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선명한
[작지만 선명한] 그림책 전문 출판사, 글로연의 책
작은 출판사의 책을 소개하는 큐레이션 시리즈 ‘작지만 선명한’. 문학과 미술이 더해진 또 하나의 예술 장르, 그림책 전문 출판사 ‘글로연’의 책.
글: 오승현
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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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연은 ‘글로 연다’는 뜻으로 세상이나 사람과의 관계를 목적어로 두고 만들어진 브랜드이며, 그림책 출판에 집중하고 있다. 그림책은 문학과 미술이 더해져 만들어진 예술 장르로 과거엔 어린이를 주 독자 대상으로 했다면 요즘은 청소년을 포함한 어른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독자층이 확장되는 추세다. 미래 출판계에 전자책이 주류가 된다 하더라도 그림책은 종이책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그림책이 책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내용을 담아내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모양, 크기, 제책 방법 또한 여러 가지이며, 페이지를 위로 넘기기도 하고 또 페이지를 접고 말거나 야광으로 보기도 하는 등 물리적 접촉을 통해 즐기는 방법 역시 풍부하다. 한국 작가들과 협업하며 출판 IP 창출을 지향하는 글로연은 이러한 그림책의 특징을 살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도록 편집과 제작에 정성을 다한다.

 


『도토리시간』

이진희 글그림 | 글로연


2020 볼로냐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선정작이기도 한 『도토리시간』은 삶의 고비에서 힘든 여정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그림책이다. 작가는 힘든 순간에 고개 숙이고 마음이 움츠러든 이들에게 도토리시간 여행을 제안한다. 위축된 마음처럼 몸이 작아진 주인공은 도토리 안에서 자신에 집중하며 혼자 누리는 조용함과 채움, 그리고 자연의 응시를 통해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도토리 뚜껑을 여닫고, 고개를 숙이고 드는 행위를 더 잘 표현하기 위해 책은 위아래로 펼치는 상철 제본을 했다. 표지는 가슬가슬한 종이의 질감을 살려 도토리의 계절인 가을의 깊이를 담았고, 제본실의 색을 그림들과 어울리는 올리브그린으로 정해 매 페이지를 꽉 채운 아름다운 그림이 제본의 바느질로 방해받지 않고 잘 어우러진다. 

 


『09:47』

이기훈 글그림 | 글로연

 

지구 환경의 위기를 알리기 위해 해마다 환경위기시계가 발표되고 있는데 ‘09:47’은 이 책이 출간된 2021년의 환경위기시각이다. 제5회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을 수상한 『09:47』은 숫자로 시간을 더하며 글 없이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8시 40분, 한 가족이 비진도에 가기 위해 통영항에서 배를 탄다. 9시 47분, 화장실에 간 아이가 들어갈 때와는 달리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온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12시를 지나 아이는 처참한 모습의 지구 종말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다시 배의 화장실로 돌아오며 이야기는 끝나는데, 이때의 시각은 9시 47분으로 현재를 의미한다. 작가는 90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의 그림 작업을 5년에 걸쳐 완성했다. 원화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느낌을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하기 위해 원화와 동일한 크기의 큰 책으로 만들었다. 2025년 환경위기시각은 9시 33분으로 지난 4년간 14분이 줄었지만 그래도 아직 위험하다. 이 책에서 그린 12시 이후를 본다면 우리는 환경위기시각을 조금 더 당길 수 있지 않을까? 

 


『줄타기 한판』

민하 글그림 | 글로연


줄타기는 여러 나라에 있는 공연이지만 한국의 줄타기만이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줄타기가 줄 위에서 보여 주는 재주(퍼포먼스)만이 아니라, 줄광대가 어릿광대와 주고받는 재담(이야기)과 삼현육각의 연주(음악)가 더해진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림책 『줄타기 한판』은 우리나라 줄타기의 이러한 특징을 공감각적으로 온전히 녹여 냈다. 페이지마다 진짜 실을 꿰어 줄광대가 타는 줄을 실체적으로 느끼게 했으며, 국가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의 예능 보유자인 김대균 명인과 줄광대, 삼현육각 연주자들이 책의 내용에 맞춰 펼친 공연을 책과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QR코드를 넣었다. 이 작업은 책 한 권을 따로 만드는 만큼의 비용이 들어 고민이 많았지만 종합예술로 평가받는 우리의 줄타기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했다. 줄광대의 재주와 삼현육각의 연주는 간결하고 현대적인 시각 언어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시각과 촉각, 청각을 통합하여 우리의 줄타기를 연출한 이 책은 제1회 대한민국 그림책상 논픽션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만드는 과정에서 마주했던 어려움을 보람으로 치환해 주었다. 

 


함께 읽는 다른 출판사의 책

 


『경복궁 친구들』

조수진 글그림 | 어흥대작전


조수진 작가는 그림책이 글과 그림을 넘어 종이라는 공간 안에서 어떻게 더 확장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작품을 통해 그 결과를 보여 주곤 한다. 글로연에서 출간한 작가의 그림책 『2053년 이후, 그 행성 이야기』를 편집하는 7년 동안 종이로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그림책을 짓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제3회 대한민국 그림책상 특별상을 수상한 『경복궁 친구들』은 작가가 출판사를 차리고 출간한 책으로 기와 이미지가 표지를 채운다. 내지로 들어가면 표지와 마찬가지로 겹겹이 접힌 기와가 가득한데 이는 구중궁궐 경복궁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각각의 기와 면을 하나씩 아래로 펼치면 광화문에서 신무문에 이르기까지 경복궁의 관문들과 그곳을 지키는 여덟 서수들이 차례로 나타나며 궁의 가장 안쪽까지 닿게 된다. 그다음은 기와 아래의 마당을 위로 펼칠 차례다. 한 마당씩 위로 펼칠 때마다 여덟 서수가 다시 차례로 나타나되, 이때는 주인공 아이가 서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수들의 역할과 의미를 재미나게 알려준다. 한 폭의 그림처럼 감상할 수도 있게 긴 종이로 이어진 책을 양방향으로 접고 펼치며 경복궁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그림책의 재미에 푹 빠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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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현

그림책 편집자로 영국에서 출판학을 공부했다. 글로연을 맡고 있으며, 그림책 작가 양성을 위한 ‘내러티브워크숍-그림책, 이야기를 꿰다’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