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은의 미술과 문장] 조각의 피부
조각, 재료에서 ‘피부’가 되기까지
글: 오정은
2025.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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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 안에 갇혀 있는 형상을 꺼내 해방시키는 일.’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비유했다. 그의 정 끝은 돌 속에 잠든 천사를 깨우고 실루엣을 더듬어 비로소 조각이 되었다. 수 세기가 지난 오늘,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태어난 여러 조각 작품을 본다. 물성의 한계를 넘어 재현과 표현의 기교에 다다른 것들을. 돌과 나무, 흙과 금속은 조각의 보편 재료로서 자기 몸의 깎임과 성형, 주조를 조각가에게 허하였다.

 

그런데 점차 우리는 조각의 보편을 벗어난 형식들을 마주하고 있다. 형상은 일그러지고, 낯섦과 어긋남이 오히려 미학적 풍요가 된다. 조각의 재료는 단단하기보다 유약하며, 심지어 금방 썩거나 분해되기까지 한다. 이들은 조각으로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데 그치지 않고, 물성 자체의 의미로 발견되고 해석되기 또한 고대한다. 비물질의 경계를 조금씩 더듬는가 하면, 살아 있는 차원으로 감응한다. 이들에게는 ‘조각의 재료’라기보다 ‘조각의 피부’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려 보인다.

 

조각의 변형과 그것의 피부에 관한 사유를 이어가다 보면, 김초엽의 「수브다니의 여름휴가」가 떠오른다. 이 SF소설은 ‘맞춤 인공피부’를 제작하는 피부관리숍을 배경으로 한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라고 믿는 아더킨(otherkin)들이 주요 고객층이다. 그들은 곰의 털가죽을 이식받거나, 물고기 비늘을 피부에 심기 바라는 부류다. 어느 날 ‘수브다니’라는 이름의 수상한 고객이 이곳에 찾아온다. 금속 피부, 그것도 녹스는 피부를 갖고 싶다고 주문하는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휴머노이드 로봇. 그는 정교한 세포 기반 기술에 바이오플라스틱이 결합된 피부를 지닌, 인간화된 기계다. 인간이 되는 시술을 받았는데도 다시 기계의 몸으로 돌아가려는 수브다니의 욕망은 선뜻 이해되기 어렵다. 관리숍은 여러 설득과 상담 끝에 결국 그의 피부 이식술을 감행하고, 수브다니는 녹슬어 가는 피부와 함께 해변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

 

수브다니의 기행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 그가 시각예술가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즉 수브다니가 피부를 태우며 보낸 여름휴가는 인간과 비인간종에 관한 실존적 의문을 자문하는 한편, 예술가의 자기 완결적 수행 사이에서 모호하게 위치 지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해석의 갈래도 여러 방향으로 심오하게 열려 있다.

 

오묘초, <Glimmers>(부분), 유리, 알루미늄, 가변크기, 2024

 

동시대 미술가들이 다루는 실제 장면에서 이 모호함을 풀어낼 단서를 찾아보고자 한다. 먼저 오묘초의 작업이다. 그는 불로 주조한 유리와 알루미늄, 은과 같은 금속을 조각의 몸체로 구성해 결합한다. 유선형으로 드러난 외관은 투명 피막과 가는 촉수를 지닌 심해 유기체를 연상시킨다. 특유의 조형적 긴장을 품으며 설치된 결과물은 고정되어 멈춘 듯 보이지만, 광물의 시간대로 바라보면 표면은 매 순간 미세한 변화를 겪고 있다. 오묘초는 진화의 관점에서 그 느린 순간의 변이에 주목한다. 무기 재료는 조각의 소재일 뿐 아니라, 상상된 미래 생물의 피부를 구성하는 물질로 탐구된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결이 작품 곁을 맴돌며 지질학적 연보를 환기하고 생명성의 스펙트럼을 넓게 상상하게 만든다. 

 

손희민, <Mouth, Anus, Skeleton>, 석고붕대 캐스팅, PVC 호스, 합성수지 , 우레탄폼, 우레탄  아크릴 레진, 156x80x70cm, 2025. 사진=정지필

 

오묘초가 광물을 가열해 생물학적 외형을 만들어 미래적 상상을 지속한다면, 손희민의 조각은 갑각류의 외골격 등을 이루는 키틴질을 조각의 거푸집 삼아 시작된 상상이다. 손희민은 생물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고 그 개념을 자신의 조각이 만들어지는 규칙에 빗댄다. 개체 이동과 수렴, 공진화와 적응 선택의 원리로 빚어진 독특한 형태의 작품은 다양한 생물종의 캐스팅과 접합, 그리고 인공재료와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조각의 외형은 단단한 껍질이자 가역적 표면이며, 과학적 사고에 예술의 몽상이 결합된 층위다.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한, 진화한 다른 종의 가능태를 학제적 언어로 풀어내고자 한다.

 

유아연, <Favicon_APEL_Skull>, 비닐, 머리카락, 인조 손톱, 인조 속눈썹, 깃털, 실리콘, 레진, 체인,  이어, 아크릴, PLA, 27x50x1cm, 2025. 사진=강건

 

이어 유아연의 작업을 살펴보자. 그가 다루는 인공 섬유, 기계적 질감의 표면들은 탈부착되는 모듈로서 작동하는 피부를 보여준다. 이는 생물의 숨 쉬는 증거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으로 제시된다. 유기적 감각과 생명 장치로서의 몸이 아니라 교환 가능한 외피이며, 상품화된 단위로 분절된 채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다. 유아연은 그런 조각을 수트처럼 입고 행위 하거나, 판매 가능한 물건처럼 전시하거나, 지지체에 둘러진 기계적 부품들로 배치한다. 인간 신체의 일부인지, 혹은 분리된 사물인지 불명확한 상태로 구성된 이들 조각은 경계를 느슨히 하며 다음의 의문을 좇는다. ‘존재’란 무엇으로 둘러싸여 왔으며, 그 표면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다가오는 시간을 피부로 통과하는 우리가 끝없이 되짚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매끈한 가죽과 살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까끌까끌한 털로 뒤덮인 존재라면, 혹은 석고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잘 부스러지는 존재라면? 인간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매끈한 피부는 인간의 본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김초엽 『양면의 조개껍데기』,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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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은

미술비평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전문사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동시대 미술 현장과 작가 작업을 연구하며 글을 쓴다. <경향신문>에 미술 칼럼을 연재했고, <네이버 디자인>, 『월간미술』, 『서울아트가이드』 등 여러 매체에 기고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