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홍련> 홍나현이라는 생존자
글ㆍ사진 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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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의 칼럼은 매월 넷째 주 더뮤지컬 웹사이트를 통해 연재됩니다.

 


 

 

한 가족이 있다. 아빠와 엄마, 두 딸과 아들 하나. 다복하게 보이지만, 쌍둥이 딸들은 축복 없이 태어나 강요된 삶을 살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화홍련전』의 이야기다. 뮤지컬 <홍련>은 언니 장화를 잃고 저승에 당도한 홍련의 시선으로 『장화홍련전』을 다시 쓴다. 삼도천을 건너지 못한 홍련은 저승신 바리 앞에 가해자 신분으로 서 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동생을 해친 혐의다. 그러나 홍련은 자신의 행위가 가정폭력 피해자로서의 단죄였으니 무죄라고 주장한다. 뮤지컬은 재판의 형식을 빌려 홍련의 주장 속에 담긴 모순과 진짜 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는다. <홍련>은 장화와 홍련, 딸들의 사망원인을 밝히는 심리적 부검이다.

 

홍련은 재판 내내 분노와 조소를 오간다. 분노는 정숙을 강요하고 모함을 외면하고 물리적 폭력을 가한 아버지, 절박한 구조신호를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사회와 신을 향해있다. 분노가 객관적 사실에 기인한다면, 조소는 좀 더 감정적이다. 일말의 기대가 꺾인 뒤 찾아오기 때문이다. 홍련이 조소하는 대상은 바리다.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려지고도 지옥에서 치료제를 찾아와 그들을 살린 뒤 공을 인정받아 저승의 신이 된 인물. 홍련은 그런 바리공주를 “효의 귀감”이라고 비아냥댄다. 여전히 사랑과 용서를 말하는 바리는 부모의 방임과 학대라는 같은 폭력을 겪고도 다른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홍련이 아버지보다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다.

 

사실 홍련의 감정이 낯설지는 않다. 그런데 그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주장만을 밀어붙이고 생각보다 더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홍련>은 그 원인을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제가 견고한 사회에서 찾는다. 장화홍련의 실제 사건이 있던 1656년만큼은 아니어도, 2024년에도 여전히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한다. 많은 여성이 사회가 지속해서 주입한 낡은 관습의 영향으로 제 안에 자연스레 생겨나는 여러 감정을 억압한다. 억눌린 감정은 과도한 자책과 자기혐오, 혹은 화병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의 상처를 그대로 딸과 며느리에게 대물림하는 경우도 있다. 장화는 침묵 속에 죽었고, 홍련은 격렬하게 외치며 스스로 악인을 자처한다. 방법은 잘못됐지만, 계모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장 외면해 온 감정과 사실을 직면하고 솔직하게 발화해야 한다. 바리는 자신이 지옥에 간 이유를 아버지가 제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 비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한다. 홍련은 언니의 고통에 침묵한 자신을 향한 지독한 자기혐오를 토해놓는다. 바리는 과거의 자신 같은 홍련을 다독이고, 홍련은 같은 마음을 바리에게 이해받음으로써 비로소 안정을 찾고 진짜 자신으로 돌아온다. <홍련>은 폭력의 피해자인 두 여성을 통해 생존의 힘이 수용과 자기 용서, 연대에 있음을 강조한다.

 

 

잔인하고 지독한 홍련의 성장통은 배우 홍나현을 만나 만개했다. 그는 지난 2년간 트라이아웃 공연부터 본공연까지 <홍련>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깊이 만난 배우다. 특히 뮤지컬 <앤ANNE>을 비롯해 <비틀쥬스>와 <비밀의 화원>, <더 라스트맨>에 이르는 필모그래피의 다수를 빛나는 생존력으로 채워왔다. 그의 인물들은 대체로 10대이며, 모두가 어른의 보호 밖에 있다. 부모는 사망했거나 아이를 구박하거나 방치한다. 하지만 홍나현은 혼자 서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만 했던 친구들에게 ‘야무지다, 건강하다, 용감하다, 긍정적이다’라는 형용사를 주로 붙인다. 그의 인물들이 상처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이유다. 아마도 홍나현의 인물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기에 지을 수 있는 미소일 것이다. 그런 그의 곁에 새롭게 만들어진 가족과 저택을 함께 지키는 원귀들, 비밀연극을 함께한 고아원 친구들이 선다. 서로의 외로움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보고 조건 없이 손을 내밀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옥희와 리디아, 큰 유진과 에이미가 그랬듯 홍련도 자신을 가로막던 장애물을 넘어 다음 단계로 간다. 무거운 추 같던 자기혐오를 지우고 자신을 용서하면서. 시간과 함께 홍나현도 인물의 행간을 더 촘촘하게 읽어내고 감정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배우가 되어간다. 제 몸만 한 높은 계단도 기꺼이 성큼성큼 오르는 씩씩함은 스스로와 관객을 향한 응원이 된다. 언제나 그의 생존을 기다리는 이유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의 홍나현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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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엔터테인먼트 웹매거진 <매거진t>와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10년 동안 콘텐츠 프로듀서와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다. 공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무형의 생각을 무대라는 유형의 것으로 표현해내는 공연예술과 관객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