을 자랑하고, 너무 신나 했대요. 전에는 그것이 부끄러운 음식이었다면 이번엔 아니었던 거죠. 제가 한 20년 전에 영국에 있었는데 김치를 먹으면 죄인이었거든요. 지금은 각국의 음식들을 편하게 먹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화에 대한 편견으로 힘들어 하는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장면이 아주 살짝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님은 “독자에게 슬픔을 주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잖아요. 작품 안에 따뜻함, 유머를 담는 마음은 어떤 건가요?
제가 어둠에 집착하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림책 작가가 되기 전의 이야기인데요. 그때 슬프고 비극적인 것에 대한 정서를 충분히 누린 것 같아요. 그걸 지났더니 지금의 마음이 돼 버렸어요. 예를 들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비극일 때도 그걸 최대한 친절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거든요. 전에는 날 것 그대로, 칼로 베이듯이 작업을 했어요. 세상은 원래 아픈 거야, 하면서요. 그 시기를 지나면서 저를 즐겁게 하는 것들은 사실 지나가는 서툰 말들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심각하게 “나 사실은 이런 일이 있었어” 하고 고백을 했는데 의외의 가벼움으로 “강아지도 너 때문에 우울해졌냐?” 하는 톤이 있잖아요.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껴안고 있던 것들이 되게 밝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 경험을 하면서 태도를 바꾼 것 같아요. 분명히 그 문제가 내 인생에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그걸 대하는 태도는 가볍게 하기로, 그래서 무거워지지 않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이야기를 전달할 때도 그런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잘 살고 싶어요
그것은 아무래도 독자를 의식하기 때문이기도 할까요?
이야기를 만들면서 생기는 모든 즐거움의 80% 정도는 다 저를 위한 거예요. 제가 즐거워서 만들고, 막 웃었는데 아이들이 따라 웃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이 두 부분이 함께 굴러가는 느낌인데요. 진짜 너무 많이 아껴주시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80% 안에 독자들이 계속 들어오는 거 같아요. 제가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도 계속 나를 키워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확실히 일방향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의 즐거움이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외적인 부분을 생각해서 무언가를 강화시키자는 방향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어느 날은 그런 생각도 해요. 예전에 조용하고, 묵직하게 다루던 이야기들은 다시 못 하는 건가, 하고요. 제가 갑자기 다크 포스를 넣으면서 어떤 책을 내면 독자 분들이 충격 받을 수도 있잖아요. 질문을 주셔서 대답이 나오는데요. 이건 최근에 든 생각이에요. 지금까지는 너무 즐겁게 작업하고 있었는데요. 만약에 다른 주제와 다른 스타일의 작업이 온다면 그때는 다른 반응을 맞닥뜨리게 되겠다, 그런 것들을 준비하자, 싶은 생각을 하고는 있어요.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는 다양하게 있으신 거니까요. 고민을 해오셨나봐요.
현장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해마다 책 한 권을 보고 즐거워해요. 그러다 몇 년만 지나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사랑해주는 그 시기에 맞춰서 저도 부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떠나버릴 건 알지만 지금 너의 기억 속에서 즐거움을 같이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죠. 하지만 몸은 하나고, 작업은 1년에 많아야 두 개가 최대예요. 그 시기를 내가 하고 싶은 것으로 다 써버리면 이 아이는 1년 이상을 ‘팥할머니’를 못 만나는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어른의 타이밍을 생각하게 되죠. 아이들은 냐무냐무야, 할머니야, 호랑이야,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쳐 놓으면 당황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어요.
나의 독자들에게 늘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진짜 잘 살게요.” 자주 얘기하는데, 저는 아이들이 작가를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심리가 늘 경이로워요. 좋아하는 것을 만든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메타인지가 굉장히 높은 단계여야 하는 거잖아요. 실제로 아이들이 와서, 눈이 하트가 돼서 쳐다볼 때가 있거든요. ‘이걸 만든 사람이 너라서 난 너를 좋아해’ 하는 눈인데요. 그런 마음을 받으면 진짜 어떻게 하든 잘 살아볼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쁜 짓 하지 않고, 나쁜 생각하지 않고 잘 살아보겠다고요.
저에게 아주 암울한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동물 그림을 그린 적이 있거든요. 그 그림을 그리는 순간 너무 해방감이 들고, 치유되는 기분이었어요. 마침 그 작업으로 전시를 했는데 난생 처음으로 제 그림을 누가 사고 싶다고 하신 거예요. 한참 후에 그림을 구매하신 분을 우연히 뵀어요. 그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혹시 그 그림을 그릴 때 행복했냐고 하는 거예요.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정말 행복했던 게 떠오르면서 선생님께 신이 나서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불행했던 때였는데 그림 그릴 때는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랬더니 그럴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어머님께서 불면증이 심한데 그 그림을 걸어놓은 뒤 잠을 좀 주무시게 됐대요. 그때부터 작업을, 특히나 이렇게 아이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작업을 할 때는 좋은 상태로 그리려고 해요. 나쁜 생각이 들면 며칠이라도 작업을 안 하고요. 무서운 얘기 들으면서 작업하는 걸 즐기기도 하는데, 이 작업을 할 때는 안 들어요. 그래서 잘 살고 싶다는, 잘 살겠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어요.
혹시 인터뷰에서 꼭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있으셨을까요?
독자 여러분, 제가 그동안 보여드린 것과 결이 다른 그림을 내더라도 놀라지 마세요.(웃음)
* 필자|이지은
한국과 영국에서 디자인과 그림을 공부했다. 쓰고 그린 책으로는 『종이 아빠』, 『할머니 엄마』, 『빨간 열매』, 『팥빙수의 전설』, 『이파라파 냐무냐무』가 있다. 2021년 볼로냐 라가치상 코믹-유아 그림책 부문 대상을 받았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