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날] 미친 말(crazy horse)과 미친 말(crazy talk)
딕테를 읽는 여자들 ① - 미친 말이 다른 미친 말을 흔들어 깨우는 순간들을 포착한 김지승 작가의 『딕테』 읽기.
글 : 김지승
2025.03.04
작게
크게

그림: 엄주



2025 여성의 날 특집 – 딕테를 읽는 여자들

딕테 모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진행 중입니다. 딕테를 읽으며 텍스트 너머로 연결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나아가 함께 읽는 여성들이 함께여서 도착할 수 있는 낯설고 먼 곳의 풍경도 담았습니다. 



괄호 열고 그 말이 첫말이었다 마침표 멀리서 온 여자가

있다 마침표 온 만큼 더 멀리 가고 싶은 여자가 마침표

말이 여자에게 묻는다 마침표 따옴표 열고 실제로

죽지 않고도 더 멀리 물음표 따옴표 닫고

부러지고 부서진 말이 여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마침표

텅 비워져 돌아온다면 쉼표 침묵으로 돌아온다면 말없음표 괄호 닫고

 

『딕테』 출간을 알리는 엽서. 베르트랑 오구스트 소장

 

베르트랑 오구스트[1]가 소장해 온 테레사 학경 차(이하 차) 관련 자료 중에 『딕테』의 아주 작은 조각 같은 엽서 한 장이 있다. 1982년 『딕테』 출간을 알리는 엽서다. 정면에 책의 표지 이미지가 와이드 앵글로 인쇄되어 있다. 앵글 탓에  위와 아래에 약간씩 여백이 남는다. 뒷면 왼쪽 상단에는 발신인 정보와 함께 ‘9부로 구성된 내러티브’, ‘192페이지’와 같은 작품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부가되어 있고, 오른쪽 상단에 우표가 붙어 있다. 예술가의 매체성에 집중한 차의 앞선 작업들을 떠올리면 그 작고 매력적인 매체와 그것이 실어 나를 수 있는 시공간을 그가 간과했을 리 없다는 확신이 든다. 세상에 부재하는 상대에 관한 확신은 아주 작은 돌멩이 같다. 일단 쥐어본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수신자이자 발신자였던 연인들은 우표가 놓이는 자리와 방식을 약속된 기호 삼아 서로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가령, 우표를 거꾸로 붙이면 사랑한다는 의미였는데 직역하면 “당신이 내 마음을 뒤집어 놓았어요”가 된다. 위와 아래가 전복되는, 사랑은 혁명이(었)다. 그것이 다 소진될 때쯤 뒤집히는 마음이란 좀 다른 의미겠지만 혁명에 희생이 따르지 않을 수 없고. 또, 세로 모양의 우표가 가로로 붙어있으면 “친구로 지내자”는 의미였다. 거절당한 슬픔은 수신자의 마음을 오래 눕혀놓았을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기준으로 볼 때 차의 우표는 오른쪽 상단 정석에, 숨긴 메시지 하나 없이 붙어 있다. 그럴 리가. 아메리카 원주민 이미지가 꽉 찬 우표다. 떠오르는 게 없진 않으나 그가 의미를 독식하기엔 이르다. 오른쪽 경계선에 바짝 붙은 ‘crazy horse’가 보인다. 코리안 아메리칸 디아스포라 여성의 작품 출간 소식을 알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름, “미친 말”. 

 

그가 희미해지는 11월의 볕과 함께 실어 날랐을 소식은 15년 후인 1997년에야 한국어를 엄마혀(Mother tongue)로 가진 여자들에게 도착한다. 그 말(馬)이 그 말(言)이기도 하다는 걸 감각하는 혀들에게. 숨겨진 이중메시지가 시차를 두고 도착할 때까지 “미친 말”은 『딕테』 표지의 돌들 아래에 잠들어 있었을까. 침식된 만리장성의 한 부분, 멀리 보이는 봉화대와 죽음을 눌러둔 돌들이 “시간을 견디는 노동”을 하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 화면 같은 표지를 보고 있으면 웅웅, 서에서 동으로 부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얼핏 배고픈 미친 말의 울음소리가 지하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페이지를 넘기며 지하로 내려간다. 동그란 사발로 벽을 긁어 새긴 유일한 한국어, “어머니 보고싶어 배가고파요 가고싶다 고향에”가 바람과 울음소리에 잠긴다. 출간 당시 미국의 독자들에게 이 이미지는 금이 가고 부서진 기억, 해독할 수 없는 죽은 자의 말, 즉 미친 말의 현현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미친 말은 다른 미친 말을 깨운다. 1989년 벨훅스는 『Talking Back: Thinking Feminist, Thinking Black』에서 ‘미친 말(crazy talk)’을 흑인 페미니스트의 저항 방식의 하나로 제시한다. 그는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말에 고통과 처벌이 따른다는 것을 위협적으로 경험했다. 그 위험과 억압의 경험을 고백하면서 그는 자신의 말이 미친 말(crazy talk)로 취급되던 순간을 회상한다. 어릴 때는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될 거라는 경고를, 자신이 말과 글을 갖게 된 이후로는 “알아듣게 말하고 쓰라”는 주문을 반복해서 들어야 했던 순간들을. 그가 『딕테』를 만난 건 자기 안에서 중요한 목소리가 죽어가는 고통에 점점 무력해지던 시기였다. 미친 말(crazy horse)이 미친 말(crazy talk)을 흔들어 깨우는 순간, “나는 내 목소리를 갖기 위해 말해야 했고,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2]는 벨 훅스의 고백이 “그녀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재-생시키기 위해 다시 말하는 것을 듣는다”[3]라는 『딕테』의 문장으로 돌아와 동심원으로 퍼져나간다.  

 

벨 훅스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알아듣게 말하거나 쓰지 못하는 여자(그 무수한 ‘she’), 멀리서 와서 말하는 시늉을 하는 여자는 미친 말의 체현자이자 전달자이다. 버틀러가 말한 “언어 속에 거주하고 언어로 전달”되는 권력에 저항하는 몸이다. 폭력과 혐오, 배제와 낙인을 가능하게 하는 그 힘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희하는 것이다. 『딕테』에서 ‘remove(없애다, 제거하다)’가 ‘re move(다시 움직이다)’가 될 때 제거 혹은 사라짐은 또 다른 움직임으로 유희된다. 문학적 관습의 해체는 가장 큰 유희다. 장르, 문법, 구두점, 띄어쓰기, 페이지상의 레이아웃, 서체, 대소문자 혼용, 동음이의어, 이음동의어, 미스 스펠링, 이미지 배치, 출처 없는 인용, 번역의 구조와 위계… 발견하는 유희는 독자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미지와 글을 인용하는 방식도 원본을 의심하며 옮기고 이식하는 유희의 일부다. 원래 있던 장소에서 새로운 맥락 속으로 전치(displacement)하는 과정에서 경계를 넘고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디아스포라처럼 언어/이미지는 자꾸 죽고 재생된다. 말하는 여자, 영매이자 퍼포머, 디아스포라의 언어는 그것을 자기 구조로 코드화하고 붙잡아 설명하려는 어떤 분석 체계에서도 미끄러진다. 페이지마다 의미를 중지시키는 언어적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말이 미친다. 미친 말이 침 흘린다. 침이 말처럼 고인다. “고통이 기억으로 번역되”[4]지 않게 하려고 여자는 미친 말로 쓴다. 의사소통 구조의 명확성을 초과해 버리는, ‘정상적이고 올바른’ 말의 지도를 찢어버리는. 숨이 소리로 소리가 말로. 그러다가 멈춤. 기억이 창조된다. 

 

‘미친 말’이 도착한 지 28년이 흘렀다. 나의 떨림이 너의 떨림에 닿아 메아리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동안 이곳의 ‘말하는 여자’들은 미친 말을 타기도 머뭇거리기도 멈추기도 되살리기도 모른척하기도 두려워하기도 먹이고 재우기도 하며 미결정의 경계에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었다. “우리는 같군요”와 “우리는 다릅니다”를 오가는 결속과 단절 사이에 움푹 파이는 틈, 때로 폐허처럼 버려진 그곳에서 미친 말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죽을까 죽일까 사이에서, 버릴까 바랄까 사이에서. 그러나 어떤 선택이든 미친 말은 안정적인 목적지를 가정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텅 비어져 언제나 최초의 죽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딕테』의 최면이 지속되는 한 그 사실이 그리 절망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이 첫말이었다. 멀리서 온 여자가

있다. 온 만큼 더 멀리 가고 싶은 여자가.

말이 여자에게 묻는다. “실제로 

죽지 않고도 더 멀리?”

부러지고 부서진 말이 여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텅 비워져 돌아온다면, 침묵으로 돌아온다면)


 


 

[1] Bertrand Augst. 버클리대 프랑스어와 비교문학 교수로, 테레사 학경 차 재학 시절 은사이자 멘토였다. 차가 비교문학과 영화이론에 관심을 갖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2014년 광주에서 열린 ‘차학경 레퍼런스’전에 자신이 소장해온 차의 희귀본 자료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2] Bell Hooks, 『Talking Back: Thinking Feminist, Thinking Black』, South End Press, 1998, pp.7

[3] 차학경, 김경년 역, 『딕테』, 문학사상, 2024, pp.162

[4] 차학경, 김경년 역, 『딕테』, 문학사상, 2024, pp.152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3의 댓글
User Avatar

Godot

2025.03.05

같거나 다른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목)구멍이 있는지.. 글을 읽고 나니 분화구로 뒤덮인 몸이 떠올랐습니다. 동시에 발화한 불지옥이지만, 이 미친 지도를 태워버리는 어떤 의식이나 중얼거림 혹은 그저 소리 같은 것들이 느껴져 좋았습니다. 마치 작가님의 이 의식(글)에 참여한 것만 같은 기분이네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답글
0
0
User Avatar

shine865

2025.03.05

“‘정상적이고 올바른’ 말의 지도를 찢어버리는” 미친 말들의 향연임. 진짜 애껴 읽었어요. 한 달 치 독서해서 얻는 충만함이 한 번에 해결됨
답글
0
0
User Avatar

loveeun328

2025.03.04

이 미친 세상에 이 미친 말, 딕테와 더불어 너무 반갑고 좋네요. :) 고맙습니다
답글 (1)
1
0

딕테

<차학경> 저/<김경년> 역

출판사 | 문학사상

Writer Avatar

김지승

문학, 문화이론,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여성적 글쓰기와 다양한 여성 서사를 주제로 독립 연구를 진행해왔다. 현재 장르간 협업과 강의, 글쓰기를 병행 중이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