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24 큐레이션] 책을 담아내는 그릇, 판형
북디자이너 박연미가 아름다운 물성을 가진 책을 소개합니다. 독자와 책의 관계를 좌우하는 기본 요소, 판형으로 읽은 두 권의 책.
글 : 박연미 사진 : 박연미
2025.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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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서점에 들르면, 대개 부담 없이 집어 들고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게 된다. 수년 전 부산 기장에 위치한 서점 이터널저니에서 인생책이라고 꼽을 만한 책을 만났다. 바로 『This is Mars』. NASA가 촬영한 고해상도 화성 위성 사진을 담은 대형 사진집이다. 크기와 무게 탓에 들고 보기 어려워, 매대 위에 펼쳐 놓은 채 감상했다. (302x300mm) 흑백으로 그려진 매혹적인 추상화 같은 화성 사진에 넋을 잃었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하진 못했다. 워낙 크고 무거워 망설이다 결국 그냥 돌아섰다. 이후에도 이 책이 자꾸 마음에 남아, 결국 온라인 서점을 통해 몇 번의 클릭 끝에 손에 넣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이 책을 보여주고 싶은 순간이 종종 있다. 하지만 가방에 넣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어 아직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집에 잘 모셔두었다. 꽂지 않고 눕혀 놓은, 자주 펼쳐 보지는 않는 이 큰 책은 사실 존재만으로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 

 

책의 물성을 이루는 가장 기본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판형이다. 겉보기엔 단순히 책의 크기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책의 성격을 만들고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독자가 책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좌우하는 요소다. 그래서 북디자이너가 작업에 돌입하면서 가장 먼저 고려하는 부분도 바로 판형이다.

 


『우아한 언어』

박선아 저 | 신신 디자인 | 위즈덤하우스

 

박선아 작가의 『우아한 언어』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온라인에서 이미지로 접했을 땐 이렇게 작은 책일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요즘 책의 크기가 점차 작아지는 추세이긴 하나 이 책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 인상은 작아도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96x144mm) 수치만으로는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지만, 성인 여성 손바닥만 한 크기다. (사실 이 표현조차도 실제보다 다소 크게 느껴진다.) 손에 쥐어 보면 손보다도 작게 보인다. 첫인상은 왠지 모르게 옹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책의 첫 글 ‘작은 카메라로 충분할까’를 읽기 시작하며, 이 미스테리한 판형에 대한 오해가 이해로 바뀌었다. 일회용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이야기가 이 글에 담겨 있고 똑딱이 작은 카메라처럼 작게 만들었구나 싶었다. 그러다 이 책의 양장 커버 위로 인화 사진의 기본 사이즈인 4x6인치 사진을 놓으니 그 크기가 꼭 맞다. 이 작은 크기는 단순한 디자인적 선택이 아닌 셈이다. 

 

작가가 ‘우아한 언어’라 생각하는 사진을 둘러싼 이야기답게, 책 속에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텍스트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광택 없는 종이에 인쇄된 글을 읽다가, 반짝이는 유광 종이에 담긴 사진을 마주하면 마치 실제 인화 사진을 넘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책의 크기와 종이의 질감이 내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작은 책이 가진 물성이 이야기를 어떻게 뒷받침하는지, 그리고 독자가 그 안에서 어떤 경험을 얻게 되는지는 직접 손에 쥐고 펼쳐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먼 산의 기억』

오르한 파묵 저 | 이난아 옮김 | 최정은 디자인 | 민음사

 

반면, 오르한 파묵의 『먼 산의 기억』은 요즘 보기 드문 큰 판형의 책이다. (160x260mm) 작가가 14년간 몰스킨 수첩에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린 수천 페이지를 엄선하여 엮은 책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 이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메모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연필로 그린 그림에 어린아이처럼 색칠하곤 했다고 한다. 수첩의 펼친 면에는 글과 그림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책에서는 원본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번역된 텍스트가 함께 배치되어 있다. 독자는 작가가 남긴 원문과 번역을 나란히 보며 그의 문학적, 예술적 사유를 따라갈 수 있다. 이러한 구성 덕분에 넓고 시원한 판형이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일반적인 크기의 판형을 택했다면, 원본 이미지와 텍스트를 (페이지를 나눠) 동시에 감상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책의 페이지마다 여백의 크기와 형태가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저마다의 리듬이 느껴진다. 사철반양장 제본으로 제작되어, 양장본의 무게는 덜면서도 원본 수첩의 펼침 상태를 자연스럽게 구현했다. 덕분에 책상 위에 펼쳐 두고 읽기에 적합하다.

 

책이 크다 보니 들고 다니며 읽게 되지는 않는다. 덕분인지 생각날 때마다 천천히 한 장 한 장 아껴 읽고 있다. 보통은 모두가 잠든 시간에 스탠드 조명 아래, 다재다능한 작가의 매혹적인 내면세계를 들여다본다. 원래 남이 쓴 일기는 혼자 몰래 봐야 더 재미있는 법이다. 물론 무언가 한 잔을 곁들여서. 


 

 『This is Mars』의 midi 에디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끼는 사람에게 선물로 건넸다. 아무리 좋아하는 책이라도 오리지널 대형본을 선물하기에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스러웠을 텐데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180x236mm) 오리지널이 가진 아름다움은 유지하고 휴대에 부담을 줄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중 고르라면 나는 여전히 오리지널 본이다. 화성의 골짜기는 크게 봐야 감동이 더 크다. 

 

책이 크든 작든, 가볍든 무겁든, 제작비가 절감된 것이든 아니든, 판형은 책의 내용과 독서 경험을 잇는 첫 단계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크기의 책들이지만, 그 속에는 책을 만든 이들의 깊은 고민과 섬세한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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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언어

<박선아>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먼 산의 기억

<오르한 파묵> 저/<이난아> 역

출판사 | 민음사

This is Mars

Xavier Barral

출판사 | Thames & Hu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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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미

민음사에서 북디자이너로 근무했고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중이다. <릿터>, 『밀란쿤데라 전집』, 『레닌 전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감옥의 몽상』 『돌봄과 작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등 소설, 에세이, 인문,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디자인하고 있다. 2022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수여하는 제52회 한국출판공로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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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현대 터키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이다. 1952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부유한 대가족 속에서 성장했다. 이스탄불의 명문 고등학교인 로버트 칼리지를 졸업한 후 이스탄불 공과대학에서 3년간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건축가나 화가가 되려는 생각을 접고 자퇴했다. 23세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7년 후 1982년 첫 소설 『제브데트 씨의 아들들』을 출간하여 오르한 케말 소설상과 밀리예트 문학상을 받았으며, 다음해에 출간한 『고요한 집』 역시 '마다마르 소설상'과 프랑스에서 주는 '1991년 유럽 발견상'을 받았다. 또한 1985년 출간한 세 번째 소설 『하얀 성』으로 "동양에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는 뉴욕타임스 격찬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의 방문교수로 지내면서 대부분을 집필한 『검은 책』(1990)은 '프랑스 문화상'을 받았으며, 이 소설을 통해 파묵은 대중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작가로 터키와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1994년 출간된 『새로운 인생』은 터키 문학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내 이름은 빨강』(1998)은 현재까지 35개국에서 출간되었고, 이 작품으로 프랑스 '최우수 외국 문학상'(2002), 이탈리아 '그란차네 카보우르 상'(2003),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2003) 등을 수상하였다. 또한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 정치 소설'이라 밝힌 『눈』(2002)을 통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소설을 실험했다. 2003년에는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도시 그리고 추억』을 발표했다. 문명 간의 충돌, 이슬람과 세속화된 민족주의 간의 관계 등을 주제로 작품을 써 온 파묵은 2006년에는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검은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 밖에 2005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평화상'과 프랑스 '메디치 상'을 수상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처음 발표한 『순수 박물관』(2008)은 파묵 특유의 문체와 서술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주제에 접근하였다. 그의 지독하고 처절한 사랑 이야기는 전 세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출간되는 모든 나라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2012년 4월에는 이스탄불에 실제 ‘순수 박물관’을 개관해 문학의 확장성을 증명했다. 2006년부터 컬럼비아 대학에서 비교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으며, 호르헤 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 움베르토 에코의 뒤를 이어 하버드 대학 ‘찰스 엘리엇 노턴’ 강의를 맡은 후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2010)를 출간했다. 최근 국내 출간 도서로 에세이 『다른 색들』(2006) 소설 『내 마음의 낯섦』(2014) 『빨강 머리 여인』(201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