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심리학의 깊이가 보여주는 인간의 근원
"자기는 진정한 의미의 그 사람의 개성이다." 칼 융은 인생의 의미는 오직 그 사람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분석심리학에서 강조하는 '자기실현'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글 : 변지영
2025.05.07
작게
크게


『자기와 자기실현』

이부영 저 | 한길사


우울이나 불안 같은 신경증을 두고 칼 융은, “아직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마음의 고통”이라 했다. 자기실현을 통해 포괄적인 인격으로 발전하게 되면 대개 신경증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어떤 원리로,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자기는 진정한 의미의 그 사람의 개성이다. 실현해야 할 것은 집단규범으로서의 그리스도나 붓다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개성적인 길을 걸어간 그리스도와 붓다의 그 정신과 용기다. 개성이란 그 사람 자신의 것이다. 정신의 전체성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크기와 모양을 가진 것이라면 그것은 융이 말하는 자기가 아니다. (91쪽)

 

이 책은 한국을 대표하는 분석심리학자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3부작을 완성하는 제3권으로, 분석심리학에서 가장 강조하는 ‘자기실현’이 과연 무엇인지 매우 상세하게 설명한다. 

   

자기와 자아

 

분석심리학에서는 자아와 자기를 구별해서 설명한다. 자아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에고(ego)다. ‘나’라고 하는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며, 자존감, 자부심, 자기 사랑 등 일반적인 심리학 용어로 자신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자아가 의식의 중심이라면,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정신의 중심이다. ‘자기’는 분석심리학과 내면가족체계치료(IFS) 정도에서 쓰이는 용어이지 범용되는 심리학 개념은 아니다. 그런데 중년 이후의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흥미롭게도 자기를 이해하고 실현하는 과정은 크게 다른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기와 후반기의 사뭇 다른 양상을 들여다보자.  

 

청소년기는 삶 속으로 나아가는 시기다. 청소년기 신경증은 중년기와 달리 삶을 두려워하거나 삶에서 물러서려 할 때 생긴다고 융은 말했다. 성인기를 지나 중년에 이르기까지 페르조나를 강화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아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한다. 그것은 사회활동을 통해서 잊어버린 내면세계, 즉 무의식세계와 다시금 관계를 맺는 일이다. 무의식의 내적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자아로 하여금 자기로 인도하는 매개자가 된다. 청소년기에는 심혼의 상실을 견딜 수 있지만 중년 이후에는 심혼의 상실을 상처없이 견디기는 어렵다고 융은 말한다. 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이 시기에 비로소 자기 내면세계로의 여행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51-3쪽)

 

전반기의 룰

 

즉, 10대, 20대에게는 자기 자신과의 연결보다 사회와 연결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교우관계, 학업, 진로와 같은 성취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자기와의 연결'을 논할 재료가 아직 없다. 따라서 이런 전반기의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의미나 통찰, 내면에 대한 알아차림이 아니다. 그보다는 관계나 학업, 진로에 있어서 얼마나 성공적인 경험을 했는가에 따라 삶의 질과 정신건강이 좌우된다. 좋은 경험을 많이 하는 것, 행동으로 옮겨보고 직접 부딪쳐보는 것이 관건이다. 따라서 10대, 20대의 신경증은, 잘하고 싶은 욕심만 크고 실제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나 역량이 없는 경우에 종종 일어난다.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거짓말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자해, 자살시도 등 과격한 증상으로 문제 행동을 일삼던 친구들이 학교를 바꾸거나 자기가 잘할 수 있는 환경으로 옮겨가면 완전히 모범생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만큼 성취는 중요한 주제다. 그걸 인정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전반기의 젊은이들에게 “너는 소중해, 있는 그대로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후반기의 룰

 

반면 개인차는 좀 있지만 대체로 40대 중후반에 접어들면 자기통합의 과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살아온 것들에서 자기인 것과 자기가 아닌 것을 슬슬 구별하면서 자기에게 좀 더 진실해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과제를 치르면서 어떤 이는 뜻하지 않게 외도를 하거나 일탈 행동을 하기도 한다. 직업을 바꾸거나 공부를 다시 하거나 느닷없이 해외로 가기도 한다. 안 하던 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서 돈을 다 잃거나 이상한 취미나 종교에 빠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시절 억압했거나 은폐했던 주제들이 부메랑처럼 귀환하는 시기다. 무의식의 힘에 압도되어 한없는 공포로 자아가 와해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던 가면과 액세서리들을 떨구고 맨얼굴로 돌아가 진정한 자기로 살아가는 수순을 밟게 되기도 한다. 

 

성취와 통합

 

전반기의 테마가 성취의 즐거움이라면, 후반기의 테마는 통합의 환희다. 전반기에 성취를 충분히 해야, 후반기의 통합도 잘 이루어진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꿈을 포기하고 과제를 미루고 결국 우울, 불안 등의 증상 뒤에 숨는 젊은이들을 제법 많이 만난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을 속이지 말라. 잘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용기다. 그래야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반면 후반기의 사람이 계속 성취, 성취만 외치다가 각종 불안 장애와 공황장애로 이어지는 경우도 제법 많이 보는데, 그 경우에는 "그림자를 보라"고 한다. 접근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자기가 던진 부메랑을 받아야 하는 게 후반기의 과제다. 어떻게 받아야 할까? 힘을 빼고 받아야 한다. 반면 전반기에는 있는 힘껏 던져야 한다. 룰이 완전히 다르다.

 

진실은 귀환한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 한때 버려둔 진실이 귀환했을 때 우리는 현기증을 느끼거나 멀미, 두통, 구역질을 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진실의 힘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칼 융은 이런 험난한 고통의 순간이 자기통합을 위해 필수적인 경험이라 보았다. 우리 삶의 절반, 젊은 시기는 바깥세상에 적응하고 연결되기 위해, 중년 이후 나머지 절반은 내면세계에 적응하고 연결되기 위해 쓰인다. 모든 신경증적 고통은 완전한 자기, 전일성,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 존재하기 위해 있다. 파열, 분열 없이는 통합과 합일이 없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깊이 연결되는 경험은 반드시 공포와 시련, 일탈과 불안을 동반하며 그 작업이 잘 되었을 때, 삶의 미스터리를 풀어낸 자가 느끼는 희열, 평안, 기쁨을 누린다. 삶은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완전체로 향하는 여정이고 모든 경험은 생성과 탄생의 재료가 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Writer Avatar

변지영

작가, 임상·상담심리학 박사. 『순간의 빛일지라도, 우리는 무한』 『우울함이 아니라 지루함입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나에게』 『내 마음을 읽는 시간』 등을 썼다.

Writer Avatar

이부영

서울대 의대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수련을 시작했다. 그 뒤 스위스 취리히에 가서 1966년 융연구소를 수료, 융학파 분석가 자격을 취득하고 국제분석심리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독일과 스위스 등 각지 정신병원에서 수련 및 근무했으며, 귀국 후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 신경정신과장 등을 지냈다. 그 밖에 미국 하와이 동서센터 ‘문화와 정신건강연구계획’ 초빙연구원,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 ‘정신의학과 종교 강좌’ 석좌교수를 지냈다. 1997년 서울대 정년퇴임 후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으며, 분석심리학 전문수련기관인 한국융연구원을 설립 운영 중이다. 대한의학회에서 주는 분쉬의학상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한길사에서 펴낸 ‘분석심리학 탐구 3부작’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을 비롯해 『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노자와 융: 『도덕경』의 분석심리학적 해석』이 있다. 그 외에 『분석심리학: C.G. Jung의 인간심성론』 『한국민담의 심층분석: 분석심리학적 접근』 『분석심리학 이야기』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융 기본 저작집』(C.G. 융, 전 9권, 감수 및 공역), 『현대의 신화』(C.G. 융), 『인간과 상징』(C.G. 융, 공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아니엘리 야훼), 『C.G. 융 우리시대, 그의 신화』(M.L. 폰 프란츠), 『민담의 심리학적 해석』(M.L. 폰 프란츠, 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