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이다
냄비 근성과 마르크스의 무능. 동떨어진 사안 두 가지가 이 글의 주제다. 전자는 우리나라 사람을 얕잡아 볼 때 하는 말이고, 후자는 한 집안의 가장 구실에 충실하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무능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200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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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 근성과 마르크스의 무능. 동떨어진 사안 두 가지가 이 글의 주제다. 전자는 우리나라 사람을 얕잡아 볼 때 하는 말이고, 후자는 한 집안의 가장 구실에 충실하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무능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스포츠 이벤트와 사회적 이슈에 열광하고 흥분하는 이웃을 같잖게 보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런 그들이 순진한 이웃을 타박하는 근거가 바로 냄비 근성이다. 하지만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가라앉는 현상이 우리네 평범한 이웃을 눈꼴사나워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그럼, 늘 열에 들떠 지내라는 말인가?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마르크스에 대해 적대자들은 ‘수신제가’도 못하면서 ‘치국평천하’를 꿈꿨다는 투로 그를 비꼰다. 또 그들은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가 하녀로 데려온 헬레나 데무트와의 ‘간통’에 대해선 “노동자 계급을 적극 편든 사람이 그게 할 짓이냐?”라고 빈정댄다. 이런 비난의 대열에는 진보인 척 행세하는 분들도 가세하는데, 적대자와 진보인사 모두 마르크스의 출신 성분과 망명자의 처지를 잊고 있는 것 같다. 마르크스는 19세기 독일 귀족 출신으로 반생을 영국에서 망명자로 보냈다.
마르크스를 향한 인신공격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것은 그의 사상이 여전히 위협적이기 때문이리라. 자식을 아예 고아원에 갖다 맡긴 장 자크 루소에게 관대한 까닭은 루소가 마르크스보다 예전 사람이거나 확신에 차서 자녀 부양을 회피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루소가 덜 위협적이거나 전혀 위험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냄비 근성과 마르크스의 무능은 별개의 문제이나, 마르크스와 냄비 근성은 관련이 있다. 1980년대 초중반 우리 지식사회를 휩쓴 마르크스 열풍은 ‘냄비’의 혐의가 있다. 마르크스 저작의 출판과 독서 열기는 뒤늦게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많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 주변에서는 마샬 버먼 같은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지식인”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마샬 버먼의 한국어판 두 권은 모두 마르크스의 저작이 모티브가 되었다. 버먼이 읽은 책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맑스주의의 향연Adventures in Marxism』(문명식 옮김, 이후, 2001)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김태경 옮김, 이론과실천, 1987)에서 출발한다(『경제학 철학 수고』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최인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1991)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되었다).
젊은 혈기가 들끓는 청년 버먼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의 친구들을 향한 복수심에 불탄다. 버먼의 토론 상대였던 제이콥 교수는 분을 삭이라는 뜻이었는지 버먼에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대안적 전망”을 제시하는 책 한 권을 권한다. 그 책이 바로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 작성한 노트 세 권을 엮은 『경제학 철학 수고』였다.
버먼은 1959년 11월의 어느 멋진 토요일, 소비에트 간행물을 취급하는 공식판매점인 뉴욕의 ‘사대륙서점’에서 문제의 책을 만난다. “나는 여기저기 아무 데나 펼쳐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진땀을 흘리고 감동에 젖어, 옷을 벗어 던지고 눈물을 흘렸다.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소련에서 펴낸 영문판 『경제학 철학 수고』의 저렴한 가격에 한 번 더 놀란 버먼은 책을 수십 권이나 사서 그의 “삶에 들어와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책을 거저 나누어주며 감격해”한다. 이런 멘트를 날리면서 말이다. “읽어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물론 칼 맑스의 책이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칼 맑스가 되기 이전에 쓴 겁니다. 이 책은 우리의 삶 전체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 보여주지만, 또 당신을 행복하게도 해줄 겁니다.”
버먼은 마르크스의 초창기 에세이들이 “‘교양Bildung’과 소외된 노동의 갈등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마르크스는 “위대한 문화 전통의 일부이며, 고통을 겪는 근대컀을 동정했다는 점에서 존 키이츠, 찰스 디킨스, 조지 엘리엇, 도스토예프스키,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가, D.H. 로렌스 같은 근대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 고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아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마르크스의 모든 저작에 그것이 녹아 있다는 것이 버먼의 생각이다.
버먼은 『경제학 철학 수고』의 집필 시기에도 주목한다. 마르크스는 “이 글들을 대부분 자신의 위대한 모험들 가운데 하나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의 파리 신혼여행 동안에 썼다.”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도 신혼의 단꿈의 소산인 셈이다. “만일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사랑이요 하나의 불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 버먼은, 마르크스가 만약 연인들이 자기 애인을 “배타적 사적 소유물”로 여기는 게 근대적 사랑이라면, 그것은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에 공감했다고 지적한다. “사적 소유란 관념은, 오직 우리가 어떤 사물을 가지고 있을 때만 그것이 우리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버먼의 말마따나 “조야하고 지각없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세계에 대한 그 사람들의 관점은 “인간의 개성을 모든 영역에서 부정한다.” 또 “문화와 문명의 세계 전체에 대한 추상적인 부정”을 수반한다. 행복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예상할 수 있는 최소치의 상태를 더욱 끌어내려 평준화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조악한 공산주의자들을 일러 ‘지각이 없다’고 할 때 말하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생각이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으로 버먼은 이해한다. 그러면서 버먼은 “이 조악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고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악의적이고 신경증적인 행동 표출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버먼은 『경제학 철학 수고』에 실려 있는 세 번째 초고 가운데 하나인 「사적 소유와 공산주의」를 좀더 먼 앞날을 내다보는 낙관적인 글로 평가한다. 다음은 버먼이 그렇게 보는 이유다. “소유욕과 탐욕에 덜 젖어 있으면서도 관능과 생명력에 더 훌륭하게 조화하며, 내부적으로 인간 발전의 극히 중요한 요소를 사랑할 수 있는 더욱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1844년의 맑스는 두 개의 다른 공산주의를 상상했다”라는 것이 버먼의 결론이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바라던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의 진정한 해결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우려했던 “여전히 사적 소유에 얽매어 있고 감염되어 있는” 공산주의였다. “우리가 사는 20세기는 둘째 모델을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 낸 반면, 첫째 경우는 반대로 빈곤하다. 요컨대, 문제는 맑스가 우려했던 둘째 모델은 탱크를 가지고 있었고, 맑스가 꿈꾸었던 첫째 모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향연』의 원서가 출간된 1999년을 기준으로 버먼은 “30년 전에는 ‘신좌파’의 일원이었고, 지금은 ‘중고 좌파’의 일원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줄곧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연구에 매진했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은 “1950년대의 문화와 1960년대 문화의 종합”이고, “획기적인 도약과 환희에 대한 갈망과 결합된 복잡성, 아이러니, 그리고 역설을 위한 감수성”이며, ‘모호함의 일곱 가지 유형’과 ‘우리는 세상을 원한다. 지금 당장’이라는 구호의 제휴다.
버먼은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이 스탈린주의의 대안으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며,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소멸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의 “진정한 활력은 오늘날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허무주의적인 시장만능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은 “역사 속에서, 심지어 고통을 주는 역사 속에서도 안락함을 느끼게 도와줄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전인적 인간의 욕구’를 지닌 ‘전인적 인간’임을 깨닫고, 자신들에겐 생각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다.”
「또다른 기차를 기다리며」는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까지』(김정민?정승진 옮김, 실천문학사, 1987)에 대한 서평이다(『핀란드 역까지』는 『인물로 본 혁명의 역사』로 제목을 바꿔 나오기도 했다). 버먼은 윌슨의 책을 “최후의 위대한 19세기 소설”이라 규정한다.
이 소설의 무대는 “한 세기 반에 걸쳐 유럽 전체와 미국을 포괄”한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재기 넘치며 흥미로우며, 격앙되어 있고, 아름답고, 영웅적이며 초인적인 사람들”이다.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을 엮어주고, “책에 생기를 불어넣어 유기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이상은 바로 혁명이라는 위대하고도 낭만적인 꿈이다.”
버먼이 보기에 윌슨이 마련한 무대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비극적 영웅은 다름 아닌 칼 마르크스다. “윌슨이 보여주고 있듯이, 맑스는 자신의 모든 저작을 통해 그 전망의 깊은 모순들과 끈질기게 투쟁했으며, 일생 동안 그 가장 어둡고 모호한 면들을 폭로했다.” 『핀란드 역까지』는 한마디로 “대단히 창조적인 역사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서평이 중심이 된 『맑스주의의 향연』은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권영빈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3)을 떠올리게 한다. 발터 벤야민을 다룬 버먼과 아렌트의 글을 비교해서 읽는 것도 흥미로우리라. 벤야민이 아렌트에게 ‘꼬마 곱사등이’라면, 버먼에게 벤야민은 ‘도시의 천사’다.
버먼 스스로가 “정말 가까스로” 썼다고 하는 『현대성의 경험 :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윤호병?이만식 옮김, 현대미학사, 1994)는 괴테를 필두로 2세기에 걸친 모더니즘의 역사를 탐구한다. 이 책은 괴테의 『파우스트』,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같은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읽기에서 비롯한다.
이 책은 괴테의 시대에서 마르크스와 보들레르의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를 수놓은 위대한 예술작품과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의 삶을 함께 다룬다. 또한 “현대인에게 모더니스트 문화가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풍요를 제공하고자 하였으며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모더니즘’이 어떻게 ‘리얼리즘’으로 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한때 우리 지식인들 입에 오르내린 한국어판의 부제목과 원서의 제목은 『공산당 선언』에서 ‘발견’한 것이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린다. 신성한 모든 것은 세속적인 것이 되고, 인간은 마침내 냉정한 감각으로 자신들의 생활의 실제 조건과 자신들의 동료와의 관계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마르크스에 대해 적대자들은 ‘수신제가’도 못하면서 ‘치국평천하’를 꿈꿨다는 투로 그를 비꼰다. 또 그들은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가 하녀로 데려온 헬레나 데무트와의 ‘간통’에 대해선 “노동자 계급을 적극 편든 사람이 그게 할 짓이냐?”라고 빈정댄다. 이런 비난의 대열에는 진보인 척 행세하는 분들도 가세하는데, 적대자와 진보인사 모두 마르크스의 출신 성분과 망명자의 처지를 잊고 있는 것 같다. 마르크스는 19세기 독일 귀족 출신으로 반생을 영국에서 망명자로 보냈다.
마르크스를 향한 인신공격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것은 그의 사상이 여전히 위협적이기 때문이리라. 자식을 아예 고아원에 갖다 맡긴 장 자크 루소에게 관대한 까닭은 루소가 마르크스보다 예전 사람이거나 확신에 차서 자녀 부양을 회피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루소가 덜 위협적이거나 전혀 위험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냄비 근성과 마르크스의 무능은 별개의 문제이나, 마르크스와 냄비 근성은 관련이 있다. 1980년대 초중반 우리 지식사회를 휩쓴 마르크스 열풍은 ‘냄비’의 혐의가 있다. 마르크스 저작의 출판과 독서 열기는 뒤늦게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많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 주변에서는 마샬 버먼 같은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지식인”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마샬 버먼의 한국어판 두 권은 모두 마르크스의 저작이 모티브가 되었다. 버먼이 읽은 책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맑스주의의 향연Adventures in Marxism』(문명식 옮김, 이후, 2001)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김태경 옮김, 이론과실천, 1987)에서 출발한다(『경제학 철학 수고』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최인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1991)라는 제목으로도 번역되었다).
젊은 혈기가 들끓는 청년 버먼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의 친구들을 향한 복수심에 불탄다. 버먼의 토론 상대였던 제이콥 교수는 분을 삭이라는 뜻이었는지 버먼에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대안적 전망”을 제시하는 책 한 권을 권한다. 그 책이 바로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 작성한 노트 세 권을 엮은 『경제학 철학 수고』였다.
버먼은 1959년 11월의 어느 멋진 토요일, 소비에트 간행물을 취급하는 공식판매점인 뉴욕의 ‘사대륙서점’에서 문제의 책을 만난다. “나는 여기저기 아무 데나 펼쳐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진땀을 흘리고 감동에 젖어, 옷을 벗어 던지고 눈물을 흘렸다.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소련에서 펴낸 영문판 『경제학 철학 수고』의 저렴한 가격에 한 번 더 놀란 버먼은 책을 수십 권이나 사서 그의 “삶에 들어와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책을 거저 나누어주며 감격해”한다. 이런 멘트를 날리면서 말이다. “읽어보시면 깜짝 놀랄 겁니다. 물론 칼 맑스의 책이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칼 맑스가 되기 이전에 쓴 겁니다. 이 책은 우리의 삶 전체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 보여주지만, 또 당신을 행복하게도 해줄 겁니다.”
버먼은 마르크스의 초창기 에세이들이 “‘교양Bildung’과 소외된 노동의 갈등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마르크스는 “위대한 문화 전통의 일부이며, 고통을 겪는 근대컀을 동정했다는 점에서 존 키이츠, 찰스 디킨스, 조지 엘리엇, 도스토예프스키,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가, D.H. 로렌스 같은 근대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 고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아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마르크스의 모든 저작에 그것이 녹아 있다는 것이 버먼의 생각이다.
버먼은 『경제학 철학 수고』의 집필 시기에도 주목한다. 마르크스는 “이 글들을 대부분 자신의 위대한 모험들 가운데 하나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의 파리 신혼여행 동안에 썼다.”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도 신혼의 단꿈의 소산인 셈이다. “만일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사랑이요 하나의 불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 버먼은, 마르크스가 만약 연인들이 자기 애인을 “배타적 사적 소유물”로 여기는 게 근대적 사랑이라면, 그것은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에 공감했다고 지적한다. “사적 소유란 관념은, 오직 우리가 어떤 사물을 가지고 있을 때만 그것이 우리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버먼의 말마따나 “조야하고 지각없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세계에 대한 그 사람들의 관점은 “인간의 개성을 모든 영역에서 부정한다.” 또 “문화와 문명의 세계 전체에 대한 추상적인 부정”을 수반한다. 행복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예상할 수 있는 최소치의 상태를 더욱 끌어내려 평준화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조악한 공산주의자들을 일러 ‘지각이 없다’고 할 때 말하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생각이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으로 버먼은 이해한다. 그러면서 버먼은 “이 조악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고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악의적이고 신경증적인 행동 표출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버먼은 『경제학 철학 수고』에 실려 있는 세 번째 초고 가운데 하나인 「사적 소유와 공산주의」를 좀더 먼 앞날을 내다보는 낙관적인 글로 평가한다. 다음은 버먼이 그렇게 보는 이유다. “소유욕과 탐욕에 덜 젖어 있으면서도 관능과 생명력에 더 훌륭하게 조화하며, 내부적으로 인간 발전의 극히 중요한 요소를 사랑할 수 있는 더욱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1844년의 맑스는 두 개의 다른 공산주의를 상상했다”라는 것이 버먼의 결론이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바라던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의 진정한 해결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우려했던 “여전히 사적 소유에 얽매어 있고 감염되어 있는” 공산주의였다. “우리가 사는 20세기는 둘째 모델을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 낸 반면, 첫째 경우는 반대로 빈곤하다. 요컨대, 문제는 맑스가 우려했던 둘째 모델은 탱크를 가지고 있었고, 맑스가 꿈꾸었던 첫째 모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의 향연』의 원서가 출간된 1999년을 기준으로 버먼은 “30년 전에는 ‘신좌파’의 일원이었고, 지금은 ‘중고 좌파’의 일원이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줄곧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연구에 매진했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은 “1950년대의 문화와 1960년대 문화의 종합”이고, “획기적인 도약과 환희에 대한 갈망과 결합된 복잡성, 아이러니, 그리고 역설을 위한 감수성”이며, ‘모호함의 일곱 가지 유형’과 ‘우리는 세상을 원한다. 지금 당장’이라는 구호의 제휴다.
버먼은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이 스탈린주의의 대안으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며,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소멸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의 “진정한 활력은 오늘날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허무주의적인 시장만능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은 “역사 속에서, 심지어 고통을 주는 역사 속에서도 안락함을 느끼게 도와줄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전인적 인간의 욕구’를 지닌 ‘전인적 인간’임을 깨닫고, 자신들에겐 생각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다.”
「또다른 기차를 기다리며」는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까지』(김정민?정승진 옮김, 실천문학사, 1987)에 대한 서평이다(『핀란드 역까지』는 『인물로 본 혁명의 역사』로 제목을 바꿔 나오기도 했다). 버먼은 윌슨의 책을 “최후의 위대한 19세기 소설”이라 규정한다.
이 소설의 무대는 “한 세기 반에 걸쳐 유럽 전체와 미국을 포괄”한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재기 넘치며 흥미로우며, 격앙되어 있고, 아름답고, 영웅적이며 초인적인 사람들”이다.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을 엮어주고, “책에 생기를 불어넣어 유기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이상은 바로 혁명이라는 위대하고도 낭만적인 꿈이다.”
버먼이 보기에 윌슨이 마련한 무대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비극적 영웅은 다름 아닌 칼 마르크스다. “윌슨이 보여주고 있듯이, 맑스는 자신의 모든 저작을 통해 그 전망의 깊은 모순들과 끈질기게 투쟁했으며, 일생 동안 그 가장 어둡고 모호한 면들을 폭로했다.” 『핀란드 역까지』는 한마디로 “대단히 창조적인 역사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서평이 중심이 된 『맑스주의의 향연』은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권영빈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3)을 떠올리게 한다. 발터 벤야민을 다룬 버먼과 아렌트의 글을 비교해서 읽는 것도 흥미로우리라. 벤야민이 아렌트에게 ‘꼬마 곱사등이’라면, 버먼에게 벤야민은 ‘도시의 천사’다.
버먼 스스로가 “정말 가까스로” 썼다고 하는 『현대성의 경험 :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The Experience of Modernity』(윤호병?이만식 옮김, 현대미학사, 1994)는 괴테를 필두로 2세기에 걸친 모더니즘의 역사를 탐구한다. 이 책은 괴테의 『파우스트』,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같은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읽기에서 비롯한다.
이 책은 괴테의 시대에서 마르크스와 보들레르의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를 수놓은 위대한 예술작품과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의 삶을 함께 다룬다. 또한 “현대인에게 모더니스트 문화가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풍요를 제공하고자 하였으며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모더니즘’이 어떻게 ‘리얼리즘’으로 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한때 우리 지식인들 입에 오르내린 한국어판의 부제목과 원서의 제목은 『공산당 선언』에서 ‘발견’한 것이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린다. 신성한 모든 것은 세속적인 것이 되고, 인간은 마침내 냉정한 감각으로 자신들의 생활의 실제 조건과 자신들의 동료와의 관계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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