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 특집] 한여진 "좌절은 나를 백지 앞으로 또 데려갑니다"
한여진 작가의 ‘처음과 시작’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글 : 채널예스
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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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젊은 작가 특집

예스24는 매년 한국 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를 찾습니다. 올해는 20명의 작가를 후보로 6월 18일부터 7월 15일까지 투표를 진행합니다. 젊은 작가 20인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 볼까요?



작가님의 기억 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첫 책은 무엇인가요?

에리히 캐스트너가 쓴 『내가 어렸을 때에』라는 책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도 읽었고 스스로 어리지 않다고 생각할 때에도 읽었어요. 어린 에리히는 석유통과 빵을 들고 독일의 드레스덴 거리를 뛰어다니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똑같은 크기의 사랑을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우스꽝스러운 어른들을 이해하기 위해 바쁜 날들을 보냅니다. 책을 읽으며 언젠가는 나도 기억 속에서 타인의 마음을 더듬고 이야기를 깁는 사람이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과거로 기어코 다시 돌아가게 하는 힘.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사람을 곱씹고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던 마음을 깨닫는 순간 미래가 오는 게 아닐까요. 


달력이 정직하게 말한다. "그 뒤로 50년도 더 흘렀다." ... 기억이 소리치며 곱슬머리를 흔든다. "그건 바로 어제였어! 아니면 기껏해야 그제였던가." (내가 어렸을 때에 중에서)

 

첫 책을 출간하기 전에도 많은 이야기를 써오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최초의 습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다시 어렸을 때 일입니다. 먼 친척 집에 잠시 얹혀산 적이 있어요. 오래된 그 집 벽은 누수로 인한 얼룩과 곰팡이로 가득했는데 그것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왠지 자꾸 자라는 것 같기도 하고, 밤에 요를 깔고 누우면 얼룩이 내 몸에 올라타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얼룩 생각을 안 하려고 열심히 가상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어느 날은 벌떡 일어나 스쳐 지나간 생각들을 짧은 문장으로 옮겨 적었는데 돌이켜보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썼던 것 같아요. 사방이 고요하다, 라고 시작되는 문장이었는데 바다에 빠진 열쇠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에 대한 글이었어요. 돌이켜보면 그건 시나 소설, 일기보다는 얼룩 같아요. 얼룩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되었지만 스스로 자라난 얼룩이요. 

 

습작과 출간의 큰 차이 중 하나는 독자가 있다는 점 같습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독자와의 첫 접촉의 순간이 궁금합니다. 

낭독회에서 오래된 주택복권을 건네주셨던 독자분이 기억납니다. 제968회 주택복권은 1996년 7월 21일에 추첨을 하였고 1등은 1억 5천만 원이었어요. 물론 복권은 '꽝'이었지만 그분은 행운의 상징으로 들고 다니셨대요. 퇴근길에 복권을 사고 잠시나마 오색찬란한 꿈을 꾸었을 누군가가 있었겠지요. 결코 오지 않는 행운에 그러면 그렇지 읊조리고 무심하게 책갈피로 썼을 누군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책을 뒤적이다 복권을 발견하고 예전의 마음을 떠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복권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부여됩니다. 지나고 보니 잘 버텨왔던 날들에 대한 행운을 상징하는 거지요. 그러니 어쩌면 오래된 복권은 모두 당첨된 복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으로 저는 독자분이 주신 968회 주택복권을 다이어리에 끼워두고 가끔 들여다봐요.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한 분들에게 가장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내가 포착해내고 싶었던 순간은 이미 누군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문장으로 구현하였고 내가 그리고 싶었던 세계는 이미 어딘가에서 바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읽은 글들과 내가 쓴 글들은 서로 점점 더 멀어집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좌절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어제 쓴 글들을 오늘 아침에도 지웠다면 어머, 저도 그렇답니다, 반갑습니다. 하지만 그 좌절은 결국 나를 백지 앞으로 또 데려갑니다. 며칠 뒤 혹은 몇 십 년 뒤에도요. 읽는 사람은 언젠가 결국 쓰는 사람이 된다고 믿습니다. 다들 자기만의 이야기를 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당신의 독자들을 위해 좌절하면서 계속 써주세요. 

 

지금까지 출간한 작품 중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꾸만 되돌아가게 되는 인물이나 작품이 있나요?

검은 솥에 대한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시집의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에 등장합니다. 발표하진 않았지만 그 뒤로도 솥이 등장하는 시들을 썼습니다. 시 속에서 저는 솥을 이고 지고 살고 있고 솥 바닥에서 검은 뼈를 발견하고 입맛을 다시기도 합니다. 아직도 솥과 한바탕 놀고 있는 중입니다. 

 

언젠가 꼭 한 번 다뤄보고 싶은 소재나 인물이 있나요?

요즘은 사랑과 증오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흔히들 반대되는 다른 두 성질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건 사랑 안에도 실오라기 같은 증오가 있고 증오 안에도 유백 같은 사랑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혐오 기반의 정치를 내세우는 이준석씨의 어머니가 그의 유세현장에서 눈물로 지지를 호소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 큰 아들의 생활을 걱정하는 그 어머니의 마음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았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처럼 깊고 넓겠지요.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처럼 어딘가 일그러져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아들을 살리기도 하겠지만 죽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 일그러진 사랑, 그래서 원래 사랑의 형태에서는 한참 벗어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랑에 대해 자꾸 생각합니다. 자꾸 생각하다 보니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만약 평행 우주에서 작가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직업을 갖고 싶으신가요?

먼저 평행세계에서도 직업에 시달려야 하는 인류에게 작은 위로를. 동네 공원에서 장기 두는 노인들을 본 적 있어요. 가로 열 줄, 세로 아홉 줄의 말판에서 초나라와 한나라가 대치 중이었습니다. 그 순간 가장 고요하고 가장 치열한 세계가 거기 있었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훈수를 두어도 장기판에 앉은 두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순간을 가져보고 싶어요. 프로 기사가 되어 기물들하고 한바탕 놀고 난 뒤 보는 세상은 어떨까요.

 

인류 멸망을 앞두고 지하 벙커에 도서관을 지을 예정입니다. 딱 세 권의 책을 보관할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고르시겠습니까?

사실 저는 1999년 12월 31일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에게 끝이 있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한낱 한시에 이곳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다면 남아 있는 자의 슬픔도 없겠지요. 하지만 남겨야 할 책은 많습니다. 세 권이라니, 도서관을 조금 더 크게 지으면 어떨까요. 


1. 사노 요코 『100만 번 산 고양이』

여기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고양이가 있습니다. 이 고양이를 모두가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2.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모든 슬픔과 아픔은 어쩌면 우리 안에 사랑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넘치다 못해 줄줄 흐르는 사랑을 들고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른 채 살아요. 그래서 사랑을 자주 잊는데, 그럴 때 우리에겐 소설이 있지요. 출퇴근길에 이 소설을 조금씩 읽어 나가다 마지막 장을 덮던 날 버스에서 엉엉 소리를 내며 울던 기억이 납니다. 부끄럽지만 아주 시원했고 집에 도착하니 그날 낮에 미워했던 사람들(일터의 사람들이지요.)에 대한 마음이 살짝 가벼워졌어요. 

 

3. 아카세가와 겐페이 『초예술 토머슨』

열리지 않는 문,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계단,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공간들이 있습니다. 또 그것들을 기어코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예술적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인간이 얼마나 유쾌하고 엉뚱한지 이 책을 통해 남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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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에

<에리히 캐스트너> 저/<호르스트 렘케> 그림/<장영은> 역

출판사 | 시공주니어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노 요코> 글,그림/<김난주> 역

출판사 | 비룡소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저/<민은영> 역

출판사 | 문학동네

초예술 토머슨

<아카세가와 겐페이> 저/<서하나> 역

출판사 | 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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