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연출가의 생존기: 장르는 넘으라고 있는 것>
마지막 이야기: 생계형 연출가의 생존기
2009년 2월, 연극 연출가로 데뷔한 이기쁨은 올해로 16년째 ‘창작집단 LAS’를 이끌고 있다. 연극, 국악 극, 아동극, 뮤지컬, 콘서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만들어온 그는, 그 어떤 한 분야로도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연출가다. 이기쁨 연출이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생계형 연출가’로서의 현실 때문이다. 생활인으로서의 생존, 극단 대표로서의 책임, 그리고 연출가로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삶이 얽히고설켜 고단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주어진 작업을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니, 어느새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필모그래피가 쌓여갔다. 화려한 능력으로 쌓아 올린 결과라기보다는,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행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성격은 이런 여정을 가능하게 했고, 그 속에서 이기쁨만의 배짱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금부터,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버텨온 이기쁨 연출가의 ‘생존기’를 매달 장르별로 하나씩 살펴보자.

사진: 아이스톡
6개월간 이어진 연재의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까? 하루 12시간이 넘는 연습 시간을 소화하여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노트북을 켠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혼란하다. 몸 안에 채워둔 것을 모두 끄집어내 쓰고 있으니 더 꺼낼 게 없다. 마감은 다가오고 초조함은 커진다. 왜 이런 스케줄을 잡았을까, 과거의 나를 호되게 나무라지만 이미 벌어진 일. 다시 마음을 다잡고 노트북 앞에 앉지만 눈앞에는 텅 빈 화면과 생각나지 않는 말들뿐이다. 아이고, 어쩐다. 망했다.
이런 마음은 비단 글을 써야 하는 순간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직업인으로서의 나, 생활인으로서의 나,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나, 자연인으로서의 나.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하루를 잘게 쪼개 온 힘을 다하지만, 이런 벽은 자꾸 나타난다. 벽에 가로막혀 주저앉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나는 늘 허덕여야만 할까’라는 비극적 사고. 이런 사고의 흐름 끝에 난 결국 내 일의 ‘유예기간’을 떠올린다. ‘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누군가가 나의 꿈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답하게 된다. “그저 오래오래 연출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 나는 오래오래 연출을 하고 싶다. 백발이 성성하고 지팡이를 짚게 되더라도 배우들과 장면을 이야기하고, 관객과 호흡하며 무대를 만들고 싶다. 그 꿈에는 거창한 말도, 대단한 다짐도 없다. 그저 무대라는 공간 위에 나의 흔적을 조금 남기는 것, 그 정도다. 하지만 이 꿈은 늘 ‘미래형 문장’ 으로 남아있다. 지금이라도 단정하기엔 나는 아직 더 배워야 하고, ‘옛날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아직 포기할 수 없다. 이 일은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유지되는 직업이다.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의 기회가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누군가가 나를 찾지 않으면, 나의 일은 그 순간 멈춘다. 그러면 나의 유예기간도 끝난다. 그 유예기간을 늘리기 위해 누가 정해주지 않아도 마감일을 만들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다시 시작하는 일을 성실하게 반복한다. 나에게 필요한 성실함은 단순한 ‘열심’이 아니다. 불안과 초조를 연료로 삼는 성실함이다. 불확실한 일터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그 불확실함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생존의 문제와 맞닿는다. 마감은 체력과 정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장이 되고, 제작비는 상상력을 가두는 현실이 된다. 특히 연출가는 작품의 성과가 그대로 생계와 연결된다.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다음 작품을 할 기회를 잃는다. 관객의 반응, 매체의 관심, 지원사업의 결과가 미래를 결정한다. 그렇게 처음의 ‘좋아함’이 서서히 옅어질 때가 있다. “이 작품이 끝나면 뭘 해서 먹고살지?”, “이번 성과가 부족하면 유예기간이 얼마나 짧아질까?” 이런 질문이 어느새 일상이 된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연출하면 뭐가 좋아요?” 솔직히 말하면 ‘좋아서 한다’는 말은 이제 절반쯤만 진실이다. 좋아서 하고, 두려워서 하고, 멈추면 내가 아닌 것 같아 계속한다. 불안을 일정 비율로 감수하면서도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멈추는 순간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나 인터뷰는 예술가의 ‘열정’을 자주 강조한다. 하지만 그 뒤에는 늘 ‘지속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숨어있다. 창작자는 감정과 시간, 에너지를 쏟지만 수입은 늘 일정하지 않다. 공연 산업의 구조상 창작자에게 돌아오는 몫은 크지 않고 작품은 늘 위험을 안고 있는 투자다. 그래서 연출가는 계속 자신을 증명하고, 설득하고, 설명해야 한다. 감동의 순간보다 계산의 순간이 많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작품을 시도한다.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하는 120분이 이 모든 생존 게임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창작의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순간의 진실이다. 거짓 없이 감정과 시간을 교환하는 현장. 나는 그 시간을 포기할 수 없다.

이기쁨 연출가
6개월 동안 글을 쓰면서, 나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연출가보다는 ‘기록하는 연출가’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기록한다는 건 이상하게도 나 자신을 천천히 바라보게 만든다. 그 과정을 지나며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두려움에 민감한 사람, 그리고 그 두려움을 아주 조금씩 견디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생존기’라는 제목이 이토록 솔직한 의미로 다가올 줄 몰랐다. 하지만 글을 쓴 시간만큼 내 불안을 더 정확하게 관찰하게 되었고, 그 불안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아주 조금은 단단해졌다. 창작하며 겪는 갈등들, 불규칙한 기회들, 예측할 수 없는 내일. 이 모든 것이 여전히 나의 현실이다. 다른 일을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지게차 면허라도 따야 하나, 농담처럼 말하면서도 진지한 계산을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결론은 늘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그래도 나는 이 일을 조금 더 하고 싶다.”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유예기간’이라는 말은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지난 6개월 동안 글을 쓰고, 12시간씩 연습실에서 부딪히며 나는 조금씩 다른 관점을 갖게 되었다. 유예기간은 누군가가 나에게 부여한 시간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조금씩 늘려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유예기간은 빠르게 줄어들지만, 내가 직접 움직이면 그 시간은 아주 조금씩 늘어난다.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때, 함께한 배우와 스태프들이 ‘다음에도 같이 하자’고 말해줄 때, 관객 한 명이 조용히 다가와 “오늘 공연 좋았어요.”라고 말해줄 때, 그 순간마다 내 유예기간은 하루씩, 이틀씩 길어진다. 어쩌면 연출가의 삶은 거창한 비전이나 한 방의 성공보다는 꾸준히 유예기간을 연장하는 장기전일지 모른다. 버티는 일, 견디는 일, 다시 시작하는 일. 그 연속이 어느 순간 ‘지속’ 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6개월의 연재를 마무리하며, 나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하루만큼은,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내일도,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지게차 면허를 따야 할까 고민하는 마음도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그 고민조차도 내가 이 일을 어떻게든 계속하고 싶어 한다는 반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여전히 이 일을 좋아하고, 두려워하고,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 애씀 자체가 나의 생존력이다. 유예기간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 기간을 조금씩 늘려가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시간을 미세하게 더 연장하듯이, 나는 내 속도로 조금씩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버티고, 견디고, 다시 꿈꾸는 방식으로 나는 이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다. 무대에서 여전히 장면을 이야기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그렇게 나는 생존하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잘 살아남아서 또 만납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기쁨 (연출가)
공연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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