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학자와 교사, 시민들이 10년 넘게 머리를 맞대고 만든 책이 있다. 제목부터 화합과 공존을 모색하는 『평화를 여는 역사』이다. 세 나라가 한 권의 역사책을 함께 쓰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각국의 역사 인식 차이, 갈등과 혐오가 여전한 오늘의 현실까지…. 불편할 수 있는 진실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함께 읽을 수 있는 역사’를 만들자는 오랜 약속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다.
국수주의와 혐오, 극우적 시선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요즘, 이 책은 과거를 함께 돌아보며 미래를 위한 대화를 시작하자는 조용한 제안이다. 『평화를 여는 역사』 필자들을 대표하여 한국위원회 위원장인 김성보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동아시아 공동역사교재 편찬을 2002년부터 이어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중·일 세 나라가 왜 ‘공동의 역사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셨나요?
2001년에 제작되어 그 이듬해 시중에 배포된 일본 후소샤(扶桑社) 출판사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 출판이 그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 교과서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노골적으로 정당화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런 책으로 일본 청소년들이 역사교육을 받는다면, 과거의 잘못을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침략과 전쟁의 역사에서 오히려 긍지를 느끼게 되겠지요.
한국의 학자와 시민들은 후소샤 교과서 채택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이를 계기로 86개의 시민단체와 학계가 모여 ‘일본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지금의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를 결성했습니다. 이 반대운동에 일본의 양심적인 교육자와 시민들도 함께 했고, 결국 일본의 교육 현장에서 후소샤 교과서의 채택율은 0.039퍼센트에 머물렀습니다.
후소샤 교과서를 비판한 것은 단지 민족적 감정 때문만은 아닙니다. 침략과 전쟁, 인권 탄압으로 얼룩진 과거의 역사를 철저히 반성하지 않는 한, 동아시아에 평화와 인권이 보장되는 미래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미래는 한국이 홀로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이웃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시민 모두가 힘을 합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힘을 합치려면 생각이 합치해야 합니다. 2002년부터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담은 공동의 역사책을 만들어온 이유입니다.
한·중·일 3국이 공동역사교재를 만드는 일이란 그 의미가 특별하고 상징적이면서도, 실제 진행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은데요. 『평화를 여는 역사』가 막 출간된 이 시점에서, 그간의 과정을 돌이켜볼 때 소회가 궁금합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셔도 좋고요.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에서 3국 간의 쟁점을 파악하고 토론을 하면 할수록 새로운 쟁점이 또 생겨나니, 책을 낼 때마다 편찬 기간은 더 길어졌습니다. 3국의 언어가 다르니 일일이 통역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번역과정에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얼굴을 맞대고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토론하다 보면, 서로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3국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참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었지요. 『평화를 여는 역사』를 펴내는 데 만 10년이나 걸린 이유는 쟁점을 무려 36개나 다루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거의 3년간 직접 대면하지 못하게 된 탓이기도 합니다. 줌과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화상회의를 할 수는 있었지만, 어딘가 부족한, 논의가 겉도는 느낌을 종종 받았습니다. 시간에 쫒겨서, 또는 더 이상 논의가 깊이 진전되지 않고 겉돌 때는 이제 그만 타협하고 정리할까 하다가도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집요하게 한 문제 한 문제를 짚어가는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2002년 첫 책을 위한 논의를 시작한 이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중년이던 분은 반백의 노년에 접어들었고 세상을 떠난 분들도 있습니다. 20여 년 전에는 동아시아 3국, 그리고 남북한이 갈등을 넘어(비록 유럽처럼은 아니겠지만) 공동체를 이루는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3국 간에, 그리고 각국 안에서 SNS 등을 통해 정제되지 않은 온갖 갈등과 혐오의 감정이 넘쳐나고 있어요. 그럴수록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도 공존·공생을 위한 공통의 역사의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더욱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를 여는 역사』는 『미래를 여는 역사』, 『한중일이 함께 쓴 근현대사 1·2』에 이어 세 번째로 발간하시는 책이죠. 앞서 소회를 들으니 두 번의 작업도 대단히 힘들었을 것 같은데, 세 번째 책을 내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번 책은 지난 책들과 어떤 점이 다른지도요.
두 번째 책 『한중일이 함께 쓴 근현대사 1·2』을 출간한 뒤에 자체 평가와 함께 외부 의견을 두루 들으면서, 앞선 두 책과는 다른, 아예 새로운 자세로 새로운 책을 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열린 글쓰기’의 필요성이었습니다. 미리 정해 놓은 결론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것은 필자의 관점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 다음 그 답이 무엇인지 독자와 함께 고민하며 독자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필자와 독자의 대화형 글쓰기를 시도해보고자 했지요.
둘째,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 문제만 아니라 오늘날 동아시아가 직면한 ‘현재의 문제’들을 함께 고민할 필요성이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군사·정치·경제적인 갈등은 단지 제국주의-식민지 시기의 유산이 아니라 거기에 미국과 소련이 개입하며 생겨난 냉전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이 두 유산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미-중 갈등을 축으로 한 오늘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현대사 서술의 비중이 커졌습니다.
셋째, 오늘날 동아시아의 청소년들은 교육, 환경, 안전, 젠더 문제 등 생활상의 문제를 기성세대보다 더욱 예민하게 생각하며 고민합니다. 이 문제들은 과연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 그 해답은 무엇인지 찾아보는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때 비로소 청소년이 역사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평화는 정치·군사적인 거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피부에 와닿는 생활상의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지요.
‘열린 글쓰기’ 방식, 과거와 현재 문제의 상호 연관성 이해, 생활상의 문제 중심 서술, 이 세 가지가 세 번째 책을 내기로 한 이유이자 책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욕심이 많다 보니 쟁점이 36개가 되었네요.
이번 책의 큰 특징은 앞선 책들의 집필 과정에서 논쟁이 많았던 주제, 현재까지 역사적 분쟁의 중심에 있고 영향력이 큰 문제, 독자의 관심이 높은 사건 들을 위주로 다뤘다는 점이죠. 특히 3국 간 의견 차이가 컸다거나 논의 과정이 치열했던 주제가 있었는지, 독자 입장에서 궁금합니다. 혹은 논쟁 끝에도 3국이 합의해나갈 수 있었던 대화의 원칙이 있으셨는지요.
『평화를 여는 역사』를 펴내면서 편찬위원들은 쟁점이 있을 때 적당히 타협하기보다는 생각의 차이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엄밀하게 토론해 합의한 내용을 서술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쟁점으로 남는 부분이 있다면 각국의 의견을 함께 나란히 적기로 했지요. 아울러 유연성 있게 각국에서 필요하다면 각주에 보충 설명 방식으로 강조점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게 했습니다. 실제 쟁점을 합의하지 못해 각국 의견을 함께 적은 것은 없지만, 각주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는데, 부마다 크게 충돌했던 주제가 있었습니다. 제1부 「동아시아의 변동과 근대화」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면서 일본군이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운 사실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첫 원고에는 일본군의 만행이 이미 동학농민군을 대상으로 한 학살에서 확인되며 타이완을 거쳐 중일전쟁 때의 ‘3광작전(죽이고 부수고 태우기)’으로 반복되었다고 서술했으나, 시기를 달리하는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 일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박이 있어 결국 생략되었습니다. 일본의 침략 방식의 일관성과 성격 변화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제2부 「두 번의 세계대전과 동아시아」에서는 항일전쟁 시 중국 팔로군의 활동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점이 논점이 되었으나 오랜 토론을 거쳐 좀 더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이 강화되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3부 「현대 세계와 동아시아」에서는 동아시아에 미군기지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에서 의견 차이가 컸습니다. 냉전 이후에도 동아시아에 미군이 주둔하는 이유는 오직 중국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중국 측의 견해였습니다. 이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한국과 일본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유지하며 미군을 주둔하게 하는 주요 이유는 북한의 핵무기 위협 때문이기도 하다는 점을 함께 서술해 오늘날 동아시아 군사 갈등의 복잡성을 균형감 있게 서술했습니다.
이 책에서 최대의 난점은 글이 아니라 지도였습니다. 독도나 댜오이다오(또는 센카쿠 열도) 등 영유권 주장이 어긋나는 곳들을 지도에 어떻게 표시할지는 너무나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영토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지도를 사용했습니다.
『평화를 여는 역사』를 어떤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주길 바라고 계신가요?
『평화를 여는 역사』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만들어갈 청소년들을 주요 독자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역사와 평화 수업을 받으면서 교사와 함께 토론하고 대화할 교재로 활용하도록, 그리고 이웃 중국과 일본, 타이완 등의 동아시아 청소년들과 교류를 할 때 참고 자료로 활용하기를 기대합니다.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가 지방자치단체 등과 협력하며 진행하는 ‘청소년역사체험캠프’에서는 참가자들이 이 책을 읽고 토론할 뿐만 아니라 이를 참고로 스스로 역사 교재를 함께 만들어보도록 권할 예정입니다.
이 책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다루면서 다양한 자료와 사진들을 배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시민과 연구자들에게도 크게 참고가 될 수 있으며, 동아시아의 상호 교류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과 영상물을 제작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동아시아 3국은 여전히 역사 인식, 영토 분쟁, 상대국 현실에 대한 인식 차이 등으로 복잡하고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역사를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교류를 통해 3국의 시민들이 서로에게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지혜의 거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역사는 지혜의 거울이 아니라 상호 혐오와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기 일쑤입니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온갖 거짓이거나 왜곡된 정보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통되며 증오의 감정을 부추깁니다. 심지어 과거에 대한 기억이 정쟁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를 시민의 힘으로 멈추어야 합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비판할 것은 철저히 비판하고, 반성할 것은 심중하게 반성하며, 소중한 것은 참으로 소중히 계승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성을 알되 국가를 넘어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동아시아 시민, 세계 시민이 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러시아-우크라이나 등 세계 도처에서 갈등과 반목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공동의 역사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민간 단위에서 이루어진 3국 공동역사교재의 성과는 무엇이고, 이후 어떻게 지속하고 연결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갈등과 반목을 지켜보면서 갈등 당사자 간 공동의 역사의식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오랜 공존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서아시아의 역사는 다양한 종족과 종교가 충돌하면서도 화해와 공생의 길을 찾아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다시 조명하며 공동의 역사의식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그곳에서도 없지 않았겠으나 그 성과가 공동의 책으로 출간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크라이나의 대기근 등 소련 시절의 상처가 아직도 제대로 구명되지 않았지만, 공존의 역사 또한 함께 존재합니다.
그에 비하면 동아시아에서는 비록 공식 교과서는 아니지만 민간 단위에서 3국간 공동의 역사서를 20여 년간 꾸준히 만들어왔고, 이제는 그 작업 자체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작지만 뜻깊은 하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침략과 전쟁의 역사만 아니라 그 갈등을 뛰어넘어 평화와 인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무수한 경험이 축적되어 왔습니다.
『평화를 여는 역사』에는 누구나 다 알만한 쟁쟁한 정치인보다는 반전 평화를 노래한 3국의 문인과 운동가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그들과 연대하는 시민들, 도쿄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한국인을 기리는 일본 시민들 등 동아시아의 평화를 소망했고 만들어가고 있는 작지만 위대한 삶들에 주목했습니다.
계속되는 갈등과 혐오의 다른 편에서 한·중·일 3국의 평화를 소망하고 만들어가는 외침들이 계속된다면, 동아시아 공동의 역사의식을 향해 나아가는 이 발걸음이 더 다양한 사람과 더 다양한 곳으로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평화를 여는 역사
출판사 | 휴머니스트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