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걸그룹, 큰 키, 이국적인 비주얼…. 대중이 바라보는 김도연에게는 흔히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조금 다르다. 민낯의 얼굴로 편안하게 카메라 앞에 앉아 잔잔한 노래를 부르고, 필름 카메라 한 대와 함께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영화관에서 홀로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보는, 삶을 작고 잦은 영감으로 채우는 사람. 둘 중 무엇이 진짜 김도연일까? 이 어리석은 질문에, 그는 ‘둘 다 진짜 나’라고 대답한다. 배우라는 새로운 수식어와 함께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시작한 김도연은 자신의 직감을 굳게 믿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세상이 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말보다, 자신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은 말을 들려주면서.
연극 <애나엑스>는 뉴욕 사교계를 뒤흔든 인물 애나 소로킨의 사기극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이다. 김도연은 부유한 상속녀라는 가짜 배경으로 자신을 포장해 사기 행각을 벌이는 애나 역을 맡아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애나 엑스>가 개막한 지 벌써 한 달 정도 지났네요. 연극 무대에 서보니 어때요?
너무 재밌어요. 처음 경험해 보는 거라서 늘 새롭고, 배우는 것도 많고요. 하루하루가 새롭다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에요. 매 공연 전혀 다른 감정이 생기는, 그 현장감이 너무 좋아요.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은데, 무대에서 여유를 느끼면 은연중에 큰 실수를 하게 될 것 같아서(웃음) 긴장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연기 공부를 위해 런던으로 떠났었죠.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텐데, 그 과감한 선택이 참 멋지더라고요.
두 달가량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교를 다니느라 참 바쁘게 살았어요. 9시~10시에 등교해서 5시~6시까지 수업을 듣는 풀 타임 커리큘럼이었죠. 제 인생에서 이렇게 큰 선택을 주체적으로 한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물론 여태까지 살면서 이런 저런 중요한 선택들을 해오긴 했지만, 그게 정말 나라는 사람을 정확하게 알고 한 선택, 혹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선택인 경우는 드물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런던에서의 시간이 더 의미 있었어요. 그 시간들을 최선을 다해 만끽하고자 했고요.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도, 지하철을 타고 등하교할 때도, 홀로 거리를 걸을 때도, 모든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오롯이 느끼기 위해 노력했어요.
연기에 대한 애정을 가득 채운 상태에서 첫 연극인 <애나엑스>를 만나게 됐네요. <애나엑스>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 출연을 결심했나요?
우연한 기회로 출연 제안을 받았는데, 마침 제가 그 당시에 ‘새로 도전하는 것에 주저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길게 고민하지 않고 도전해 보겠다고 말씀 드렸어요. 지하철에서 대본을 처음 읽었는데, 사람이 북적이는 열차였는데도 불구하고 대본에 푹 빠져서 읽게 되더라고요. 이전에 봤던 넷플릭스 <애나 만들기>와 다르게 그려진 스토리 라인, 애나의 내면을 추상적으로 드러내는 대사들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도연 씨는 어린 나이부터 여러 활동을 해왔지만, 연극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잖아요. 어떤 점이 유독 새롭던가요.
아직 연기 경험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공연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는 배우, 창작진 모두가 모여서 작품 전체의 방향성에 대해 논의 하는 경우가 흔치 않잖아요. 저 역시 다른 작품을 할 때는 배우로서 1인분을 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 채 임했고, 내 생각만으로 캐릭터를 확장시키거나, 작품 혹은 다른 캐릭터의 범위까지 관여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연극은 테이블 리딩 작업을 할 때 모두가 둘러앉아서 작품의 배경, 캐릭터의 관계, 그들의 내면, 작품의 메시지 등 작품과 캐릭터에 대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더라고요. ‘이런 것까지 함께 얘기를 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것도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분들이 이야기 하시는 걸 주로 듣는 입장이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적응이 되고 난 후부터 저도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제 생각을 많이 펼쳐놨어요. 다른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논의가 이렇게까지 확장될 수 있구나‘ 싶었죠. 정말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어요.
애나는 자신을 부유한 상속녀로 꾸며 사기 행각을 벌이는 인물이에요. 이러한 인물을 잘 표현하기 위해 어떤 점을 가장 많이 고민했나요.
결국 애나는 범죄자잖아요. ‘애나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디까지 표현해야 그를 정당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선을 고민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어요. 그런데 점점 생각할 수록 제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는 그저 애나의 입장이 되어 무대에 서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공연이 시작한 후에는 온전히 애나로서 연기하고 있어요.
연기적인 측면에서는, 제가 여태까지 스크린 연기만 해봤다 보니 습관적으로 세밀한 표정, 내면적인 감정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근데 연극은 멀리 있는 관객분들까지 제 감정을 전달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제 감정과 표현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캐릭터에 대해 만들어 두었던 한계가 자연스럽게 깨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이 인물을 조금 더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특히 애나가 워낙 다양한 면모를 지닌 캐릭터여서 그런지, 제가 인물에 대한 생각을 확장하고, 그걸 무대 위에서 펼쳐낼 수록 재미가 더 커져요.
애나 뿐만 아니라, 극 중 서사를 더해주는 여러 인물을 오가면서 연기해야 하잖아요. 인물의 감정선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나요.
아무래도 쉽지는 않더라고요. 애나로서 점점 감정을 쌓아가다가 마지막에 정점을 찍어야 하는데, 중간중간 다른 인물 4명 정도를 거쳐가야 하니까요. 특히 의상 등 보여지는 부분에 큰 변화 없이 온전히 연기만으로 각 인물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움직임에 차이를 두려고 노력했어요. 냉정한 성향의 투자자 제드를 연기할 때는 로봇처럼 움직이고, 개발자 마커스를 표현할 때는 생동감이 확실하게 느껴지도록 움직이죠. 여러 인물을 오가야 한다는 점이 어렵기는 하지만, 동시에 재미있기도 해요. 관객분들 입장에서도 분위기가 환기되는 순간일 거라고 생각하고요.
공연 말미, 모든 사기 행각이 발각되고 수감된 애나가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구두를 착용한 채 등장하는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더라고요.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건 애나의 실패, 끝을 의미하는 거잖아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구두가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는 애나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어요. 목을 죄는 초커 형태의 목걸이, 반짝이지만 위태롭고 불편한 하이힐…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에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과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첫 작품으로 이렇게 생각할 거리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은 작품을 만난 덕분에 무대 연기의 매력은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느끼고 있겠네요. (웃음)
<애나엑스>를 첫 연극 작품으로 만난 게 오히려 다행이에요. 연극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으니, 이 작품이 어려운 작품인 지도 몰랐어요.(웃음) 모든 게 백지인 상태이다 보니 오히려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같은 공연을 반복해서 연기하는데 매 공연 새로운 감각이 느껴진다는 게, 매번 새로운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저에게 자유로움을 안겨줘요.
<애나엑스>가 객석에 던지는 키워드 중, 자신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키워드가 있다면요.
‘진실이란 뭘까‘라는 대사가 있어요. 그 대사가 와닿더라고요. 진실이 진짜 존재할까? 우리 모두는 각자가 원하는 모습대로 행동하는 거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건 그걸 정의 내리는 사람마다 다를 텐데, 그럼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작품을 준비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했어요. 아직 답을 내리지는 못했지만요.
배우는 필연적으로 ‘보여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직업이잖아요.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괴리로 인해 고민했던 순간이 있나요.
<애나엑스>를 만나기 전, 그 괴리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한 적이 있어요. 이런저런 고민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결국 그 모든 게 다 진짜라는 거예요.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그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괴리를 크게 느끼게 되지만, 사실 그 둘 다 그냥 나 자신이거든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내 모습도 나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내 모습도 나다. 그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니까 훨씬 마음이 편해졌어요.
사진: 표기식
연기를 하면서 애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게 되는 순간이 있던가요?
사기꾼한테 제 모습을 투영하면 안 되는데!(웃음) 극 중 애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약해졌다는 생각이 들면 스스로를 계속 다잡아요. 그런 모습이 저랑 비슷하다고 느껴졌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되게 최근인데요, 내가 나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약해지고, ’아닌데 나 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면 진짜로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예전에는 이렇게 스스로를 다잡는 게 뭔가 나를 몰아세우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오히려 지금은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이번에 연극을 하면서 다시금 깨달았어요.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게 성장한다는 걸요.
지금의 김도연은 어떤 상태인가요. 한없이 단단한가요.(웃음)
지금의 저는 강철이에요. (웃음) 생각이 심플해지면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어떤 고민이 생겨도 생각 많이 안 하고, 그냥 하는 거죠. 최근 들어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많이 생겼어요. 런던에 다녀온 것을 포함해서, 인간으로서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경험을 쌓다 보니 그런가 봐요.
최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뭔가요?
만끽, 그리고 충만. 20대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 이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놓치지 말고 느끼자, 그렇게 충만한 인생을 살자. 그게 요즘의 제 마음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생각이에요. 20대에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부딪히고, 넘어지고 싶어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 정말, 진짜 내 삶을 사는 기분이에요.
이제 본격적으로 ‘배우’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갈 텐데, 배우 김도연, 그리고 인간 김도연은 어떤 마음으로 나아가고 싶나요.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바가 맞닿아 있어요. Trust Your Gut.(너의 직감을 믿어라.) 내 직감을 믿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 그러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뒤돌아봤을 때 나의 길 위에 쌓인 모든 것이 의미 있고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표기식
사진 작가.

이솔희
뮤지컬 전문 매체 <더뮤지컬> 기자. 좋아하는 건 무대 위의 작고 완벽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