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 콘텐츠 퍼블리싱 플랫폼 브런치스토리에서 개최한 제12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소설 부문 대상작 『과잉 무지개』가 출간되었다.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상을 차지한 『과잉 무지개』는 “흥미로운 설정과 섬세한 감정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작가의 독창성과 문학적 잠재력이 기대된다”고 평가해 자음과모음이 선택한 소설이다. 인생을 걸고 모종의 계약을 하는 소설 속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서 있는 저마다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인생의 험난한 지점을 겪고 있다면, 쉼 없이 달려오느라 번아웃이 찾아왔다면, 곁에 있는 누군가를 잃어봤다면, 긍정적인 에너지보다 부정적인 기운이 크게 느껴진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장담하건대 이 소설의 끝에서 마주할 나는 작지만 분명한 미소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조도는 미래를 밝힐, 즉 내일을 기대할 힘이 된다. 지금 내 삶에 주어진 빛의 밝기가 낮다면 우리는 당장을 비출 스위치도 찾지 못한다. 단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려운 어둠 속에 오늘을 잠식당한 이들이 있다면, 이 작은 책으로 발끝을 비춰주고 싶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작 『과잉 무지개』 출간 소감이 어떠신가요?
칠 년 전, 글을 쓰겠다는 마음 하나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당시 저는 이십대의 시간을 단지 ‘준비’로 채우고 싶지 않았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낸 날들이, 훗날 돌아보았을 때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일을 그만두는 게 우선이었죠. 그렇게 1인 출판사를 차리고, 지인의 도움으로 작은 책 한 권을 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책은 200부 모두 판매되었어요. 처음부터 수익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덕에 응원의 마음으로 많은 분이 손을 내밀어주신 것 같아요. 책을 읽은 누군가가 제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첫 책은 무슨 말을 썼든 다들 예쁘게 봐줘. 하지만 두 번째 책부터는 달라. 정말 작가로 인정받고 싶다면 배움이 필요할 거야.”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책을 자주 읽는 사람도 아니었고, 관련 학과를 나온 것도 아니며,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저 혼자 생각을 쓰는 걸 좋아했을 뿐이었죠. 그 말을 듣고 다짐했습니다. 나만의 방식으로 글을 배우자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경비를 모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듣고 경험을 쌓았습니다. 무작정 서점에 들러 고전문학 서가 앞에 서서 책 뒤표지를 읽어보고, ‘권장 도서’ ‘추천 도서’라는 말이 붙은 외국 작가들의 책을 사 읽기 시작했어요. 낯선 언어로 쓰인 글들이 번역되어 제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글들은 어떤 글일까, 그런 궁금증이 저를 계속 책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읽고 또 읽으며 제가 좋아하는 글의 결을 알아가게 되었고, 점점 제 글의 형태도 갖추어졌습니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책을 모조리 읽어나갔고, 그 과정에서 제 언어를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지금도 여전히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며 글을 씁니다. 그리고 이렇게 긴 질문에 답하듯 써 내려간 글을 다시 읽어보니, 처음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의 감정으로 돌아가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아마도 이 책은 그 다짐에 대한 오랜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저를 통해 그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오래전 품었던 다짐을 잊지 않고, 다시금 선명히 떠올릴 수 있어 기쁩니다.
‘과잉 무지개’가 갖는 의미, 이를 제목으로 쓰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무지개’였습니다. 어릴 적 무지개를 처음 보았던 순간을 떠올리면 언제나 기분이 좋아졌거든요. 쉽게 볼 수 없는 현상이기에 무지개를 마주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왠지 내가 더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였을까요. 무지개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 검색하던 중 ‘과잉 무지개’라는 용어를 발견했습니다. 여러 개의 무지개가 겹쳐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실제 기상 용어였습니다. 그 뜻을 읽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무지개를 한 번에 본다는 건 정말 특별하고 귀한 일이겠구나.’ 그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주인공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슬프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에게 그런 특별한 일이 한 번쯤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죠. 아니, 어쩌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의 마음 어딘가에 언젠가 같은 무지개를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하나만 있어도, 그것이 삶을 지탱해줄 힘이 되지 않을까, 그런 바람이었습니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건 크고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어쩌면 일상의 흐름 속에 문득 마주치는 아주 사소한 순간들일지도 모르니까요.
소설에는 ‘죽음을 조력하는 단체’가 등장합니다. 「작가의 말」을 통해 힘들었던 시절 떠올린 이야기라고 하셨는데, 이런 단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기쁜 일들이 한꺼번에 찾아올 때 우리는 그 순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라는 질문보다 온 마음으로 그 기쁨을 만끽하죠. 하지만 반대로 힘든 일들이 연달아 닥쳐올 때면 같은 질문을 끝없이 반복합니다. 저 역시 그런 시기를 지나며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제가 붙들 수 있었던 말은 하나였어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 믿음 하나로 마음을 다잡으며 견뎠고, 그렇게 버텨낸 시간 끝에서 『과잉 무지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설 속엔 이런 문장을 적어두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포기할 줄 아는 마음 역시 중요하다.” 포기란 무조건적인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을 위한 용기일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런 단체가 존재하고, 주인공처럼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선택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가장 나은 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그렇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포기’라는 마음이 곧 종말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시작을 향한 발걸음이 되기를. 그런 마음이 이 소설 속에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이들의 마음에도 닿기를 바랍니다.
행복과 불행은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작가님에게 있어 행복의 기준과 불행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어릴 적, 제가 살던 집에는 케이블 방송이 나오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들끼리 모이면 대화 주제는 늘 비슷했죠. 어제 본 만화 이야기, 다음 줄거리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 하지만 저는 그런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한 채 늘 겉돌기만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주말이면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몇 개 안 되던 공중파 채널을 끊임없이 돌려보곤 했습니다. 어차피 새로운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그런 시간이 반복될수록 저는 스스로를 불행한 아이로 여기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집에 케이블 방송이 설치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순간, 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보고 싶어 애타게 기다렸던 프로그램들도, 어느 순간 예전만큼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된 까닭이었어요.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 우리는 휴대폰 하나로도 수많은 콘텐츠를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나날이지만, 이 또한 특별하게 느껴지진 않습니다. 너무 쉽게 손에 들어오기에, 너무 당연해졌기에 그렇겠지요. 그래서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어쩌면 별개의 감정이 아니라 공존하는 무언가가 아닐까. ‘당연함’으로 인식되는 순간, 행복은 순식간에 무감각한 일상이 되고, 반대로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한때 불행하게 여겨졌던 기억조차 다시 행복의 얼굴로 떠오를 수 있는 건 아닐까.
소설은 여러 방식으로 ‘보통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평범함이 곧 특별함이라고 일컫는 주인공의 마음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신다면요?
준재는 자신이 마주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한 단체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며 보내는 백 일의 시간. 하지만 그 시간은 오히려 그에게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일깨워주지요. 준재는 마음 한 편에 이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더는 물러설 곳도, 앞으로 나아갈 힘도 없다고. 하지만 그가 마침내 마주한 진실은, 자신이 만든 ‘불행’이라는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어쩌면 준재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단체의 도움도, 거창한 구원도 아닌, 무너진 장난감 블록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쌓아 올리듯, ‘괜찮아. 다시 시작해도 돼’ 조심스럽게 건네는 그런 작고도 따뜻한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매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타인의 사소한 배려와 친절한 말 한마디를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진짜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준재는 역설적으로도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겠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불행에서 허우적대며 죽음에 다가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이런 말을 전하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힘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버거운 말로 다가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전하고 싶은 말은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불행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저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나를 죽음으로 이끌던 그 순간들이 되레 삶을 끌어올리는 힘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렇게 조심스레 쌓아 올린 시간들 앞에는, 어느 날엔가 있는 힘껏 마주해야 할 ‘진짜 행복’이 분명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더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이 책을 읽은 또는 읽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면 표현해주세요.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 있어요. ‘보통’이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저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조차 어쩌면 욕심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만큼 우리의 삶은 치열하고, 비교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일상이 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전하고 싶은 마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보통’이라는 기준이 타인이 아닌, 오직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힘에 부칠 때도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불쑥 밀려오는 날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안고 살아가는 오늘이 저에게는 ‘보통의 하루’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을 보태어 말하자면, 이 책을 읽은 혹은 읽을 독자 여러분의 오늘이 ‘보통’이라는 이름 아래 조금 더 나은 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과잉 무지개
출판사 | 자음과모음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