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는 한국인 선을 긋는 일본인』
한민 저 | 부키
한국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 이대로는 부족하다’ 혹은 ‘세상이 아직 나를 몰라준다. 나를 더 발전시켜서 좀 더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유독 많이 한다. 그 이유는 뭘까?
한국인들의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플루언서’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입니다. 한국인들은 누가 나를 무시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내 마음을 몰라주면 화병이 납니다. 현실의 내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 차이가 날 때 굉장한 불편감을 느끼고 그 차이를 메우려고 무섭게 노력하기도 하지만, 안 되겠다 싶으면 허세로라도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죠. (396쪽)
심리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 문화심리학은 연구하기가 특히 쉽지 않은 분야다. 문화를 이해하려면 역사와 정치경제, 철학, 인류학, 사회학 등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한데 이를 심리학의 이론과 방법으로 포착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하고 책을 써온 문화심리학자 한민의 존재는 그 자체로 희귀하고 소중하다.
문화심리학이 말하는 한국인
이 책은 왜 일본인과 한국인이 비슷하게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되는지, 두 문화권은 어떻게 다른지 매우 구체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하지만 단순 비교나 장단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에게 문화심리학적 이해가 필요한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책이다.
한국인들은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한국인은 높은 자기상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 가치감이 높다고도 하죠. (…)
서양인들의 자기self는 그 개념부터가 제3자적 관점에서 객관화된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 자기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강한 자기 고양 경향과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자기현시적인 행위 양식 등을 고려해 보면 한국인은 현실적 자기보다는 이상적 자기에 가까운 자기상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 자신의 객관적인 상황보다는 자신이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자신의 모습을 자기로 인식하는 것이죠. (205쪽)
한국인의 끝없는 자기 계발 열풍에는 이런 맥락이 들어 있다. 하루 종일 일했으면서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독서 모임에 가거나 공부를 한다. 외모도 관리해야 하고 옷도 잘 입어야 하며 차도 좋은 것을 타야 한다. 남들 다하는 주식도 좀 해야 하고 부동산 공부도 해야 하며 트렌드 파악도 놓쳐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해줘야 하는’ 목록이 끝이 없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어느 수준에 있는지 파악하고 뒤처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이런 현상은 단순히 ‘경쟁이 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는 이것을 ‘주체성 자기’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국인의 주체성 자기
주체성 자기가 우세한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행사하고 싶어 하는 존재로 봅니다.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능력 있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좋아하지요.
대상성 자기가 발달한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봅니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자는 대로 잘 맞춰주는 사람이지요.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남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국인은 자신의 가치, 능력, 비전을 높이 평가합니다. 남들은 30% 확률로 암에 걸려도 나는 안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반면, 일본인은 타인들의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전체의 화합을 해치지 않는지 늘 고려합니다. 남들이 30% 확률로 암에 걸린다면 나도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16-117쪽)
‘자신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에 따라 행동 방식이 달라지고 문화의 양상이 달라진다고 보는 저자는, 한국인이 대체로 낙관적이고 긍정적 환상을 잘 갖는 이유가 주체성 자기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어려움을 돌파해 내는 역동적인 힘이 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과도한 자기중심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에 대한 문화적 이해
학벌 때문에, 돈 때문에, 성별 때문에, 외모 때문에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절대로 나는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혼까지 갈아 넣어 일했지만 회사는 나를 몰라준다.’고 토로하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공공기관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자기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교사의 머리채를 잡는 사람들, 이별하게 되자 한때 사랑한다고 속삭였을 대상을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는 사람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모두 ‘자기’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왜곡된 신념, 병리적 행동 밑에 문화의 흐름이 들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갑질’에 집단 무의식이 들어 있다면? 자기과시와 허세가 좌절되어 느끼는 분노를, 타인 탓, 사회 탓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를 두고 이누야마 요시유키는 "주연들의 나라 한국, 조연들의 나라 일본"이라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은 자기를 기준으로 밖을 겨누는 방향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일본인은 바깥을 기준으로 자기를 겨누는 방향으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문화심리학은 이런 현상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창이다. 이 책은 어디까지가 개인의 문제이고 어디서부터는 사회문화적 원형에 가까운지 매우 섬세하게 그려낸다.
*필자 | 변지영
작가, 임상·상담심리학 박사. 『우울함이 아니라 지루함입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나에게』 『내 마음을 읽는 시간』 등을 썼다.
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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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