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 시대 최고의 화가’, ‘20세기의 독보적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를 검색하면 늘 따라붙는 수식어다. 그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말들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와 같은 ‘동시대’를 담아내는 ‘최고의’ ‘화가’. 평론가와 미술사학자들은 호크니 그림에서 이전 거장들의 레퍼런스, 발터 벤야민 같은 철학자와의 연결고리를 읽어낸다. 거창한 미학적 논쟁이 아니더라도 그의 그림은 특별한 힘이 있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캘리포니아의 햇볕과 물에 일렁거리는 푸른 타일이 깔린 수영장, 봄이 막 찾아온 평원과 숲, 지인들을 바라보는 따뜻하고도 진지한 시선을 우리는 사랑한다. 그의 그림엔 이 같은 감정과 일상이 살아있다. 그래서일까. 모든 것이 숫자로 표현되는 미술시장에서도 이 같은 ‘선호’가 그대로 반영된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살아있는 작가 중 2번째로 비싼 경매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72년작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가 지난 2018년 크리스티경매에서 9,020만달러(수수료 포함)에 낙찰됐다. 1위는 제프 쿤스의 조각 ‘Rabbit’(9,110만달러)이다. 회화로만 장르를 좁히면 가장 비싼 회화 작가인 셈이다. 그의 인기와 존재감은 대형 경매가 있을 때 마다 증명된다. 지난 10월 열린 런던 프리즈를 위시한 아트위크 기간, 글로벌 양대 경매사인 소더비와 크리스티 모두 호크니의 작품을 컨템포러리 경매 메인으로 걸었다. 영국 작가임을 감안하더라도 시장에서 중요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더비 경매 출품작은 ‘라르부아, 생막심(L’Arbois, Sainte-Maxime)’(1968)인데, 프랑스 남부 근처 생막심의 호텔 라르부아를 그렸다. 여행으로 방문했던 곳을 사진으로 남겼고 이를 다시 회화로 그린 것이다. 낙찰가는 1,310만 파운드(1,720만 달러). 낮은 추정가 700만 파운드(900만달러)의 두 배 가까운 수준이다.
어쩌다 아이패드 드로잉을 시작하게 되었나?
‘데이비드 호크니’ 하면 ‘화가’로 인식하지만 사실 그가 천착한 매체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캔버스와 물감은 물론, 판화, 복사기, 팩시밀리, 사진, 포토 콜라주, 비디오 작업도 했다. 심지어는 발레와 오페라를 위한 무대 세트도 디자인 했다. “(제가) 기술에 미친 사람은 아니지만, 시각적인 것은 어떤 것이든 저에게 어필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했으니 그의 관심분야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특히 복사기와 팩시밀리는 ‘복제’와 ‘유통’의 용이성 측면 때문에 작가가 좋아했던 분야다. 작가는 팩시밀리를 통해 198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여러 장(정확히 144장)의 그림을 팩스로 보낸 뒤, 이를 이어 붙이면 하나의 큰 그림이 되는 형태였다. 물론 브라질의 통신사정이 좋지 않아 바로 상파울루로 보내려던 계획은 틀어졌지만, LA의 다른 곳으로 보낸 팩스 프린트를 상파울루로 보내 작업을 완성했다. 팩시밀리가 뽑아내는 ‘아름답고 벨벳 같은 검은색’이 자신을 매료시켰다고 작가는 말한다.
1990년 여름, 호크니는 실리콘벨리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했다가 컴퓨터에서 그림을 바로 그리고 이를 인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매킨토시 컴퓨터를 구매했다. 디지털 드로잉과 인쇄를 통해 ‘원본성’과 ‘회화’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이어갔다. 이 같은 실험은 2007년 1세대 아이폰이 나오면서도 이어졌다. 브러쉬즈(Brushes)라는 앱으로 작은 그림을 그리다 마침내 아이패드가 나왔을 때 호크니는 주저없이 아이패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이패드를 선호하는 이유는 즉각성(immediacy)이다. 언제 어디서나 손가락만으로 원하는 색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그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이패드에 대해 “아이폰 보다 8배 크고 적당한 크기의 스케치북 사이즈”, “손가락으로 그리는 끝없는 스케치북”이라며 여러차례 만족감을 표시했다. 아이패드는 곧 호크니의 동반자가 됐다. 2011년 고향인 동요크셔에서 지내며 봄이 찾아오는 풍경을 아이패드에 담아냈다.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 East Yorkshire’(10개 에디션)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시리즈는 이듬해인 2012년 왕립예술원(RA, Royal Academy of Arts)에서 열린 대대적 회고전 (David Hockney: A Bigger Picture)에서도 선보였다. 이후 아이패드는 2016년 요세미티 여행에 함께했고 이때 풍경은 ‘The Yosemite Suite’ 시리즈(25개 에디션)로 공개됐다. 2020년 초, 코로나19가 막 시작할 무렵 노르망디를 찾은 그는 날마다 밖으로 나가 만났던 노르망디의 봄을 ‘The Arrival of Spring’시리즈로 엮어냈고, 2021년까지 이어진 봉쇄 기간 호크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아이패드로 정물(꽃)과 근방의 풍경(20 Flowers and Some Bigger Pictures)을 담았다.
유화와 아이패드 드로잉
이쯤 되면 더 궁금해진다. 이 시대의 수많은 ‘거장’들 사이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의 무엇이 매력이길래 프린트 한 장의 가격이 수억~수십억 원을 호가하고, 전시만 열리면 줄을 서는 것일까? 앞서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국내 최초로 호크니 개인전을 열었을 당시 관람객은 30만 명을 돌파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는 많다. 테크닉이 뛰어난 작가도 많다. 오히려 호크니의 색감은 실제와 달리 과장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속절없이 빠져든다.
80대인 예술가가 디지털 드로잉이 ‘진정 즐겁다. 나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준다’(I’m enjoying myself enormously, yes I am, It’s given me a new lease on life.)며 애정을 드러내지만, 호크니의 작품 중 시장의 선호는 단연 아날로그 방식의 회화(유화)다. 매체에 대한 전통적 선호와 더불어 유일본이라는 희소성이 작용된 결과다. 호크니의 회화는 사이즈와 시기, 무엇을 그렸냐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적으로 7~8자리 숫자(100만달러~1000만 달러 대)에서 거래되고, 인기가 좋은 판화나 멀티플(프린트)는 6~7자리 숫자(10만~100만달러)에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상대적 가격 접근성 때문에 판화, 멀티플의 수요도 꾸준하다. 덕분에 프린트 가격도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프린트 거래 플랫폼 Myartbroker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호크니 프린트 시장 규모는 122%, 거래량은 18%증가했다. 아이패드 드로잉 최근 경매기록을 살펴보면 수억 원을 가볍게 넘긴다. 2022년 필립스 경매(런던)에서 ‘The Arrival Of Spring In Woldgate East Yorkshire 4th May 2011’가 50만4,000파운드(해머프라이스)에 낙찰되기도 했다. 지난 6월엔 같은 경매사에서 같은 시리즈의 ‘6월 2일’ 작품이 40만6,400 파운드에 낙찰됐다.
구상 회화는 기본적으로 눈으로 본 것을 그린다. 인간의 ‘눈’은 고도의 훈련된 기관이다. 눈에 비친 것을 머리가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본다’는 과정이 완성된다. 이에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저서 ‘예술과 환상’에서 ‘예술가는 보이는 것을 예술적 자원을 활용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릴 수 있는 것을 본다’고 까지 말한다. 호크니는 이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심리학적으로 본다”고 말한다. 각자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같은 사물도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각자의 필터를 가지고 바라보고, 이해하고, 그려내는 것이다. 다양한 매체로 실험하는 것도 이 같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맥락으로 읽힌다. 디디에 오팅거 퐁피두 부관장(큐레이터/평론가)는 ‘찰리 채플린이 피카소와 춤을 출 때’라는 글에서 “호크니는 발터 벤야민과 유사하게 사회적 영역에서 예술의 소명을 믿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매체에 대해 체계적으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만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회화를 상상하는 철학자’라고 평가했다.
그가 거장으로 평가되는 또 다른 이유는 ‘완벽’에 가까운 탐구와 실험의 수준 때문이다. 카메라, 복사기, 팩시밀리를 활용한 작업은 물론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포토리얼리즘을 구현하기 위해 옛 화가들이 카메라 루시다를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2012년 런던 왕립예술원(RA)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을 기획한 이디스 데바니(Edith Devaney) 큐레이터는 “전시를 구성하는 지난 50년간의 작품을 살펴보면 유화이면 유화, 사진이면 사진, 영상을 비롯해 전 매체를 다루는 기량이 정상급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유화와 아이패드 드로잉(프린트)의 차이를 ‘질감’으로 꼽고, 작가가 이 같은 특성을 잘 활용했다고 평가한다. “(아이패드 드로잉에는) 질감이 없다는 것을 호크니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이용했다. 프린트는 깊이감이 없고 플랫하며, 그래서 완성도 높은 과슈화처럼도 보인다.”
미술관부터 갤러리까지 ‘러브콜’
슈퍼스타 호크니에 대한 미술계의 사랑은 뜨겁다 못해 경쟁적이기까지 하다. 미술관은 물론이고 갤러리도 마찬가지다. 노르망디의 봄 풍경을 담은 ‘The Arrival of Spring, Normandy’는 2021년 왕립예술원(RA) 전시를 시작으로 부뤼셀 보자르, 이스탄불의 사킵 사반시 미술관, 2022년 시카고현대미술관에서 차례로 선보였다. 갤러리 5개가 뭉쳐 같은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다. 2022년 11월 ‘20 Flowers and Some Bigger Pictures’라는 주제로, 똑같은 아이패드 드로잉이 걸렸다. 로스앤젤레스의 LA 루브르(LA Louver), 파리의 갤러리 르롱(Galerie Lelong), 런던의 앤리 유다 파인 아트(Annely Juda Fine Art), 시카고의 그레이 갤러리(GRAY), 뉴욕의 페이스 갤러리(Pace)가 협동한 전시다. 한 작가의 작업을 놓고 국제적으로 활동(경쟁)하는 갤러리들이 협업하는 건 의외의 상황이다.
피터 굴즈 LA 루브르 창립자는 아트뉴스페이퍼와의 인터뷰에서 “5개 갤러리가 한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꽃 그림은 50개 에디션으로 제작됐지만, 각 갤러리에 10개 에디션씩 배분한 것도 아니었다. 최소 5개는 호크니 재단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를 나누어 판매했다. 그만큼 작가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두터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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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빛 (미국 미술품시가감정평가사)
『헤럴드경제』 신문에서 시각예술 분야 담당 기자로 약 10년간 활동했습니다. 수 천 건에 달하는 기사를 썼지만, 엄연히 미술계 머글(비전공자)입니다. 일반인의 눈으로 미술계 소식을 전달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학부에선 언론정보학을 전공했으며 뒤늦게 MBA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미국 감정가협회 (Appraisers Association of America, AAA)의 미술품 시가 감정 과정을 수료했고 AAA의 준회원 후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