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외교정책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언론인
로버트 카플란은 미국의 우파 논객으로는 드물게 여러 권의 한글판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 국방부 관리들이 그의 말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 쫓고 있는 언론인"(문화일보 2002년 2월 22일자)이라는 평가를 받는 카플란 책의 한글판은 지금까지 세 권이 나왔다.
2003.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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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 정치외교학과 권용립 교수는『미국의 정치문명』(삼인)에서 보수와 진보가 상대적이라는 전제 아래 "미국 정치문명의 궁극적 속성은 '보수'"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자유주의, 공화주의, 캘빈주의의 융합체인 미국의 정치문명을 뭉뚱그려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고 칭한다. 달리 말하면, 미국 사회에서 진보 세력은 소수파라는 얘기다.
하지만, 번역서를 통해 감지되는 미국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역학관계는 정반대로 나타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현상은 2001년 9?11 테러를 전후로 더욱 두드러졌는데, 번역 출판에서 미국의 정치지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노암 촘스키나 하워드 진 같은 비판적 지식인을 선호하는 독자와, 이에 호응하는 출판사의 태도가 맞물린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더 큰 이유는 그 동안 굳이 미국 우파의 생리를 드러내놓고 '선전'할 필요가 없었던 우리나라 특유의 상황적 요인이 작용한 때문은 아닌가 한다. 예컨대, 지난 3?1절 열린 친미적 성향의 국민대회에 대해 종교학자 장석만은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그 날 (서울) 시청 앞 연단 밑에는 여태껏 반공과 친미를 금과옥조로 무한 특권을 누려온 우익 정치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맹목적 반공주의자인 개신교 목사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 지금까지 이들은 정치적 시위를 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반공? 친미정권이 한국사회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거리에 나와 정치적 시위를 하게 된 것을 보니, 요즘 상황이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는 듯하다."(현대불교신문, 2003년 3월 12일자)
아무튼, 로버트 카플란은 미국의 우파 논객으로는 드물게 여러 권의 한글판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 국방부 관리들이 그의 말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 쫓고 있는 언론인"(문화일보 2002년 2월 22일자)이라는 평가를 받는 카플란 책의 한글판은 지금까지 세 권이 나왔다.
이름의 한글 표기가 달라 잠시나마 그의 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일게 하는『지구의 변경지대』(한국경제신문사, 1997년)는 내가 몰입해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이다. 하지만, 그런 독서경험을 발설하는 내 심정은 영 개운치 않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나는 카플란의 세계관이 그렇게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왕당파인 발자크가 소설에서는 부르주아의 승리를 체험했다는 이른바 '리얼리즘의 역설'을 모르는 바 아니나, 미국 보수 우익 논객의 책을 무비판적으로 읽은 것은 부끄러운 기억이다. 이 책을 읽은 거의 같은 시기, 와타나베 쇼이치라는 일본 극우 인사의『지적생활의 방법』 이라는 책을 연신 칭찬하다가 일본에 유학중인 독자로부터 항의성 편지를 받았다. 자유주의자연하는 사람이 어떻게 일본 극우파의 책을 그렇게 띄워줄 수 있느냐고. 와타나베 쇼이치의 본색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은 내 무지(쇼이치의 배경에 대한)를 탓하면 그만이지만, 카플란은 좀 달랐다.
사실, 카플란은 책에서부터 보수 우익의 냄새를 적잖이 풍겼다. 마르크스를 가리켜 "그가『자본론』을 써서 유명해지지 않았더라면, 『뉴욕 트리뷴』에 실린 그의 글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을 때, 카플란의 본색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다분히 내 둔한 감각 탓이다. 아니, 나는 당시 이 독특한 여행기에 푹 빠져 일종의 판단정지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미국 도심의 불안한 치안 상태에 대한 카플란의 비판적 묘사 또한 판단정지에 일조했을 것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아크라(=가나의 수도)에서는 다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도시나 여러 미국 도시들과는 달리 일몰 후에도 안전하게 나다닐 수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 국무성은 내게 미국과 외교관계가 없는 이란으로 여행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의 여러 도시에 있을 때보다 이란에서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독자가 분별력을 갖고 대한다면,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세계의 분쟁지역을 답사한 기록인『지구의 변경지대』 는 세기말을 암울하게 묘사한 묵시록으로 읽히지만, 서아프리카, 나일강 유역, 아나톨리아와 카프카스 지역, 이란, 중앙 아시아, 인도와 인도차이나 등지의 우리가 잘 모르는 곳에 관해 충실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생한 르포로서『지구의 변경지대』는 발자크의 작품들이 이룩한 '리얼리즘의 승리'에 버금간다.
또한, 다시 펼쳐본『지구의 변경지대』의 한 대목은 다른 책들을 연쇄적으로 호출한다.
"나는 그렇게 반 시간 가량 기다렸다. 그 때 다른 탑승권 판매원이 살짝 걸어와서 창구를 지키는 그 판매원에게 무슨 말을 속삭였다. 비명소리가 커지면서 또 한 차례 비행기표 흔들기가 시작되었다. 그 두 번째 판매원이 파충류처럼 느린 동작으로 비행기표를 받고 탑승권을 내주기 시작했다. 줄이 없었기 때문에 다음 차례가 누가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비행기표가 'OK'라는 표시로 예약 확인이 되어 있는지,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는지도 체크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컴퓨터도 심지어 승객 명단도 없었다."
기니의 코나크리에서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으로 가려는 카플란이 코나크리 공항에서 겪은 복마전 같은 풍경이다. 가까스로 탑승권을 발급 받은 카플란은 출국 심사장에서 또 한번 봉변을 겪는다. 세관원은 소지한 현금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카플란이 갖고 있었던 기니프랑화를 몰수한다. 카플란은 프리타운에 살고 있는 친구의 표현을 빌어 프리타운 공항과 입국심사관을 "개들이 으르렁거리는 쓰레기장"이라 묘사한다.
아프리카 저개발국가의 무질서와 그 나라 공무원의 전횡에 대한 불만은, 역시 독특한 여행기인 더글러스 아담스의『마지막 기회』(해나무)에서도 표출되고 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을 찾아 나선 아담스의 여정이 카플란의 행로와 겹치지는 않지만 비슷한 구석이 많다. 아담스는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 중앙아프리카, 중국, 뉴질랜드 등지를 둘러보았다. 자이르에서 현금 신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 뻔했던 아담스는 다음 같은 성찰을 하기에 이른다.
"어떤 사람이 무슨 대가를 치르고라도 하고 싶어하는 일을 막는 게 직업인 사람이 한 나라에 턱없이 많다면 그 나라는 분명 예전에 식민지였을 것이다."
아담스의 깨달음은 분명한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의 시각을 전폭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영국인인 아담스의 시각에는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전혀 없을 뿐더러 백인 우월주의마저 풍기고 있어서다. 그러기는 카플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못 사는 유색인종을 얕잡아보는 것이 백인종의 전유물은 아니다. 유색인이면서도 경제적 형편이 좀 낫다는 이유로 으스대는 듯한 한 한국인의 사례를 역추적해보기로 하자.
"이번에 읽으면서도 정말 그랬을까 싶은 구절이 「뮤즈의 복수」에 박혀 있다."『서얼단상』(개마고원)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일절이다. 고종석은 이인화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을 두고, 재인용까지 하면서도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며 못 미더워한다. 그러면, 진중권이『아웃사이더를 위하여』 (아웃사이더)에 수록한 「뮤즈의 복수」에다 인용한 이인화의 문제 발언을 원문을 통해 확인해본다. 독자의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문제의 대목 전체를 발췌한다.
"늘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그겁니다. 남아프리카를 갈 때였어요. 사우스 아프리카 에어라인의 스튜어디스들이 나하고 일본 사람들은 아너러블(honorable) 화이트라고 쓰인 자리에 앉히고, 그 다음에 화이트, 블랙, 그리고 화장실 바로 옆 자리에 중국 사람들을 앉혀요. 못 사니까. 그리고 중국 사람들한테서 계속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냄새가 좀 나긴 납디다, 거기다 왜 삼천 원짜리 방향제 있잖습니까, 그 방향제를 뿌리더라구요. 자기네들은 화이트니까. 그걸 보고, 아 우리가 바로 33년 전에 저 꼴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강영희,『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 풀빛미디어)
『지구의 변경지대』가 지은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리얼리즘의 승리'를 구현했다고 해서 카플란이 발자크에게까지 필적하는 것은 아니다. 카플란과 그의 후속 한글판을 펴낸 출판사 관계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한글판 카플란 독서에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용한다.『무정부시대가 오는가』(코기토, 2001년)와『승자학』(생각의나무, 2002년)은 엇비슷한 체제에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았다. 정치 평론의 성격이 짙은 글 사이에 서평이 배치돼 있다.
카플란 책 읽기의 효용이 갈수록 저하되는 것은, 두 권의 책에 포함된 서평의 질적 수준과 관계가 없지 않다.『무정부시대가 오는가』에 실려 있는 에드워드 기번의『로마제국쇠망사』와 조셉 콘래드의 『노스트로모』에 대한 카플란의 서평은 그가 뛰어나 독서가이자 서평가라는 사실을 실증한다. 그러나,『승자학』에 실린 윈스턴 처칠의 『강의 전쟁』과 리비우스의 『한니발 전쟁』을 다룬 서평 형식의 글은 성글다. 그저 힘의 논리를 숭배하고 있을 따름이다.
카플란 책 읽기의 만족도가 책을 읽어 나갈수록 떨어진다고 해서, 그의 책을 전혀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집단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는 데 카플란은 요긴한 정보를 제공한다. 카플란은『무정부시대가 오는가』에서 "정치에 열정을 가진 유권자들, 특히 교육수준이 낮고 소외된 유권자가 증가하는 현상이야말로 미국이 가장 원치 않는" 바라고 지적한다.
또한, 카플란의 글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에 담긴 함의와 폭넓은 반전 여론에도 아랑곳없이 이라크 침공을 감행 저의를 파악하게 한다. "악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이란 대담하고 가차없이, 합의 없이도 행동할 수 있는 의지를 뜻"(『무정부시대가 오는가』)한다거나, "만약 미국의 병사들이 근접 사정권 내의 적들과 싸워 죽이지 못한다면,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는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그렇다. 『승자학』에서 카플란은 "미국 외교정책의 도덕적 기초는 국가의 이익과 지도자의 성격에 따르는 것이지 국제법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한편, 미국이 국제질서를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리바이어던이 돼야 한다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미국이 조지 오웰이『1984년』에서 묘사한 '빅 브라더'가 돼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고전적 경구에 밝은 카플란이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격언을 잠시 잊었나 보다. 또 인류의 앞날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인 카플란이 미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장밋빛으로 그리는 것은 좀 의아하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미국이 로마 혹은 역사상 다른 모든 제국과 비교하여 그 모습이 아무리 다르다 해도, 21세기의 미국을 공화국이자 제국으로서 평가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앞으로 수십 년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르고 나면, 미국은 43명이 아닌 백수십 명 혹은 심지어 150명이 넘는 대통령을 갖게 되고, 그들은 역사적으로 사라진 제국들-예컨대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긴 통치자들처럼 긴 연대기에 기록될 텐데, 이것이야말로 과거와의 비교가 사라지기보다는 더 증대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미국이 적어도 수십 년은 현재의 국가 형태를 유지하겠지만, 수백 년 동안 지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과거의 제국들과 닮았다면, 그것의 지속 기간보다는 어떤 제국도 예외 없이 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더욱 주목하는 것이 현명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끝으로 구구각색인 카플란 이름의 한글 표기를 교통정리하기로 하자. 알파벳 표기는 Kaplan이로되『지구의 변경지대』에서는 '케이플런'으로 표시했고, 문화일보 기사는 '케플란'이라 썼다.『무정부시대가 오는가』와『승자학』에 쓰인 '카플란'이 적절한 표기로 보인다. 단『존재하는 무 0의 세계』(이끌리오)를 쓴 '로버트 카플란'은 같은 이름의 수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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