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란 소비문학의 이름이다
환자복을 입고 삼삼오오 둘러앉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앞에는 TV가 한 대 놓여있네요. TV 속에선 한국산 드라마가 한창 방영되고 있습니다.
“난 너 같은 애들을 잘 알아. 자 이 돈 받고 내 아들에게서 떨어져!”
라는 대사의 표독스러운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 앞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숨기며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는 대사를 꼭꼭 씹어 뱉은 여성까지. 답답한 장면에 시청자들이 가슴을 턱턱 칩니다.
그렇게 한 차례, 여자주인공의 마음과 남자주인공의 상황에 태풍을 일으킨 어머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비서를 만납니다. 그런데 비서의 표정이 뭔가 비장하군요.
“내가 조사하라는 건 조사했어요?”
“저…… 사모님.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조사하라고 하셨던 선영 씨, 사실 사모님의 따님이십니다.”
갑작스럽게 밝혀진 출생의 비밀! 그리고 그 순간, 병실에서 함께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어렸을 때 잃어버린 딸이 맞다니까!”
아마 이런 풍경, 여러분들도 많이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무슨 장면이 펼쳐질지 이미 알고 있고, 그렇게 펼쳐질 장면을 곱씹듯 확인한 뒤, 맞았을 때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이요. 이런 풍경은 우리나라의 곳곳에서 종종 펼쳐집니다.
그럼 우리는 왜 이미 알고 있는 내용, 뻔히 알만한 내용들을 기다리면서 보는 걸까요? 이 같은 이유를 스웨덴 스톨홀름 대학의 비교문학과 교수인 마리아 니콜라예바의 연구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똑같은 동화를 읽어달라는 아이의 모습을 분석하며, 자기가 아는 내용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부모가 읽어줄 때, 자신이 아는 내용이 그대로 재현됨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안정감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웹콘텐츠도 비슷합니다. 뻔한 내용이 이어지더라도 그것을 집단이 보게 되면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대화를 나누며 그 감정을 교환하는 것. 그것이 웹콘텐츠의 재미를 증대시키지요.
이를테면 예능 프로그램을 소위 ‘불판’을 통해서 함께 보는 행위나, 유튜브나 티빙, 네이버캐스트 등의 플랫폼을 통해서 라이브 방송을 보며 함께 채팅을 치는 행위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아 이 캐릭터 어쩐지 고구마일 것 같은데’ 라던가 ‘이 캐릭터 어쩐지 느낌이 싸한 게 나중에 뒤통수칠 것 같다’며 예측성 댓글을 다는 행위가 그러합니다.
웹콘텐츠에서 채팅이나 댓글은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것은 소비자 한 명의 개인적 발화에 불과하지만, 콘텐츠와 동시에 목격되며 좋아요/싫어요 라는 집단의 투표 속에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 소비자들의 ‘민의(民意)’로 진화하지요. 독자들은 그러한 댓글까지도 작품을 소비하는 재미 속으로 포함하게 됩니다. 이때 소비자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작품의 소재나 스토리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우리는 ‘장르’라고 부릅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장르는 작품 내부에 존재하는 요소라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용이 나오고 마법이 나오면 판타지, 외계인이나 로봇, 인공지능이나 사이보그 같은 기술적 개념이 나오면 SF 같은 방식이지요. 하지만 현대 사회의 장르는 변화하였습니다. 용을 예로 들자면, 이제는 용이 나온다고 판타지인 것이 아니라, SF라는 장르에서 용이 나온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세계 속에서 규칙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며, 또한 그것을 독자들이 판타지로 바라볼 것인지 SF로 바라볼 것인지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장르’의 요소가 가장 활발하게 발전한 공간이 바로 웹소설이라는 터전이지요.
웹소설과 웹툰 관련 비평이나 수업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러한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거기서 거기인 똑같은 이야기들, 뭐가 재미있다고 보세요?” “결국 장르로 묶여있다는 건 뻔한 이야기를 한다는 소리 아닌가요?” “비슷한 코드와 클리셰로 범벅된 이야기가 새로울 게 있나요?” 등의 질문이지요.
이러한 질문은 오로지 작품의 텍스트와 독자라는 순백의 세계만 상정한 채 던져진 물음입니다. 웹소설은 태생부터 웹이라는 곳에서 다수의 시선이 교차하며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네트워크 공간의 텍스트입니다. 독자가 작품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선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독자의 목소리를 바라본다는 것. 그것이 웹소설의 재미를 만들어내지요.
이처럼 웹소설에서 ‘장르’란 단순히 소설의 내용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을 누가 어떻게 바라보는가. 독자들의 어떤 행위를 유도하고 그것을 충족시켜 주거나 배반하는가. 뛰어난 웹소설 작가일수록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배반하는 이중적 작업을 능숙하게 서술합니다.
고별 작가의 『막장드라마의 제왕』은 잘 알려진 막장 드라마의 클리셰를 비틀어내는 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세계를 끌어낼 수 있는지 알려주는 명작입니다.
주인공 이현석은 드라마 감독이었다가 은퇴 후 회사 속으로 들어간 직장인입니다. 그러나 사고 이후 회귀하여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명감독 ‘김철’의 영혼과 함께 궁극의 막장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왜 하필 다른 명작 작품도 아니라 막장 드라마냐면, 그것이 주인공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떠올린 꿈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주인공 이현석의 목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의 곁에 너무나도 뛰어난 인재들이 모인 결과, 주인공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명작이 탄생해 버렸기 때문이지요. 죽음을 피하기 위해 막장을 만들려고 하는 주인공의 애절한 노력이 소설의 재미를 견인해 갑니다.
그렇기에 『막장드라마의 제왕』의 독자들은 묘한 이중의 재미와 마주하게 됩니다. 소설 속의 시청자들처럼 ‘막장 드라마’라는 클리셰가 깨어질 때의 충격을 재미로 느끼고, 동시에 ‘웹소설’의 문법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주변인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는 주인공의 ‘뻔한 모습’에서 재미를 느끼게 되지요.
그러니 이번 달, 웹소설의 ‘장르’를 읽어내기 위해, 여러분들이 좋아하실 법한 드라마 한 편 읽어보시는 거 어떠시겠어요?
이융희
장르 비평가, 문화 연구자, 작가. 한양대학교 국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2006년 『마왕성 앞 무기점』으로 데뷔한 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장르문학을 창작하고 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웹소설 창작학과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장르 비평 동인 텍스트릿의 창단 멤버이자 팀장으로 다양한 창작, 연구, 교육 활동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