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는 관록의 음악이다, 재즈 색소포니스트 이정식
한국에서 재즈를 말할 때 ‘척박한’이라는 형용사는 빠지지 않는다.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재즈를 즐길 만한 환경도 부족하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재즈’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선입견마저 가지고 있다.
200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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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재즈를 말할 때 ‘척박한’이라는 형용사는 빠지지 않는다.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재즈를 즐길 만한 환경도 부족하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재즈’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선입견마저 가지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11년째 계속된 라디오 재즈 방송이 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이 진행하는 국내 유일의 데일리 재즈방송 ‘All that Jazz올댓재즈’가 바로 그것이다.
이정식은 83년에 신관웅 쿼텟(Quartet, 4인조)의 일원으로 데뷔하고 92년에 ‘밤으로 가는 기차’로 첫 앨범을 낸 후, 지금까지 꾸준히 재즈 아티스트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드물게 재즈로 한국적인 소리를 찾아가는 아티스트다.
조용히 여섯 번째 앨범 『Moon Illusion(달의 착시)』를 낸 이정식을 매일 밤 그가 ‘올댓재즈’ 청취자와 만나는 CBS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음악, 선입견 없이 그냥 즐겨라
“‘올댓재즈’는 생방송이 아닌가 봐요.”
“새벽 두 시에 방송이 나가서요. 생방송은 어려워요.”
“예전에 밤 열두 시였다가 두 시로 옮겨졌고 다시 청취자들의 요청 때문에 원래 시간으로 옮겨졌다고 들었는데요.”
“다시 두 시로 옮겨졌어요.”
“녹음은 늘 이 시간에 하시나요?”
“네, 보통 밤 여덟 시에 녹음을 시작해요.”
“이렇게 방송시간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봐도 한국에서 재즈를 즐기기에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걸 느끼는데요. 이런 환경에서 11년 동안 방송을 계속할 수 있었다니 대단한 것 같습니다.”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고 생각해요. 저뿐만 아니라 청취자들도 자부심을 느낄 만하죠.”
“재즈는 왜 어려운 음악이라는 선입견이 있을까요?”
“재즈가 딱히 어렵다기보다는 제목과 아티스트를 알아야 한다는 순간, 모든 음악이 재미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냥 그대로 즐기면 모든 음악이 다 좋을 텐데 말이죠.”
“영화 <스윙 걸즈>도 스윙 재즈를 소재로 한 영환데, 많은 사람이 영화에 삽입된 재즈 음악을 참 좋아했죠.”
“그래요. ‘올댓재즈’ 청취자의 90%는 그냥 재즈를 듣고 좋아해서 듣는 분들이에요. 재즈광은 10% 정도밖에 안 돼요. 부담 없이 듣는 것이 음악을 즐기는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이정식은 영화 <스윙 걸즈>에 삽입되었던 ‘Sing Sing Sing’를 흥얼거렸다. 재즈는 레코딩도 좋지만 직접 무대를 즐기는 게 더 즐겁다. 팽팽하게 긴장된 무대에서 재즈 연주자들이 소나기처럼 쏟아내는 음악을 맞노라면 심장이 쿵쿵쿵 뛴다. 음악 속에 푹 빠져 헤엄치는 느낌이다. 연주자의 즉흥 연주는 듣는 사람의 신경까지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그냥 듣는 건 즐겁잖아요. <스윙 걸즈> 음악 얼마나 신나요? 음악을 전혀 몰라도 즐기는 덴 아무 지장이 없어요. 아무 선입견 없이 편하게 듣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방송을 하시면서 청취자와 재즈를 매개로 소통하는 것도 즐거울 것 같은데요.”
“소수지만 재즈를 즐겁게 듣는 분들이 있어서 참 좋아요. 정말 재즈를 사랑하는 분들과 만나는 거니까요.”
“방송을 해서 좋은 점이 또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하게 돼요. 방송을 하다 보면 어떤 성향의 재즈가 요즘 유행인지, 어떤 아티스트가 주목받는지 제일 먼저 알게 되죠.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제 음악적인 토양도 풍부해지는 것 같습니다. 자극도 많이 받고요. 음악 하는 사람이 사실 말에 많이 서툴러요. 그런데 방송을 하면서 대화하는 법을 배웠어요.”
재즈가 나를 선택했다
아티스트가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스스로 음악을 선택해 그 길을 가는 것이 첫 번째 길이다. 두 번째는 음악이 그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정식은 후자다.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주지 않아도 음악을 알았다. 중학교 때 음악을 시작한 후, 고등학교 때 색소폰을 배웠다. 스물한두 살 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반을 들으면서 그 음악이 어떤 장르의 음악인지도 모르면서 평생 이 음악이 내 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재즈라는 길을 걸어왔다.
“어렸을 때는 내가 음악에 굉장히 소질이 있는 줄 알았어요. 가르쳐주지 않아도 척척 악보도 읽고 그랬으니까요. 어린 마음에 우쭐하기도 했죠. 그래서 점점 음악에 빠지게 되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재능은 무슨….(웃음)”
“그래도 그런 마음이 있었으니 선뜻 어려운 음악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을까요? 처음부터 자기 재능의 양이나 질을 알게 된다면 음악을 업으로 삼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랬을지도 모르죠.”
“음악, 그것도 한국에서 재즈를 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잖아요. 가끔 내가 음악을 업이 아니라 취미로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해보신 적 없나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음악을 취미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나는 음악을 바라보는 것보다 음악 속에 있는 내가 더 좋아요. 프로와 아마추어는 입장이 다르죠. 프로기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철학적인 차원이 있고, 프로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타인과 소통의 창이 열리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이 참 좋죠. 잘하고 못하고의 의미가 아니라 음악 속에 푹 빠지는 그런 느낌 때문에 연주가는 무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재즈,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세요?”
“소통의 의미가 커요, 재즈는. 클래식은 정형화된 연주죠. 일단 관객은 연주자가 무엇을 연주할 줄 알고, 어떻게 연주할지도 어느 정도 아니까 소통의 의미가 크지 않아요. 그러나 재즈는 달라요. 지금 연주하는 나 자신도 다음에 어떤 소리가 나올지 몰라요. 메인에서 벗어나는 재즈일수록 그런 소통의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소통이라는 말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재즈로 표현할 수 있어요. 우주적인 차원이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할까요. 다른 음악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재즈는 다른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청중이 느끼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이 굉장히 다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공통분모를 찾는 그 희열이 무척 좋아요.”
“아드님도 재즈 뮤지션의 길을 걷는다고 들었는데요.”
“나는 말렸어요. 너무 힘든 길이니까요. 안 했으면 싶었죠.”
“힘든 길이지만 선생님은 분명히 희열이나 감동이나 그런 것도 얻었다고 생각하는데요. 힘들기만 했다면 지금까지 재즈 하시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자식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달라지시나 봅니다.”
“그래요.(웃음)”
“왠지 연애 실컷 해본 어머니가 딸에게 ‘연애 별것 없으니까 너는 하지 마라’ 그런 소리 같다는 느낌도 드네요.(웃음)”
“그 비슷한 마음이죠.(웃음)”
재즈를 벗어나 이정식의 음악으로
이정식의 여섯 번째 앨범 『Moon Illusion』은 ‘이것이 재즈 음반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음악의 색채가 재즈에서 벗어나 있다. 정통 재즈 앨범도 계속 내 왔지만 궁극적으로 이정식이 하고 싶은 것은 재즈가 아니라 이정식의 음악을 하는 것이다.
“이번 앨범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귀기(鬼氣)가 흐른다고 할까, 무당이 멀리 떠나간 넋을 부르는 느낌이랄까요. 제가 재즈 문외한이다 보니 음반 속지의 평론 글은 잘 이해가 안 됐습니다.(웃음)”
“뭐, 좋은 말을 써 놨겠지요.(웃음) 『Moon Illusion』은 단순한 재즈 앨범이라고 하긴 어렵고, 민속적인 느낌, 아프리카 토속적인 느낌, 아방가르드적인 느낌을 담았어요. 굉장히 자유로운 느낌으로. 처음에 음반을 구상할 때 명상적이고 에스닉한 것을 생각해서 인도의 연주자들과 작업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여건상 어려워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죠.”
“국내 연주자들과 작업하셨던데요. 어떻게… 의도대로 연주가 풀렸나요?”
“네, 놀랄 정도로 첫 의도대로 녹음이 끝났어요.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음악이에요. 듣고 나서 사람들이 ‘어디에 속하는 음악이야?’라고 많이 물었어요. 그때마다 ‘이정식의 음악이야’라고 대답했죠.”
“음반을 낸다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 팔려야 한다는 것을 예상하고 내는 건데요. 상업성과 타협 없이 온전히 자기 색깔 그대로 음반을 내는 것이 부담스럽진 않으셨어요?”
“작업하면서 상업적인 부분, 그러니까 장사에 대한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런 음악을 찾는 사람도 있을 거야, 하고 생각했어요. 재즈라고 하면 흑인들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국적인 토양에 맞는 재즈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장사와 타협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는 없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할 생각이에요.”
재즈는 관록의 음악이다
1961년생인 이정식은 올해 마흔일곱이다. 무대에서 피로를 느낄 때다. 음악은 영혼과 몸이 함께 움직여주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멜로디가 머릿속에 맴돌아도 그것을 세상으로 끌어내 주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마흔일곱의 이정식도 육체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답답해했다. 젊었을 때는 20분 정도만 불어도 입술과 손가락이 풀렸는데 이제는 두 시간은 워밍업을 해야 몸이 풀린다.
“예전에 선배님들이 몇 시간 몸을 풀어야 입술과 손가락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이해를 못 했는데 이젠 제가 그런 거예요.”
“테크닉적인 성장은 이제 힘들지 않나요?”
“어느 분야든 그렇겠지만 젊었을 때 열심히 해 두어야 하죠. 젊었을 때는 하나를 배우면 열 개를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더는 늘지 않아요.”
“그럴 때 답답하진 않으세요?”
“이젠 안 되나 보다, 하고 포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욕심이 나니까 결국 계속 연습을 하게 되죠.”
“클래식 연주자는 나이가 들면 전성기 때 연주에 턱없이 못 미치는 연주를 할 수밖에 없는데요. 재즈 연주자는 어떤가요?”
“재주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녹아드는 맛이 있어서 오히려 감동이 더 늘죠. 물론 테크닉이나 실력은 젊은 애들을 못 따라가지만 관록이라는 게 있어요. 재즈는 관록의 음악이에요. 최세진 선배님처럼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설레요. 나도 나이 먹으면 저렇게 늙겠지 싶어서요.”
젊었을 땐 몸뚱이가 뿜어내는 활기와 열정으로 미숙한 정신을 끌고 갔다면, 나이가 든 후에는 넉넉한 영혼이 세월의 풍상으로 닳고 닳은 몸을 움직인다. 인간을 감동케 하는 건 결국 테크닉이 아니라 세월을 이겨낸 삶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정식은 스탄 게츠의 마지막 연주를 이야기했다. 폐암으로 죽기 직전에 했던 연주. 너무 힘들어 피아노에 의지하다시피 했던 그 연주를 CD로 들으면 참 대가의 엉성한 라이브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어떤 상황에서 연주를 했다는 것을 안다면 음악을 뛰어넘는 감동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한국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
이정식은 자신이 음악적인 정점은 지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아직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연주가가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음악적인 정점을 지났다고 해서 그가 음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곳을 지나쳤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정 그가 하고 싶은 음악은 이제 막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1년에 몇 차례씩 외국 연주를 가도 예전만큼 감흥이 없어요. 거기 가면 흑인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데, 그 음악이 내 것 같지 않거든요. 남의 옷을 입은 느낌.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 재즈 연주를 하는데 그때도 흑인 재즈를 별로 연주하지 않아요.”
“그럼 어떤 음악을 연주하시고 싶은가요?”
“‘저건 재즈가 아니야’라고 할 만큼 내 정체성이 표현된 음악, 한국적인 음악이요. 저는 흑인 음악보다 전원일기의 테마 음악이 더 내 것 같아요. 사람들도 흑인 재즈 음악보다 체화된 한국적 멜로디에 더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 같고요. 외국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지금 한국에서 한국 사람과 함께 연주하는 것이 저한테 더 의미가 있습니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는, 나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이정식은 83년에 신관웅 쿼텟(Quartet, 4인조)의 일원으로 데뷔하고 92년에 ‘밤으로 가는 기차’로 첫 앨범을 낸 후, 지금까지 꾸준히 재즈 아티스트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드물게 재즈로 한국적인 소리를 찾아가는 아티스트다.
조용히 여섯 번째 앨범 『Moon Illusion(달의 착시)』를 낸 이정식을 매일 밤 그가 ‘올댓재즈’ 청취자와 만나는 CBS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음악, 선입견 없이 그냥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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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에 방송이 나가서요. 생방송은 어려워요.”
“예전에 밤 열두 시였다가 두 시로 옮겨졌고 다시 청취자들의 요청 때문에 원래 시간으로 옮겨졌다고 들었는데요.”
“다시 두 시로 옮겨졌어요.”
“녹음은 늘 이 시간에 하시나요?”
“네, 보통 밤 여덟 시에 녹음을 시작해요.”
“이렇게 방송시간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봐도 한국에서 재즈를 즐기기에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걸 느끼는데요. 이런 환경에서 11년 동안 방송을 계속할 수 있었다니 대단한 것 같습니다.”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고 생각해요. 저뿐만 아니라 청취자들도 자부심을 느낄 만하죠.”
“재즈는 왜 어려운 음악이라는 선입견이 있을까요?”
“재즈가 딱히 어렵다기보다는 제목과 아티스트를 알아야 한다는 순간, 모든 음악이 재미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냥 그대로 즐기면 모든 음악이 다 좋을 텐데 말이죠.”
“영화 <스윙 걸즈>도 스윙 재즈를 소재로 한 영환데, 많은 사람이 영화에 삽입된 재즈 음악을 참 좋아했죠.”
“그래요. ‘올댓재즈’ 청취자의 90%는 그냥 재즈를 듣고 좋아해서 듣는 분들이에요. 재즈광은 10% 정도밖에 안 돼요. 부담 없이 듣는 것이 음악을 즐기는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이정식은 영화 <스윙 걸즈>에 삽입되었던 ‘Sing Sing Sing’를 흥얼거렸다. 재즈는 레코딩도 좋지만 직접 무대를 즐기는 게 더 즐겁다. 팽팽하게 긴장된 무대에서 재즈 연주자들이 소나기처럼 쏟아내는 음악을 맞노라면 심장이 쿵쿵쿵 뛴다. 음악 속에 푹 빠져 헤엄치는 느낌이다. 연주자의 즉흥 연주는 듣는 사람의 신경까지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그냥 듣는 건 즐겁잖아요. <스윙 걸즈> 음악 얼마나 신나요? 음악을 전혀 몰라도 즐기는 덴 아무 지장이 없어요. 아무 선입견 없이 편하게 듣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방송을 하시면서 청취자와 재즈를 매개로 소통하는 것도 즐거울 것 같은데요.”
“소수지만 재즈를 즐겁게 듣는 분들이 있어서 참 좋아요. 정말 재즈를 사랑하는 분들과 만나는 거니까요.”
“방송을 해서 좋은 점이 또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하게 돼요. 방송을 하다 보면 어떤 성향의 재즈가 요즘 유행인지, 어떤 아티스트가 주목받는지 제일 먼저 알게 되죠.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제 음악적인 토양도 풍부해지는 것 같습니다. 자극도 많이 받고요. 음악 하는 사람이 사실 말에 많이 서툴러요. 그런데 방송을 하면서 대화하는 법을 배웠어요.”
재즈가 나를 선택했다
아티스트가 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스스로 음악을 선택해 그 길을 가는 것이 첫 번째 길이다. 두 번째는 음악이 그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정식은 후자다.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주지 않아도 음악을 알았다. 중학교 때 음악을 시작한 후, 고등학교 때 색소폰을 배웠다. 스물한두 살 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반을 들으면서 그 음악이 어떤 장르의 음악인지도 모르면서 평생 이 음악이 내 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재즈라는 길을 걸어왔다.
“그래도 그런 마음이 있었으니 선뜻 어려운 음악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을까요? 처음부터 자기 재능의 양이나 질을 알게 된다면 음악을 업으로 삼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랬을지도 모르죠.”
“음악, 그것도 한국에서 재즈를 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잖아요. 가끔 내가 음악을 업이 아니라 취미로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해보신 적 없나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음악을 취미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나는 음악을 바라보는 것보다 음악 속에 있는 내가 더 좋아요. 프로와 아마추어는 입장이 다르죠. 프로기 때문에 접근할 수 있는 철학적인 차원이 있고, 프로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타인과 소통의 창이 열리는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이 참 좋죠. 잘하고 못하고의 의미가 아니라 음악 속에 푹 빠지는 그런 느낌 때문에 연주가는 무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재즈,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세요?”
“소통의 의미가 커요, 재즈는. 클래식은 정형화된 연주죠. 일단 관객은 연주자가 무엇을 연주할 줄 알고, 어떻게 연주할지도 어느 정도 아니까 소통의 의미가 크지 않아요. 그러나 재즈는 달라요. 지금 연주하는 나 자신도 다음에 어떤 소리가 나올지 몰라요. 메인에서 벗어나는 재즈일수록 그런 소통의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소통이라는 말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재즈로 표현할 수 있어요. 우주적인 차원이라고 말하면 너무 거창할까요. 다른 음악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재즈는 다른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청중이 느끼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이 굉장히 다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공통분모를 찾는 그 희열이 무척 좋아요.”
“아드님도 재즈 뮤지션의 길을 걷는다고 들었는데요.”
“나는 말렸어요. 너무 힘든 길이니까요. 안 했으면 싶었죠.”
“힘든 길이지만 선생님은 분명히 희열이나 감동이나 그런 것도 얻었다고 생각하는데요. 힘들기만 했다면 지금까지 재즈 하시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자식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달라지시나 봅니다.”
“그래요.(웃음)”
“왠지 연애 실컷 해본 어머니가 딸에게 ‘연애 별것 없으니까 너는 하지 마라’ 그런 소리 같다는 느낌도 드네요.(웃음)”
“그 비슷한 마음이죠.(웃음)”
재즈를 벗어나 이정식의 음악으로
이정식의 여섯 번째 앨범 『Moon Illusion』은 ‘이것이 재즈 음반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음악의 색채가 재즈에서 벗어나 있다. 정통 재즈 앨범도 계속 내 왔지만 궁극적으로 이정식이 하고 싶은 것은 재즈가 아니라 이정식의 음악을 하는 것이다.
“뭐, 좋은 말을 써 놨겠지요.(웃음) 『Moon Illusion』은 단순한 재즈 앨범이라고 하긴 어렵고, 민속적인 느낌, 아프리카 토속적인 느낌, 아방가르드적인 느낌을 담았어요. 굉장히 자유로운 느낌으로. 처음에 음반을 구상할 때 명상적이고 에스닉한 것을 생각해서 인도의 연주자들과 작업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여건상 어려워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죠.”
“국내 연주자들과 작업하셨던데요. 어떻게… 의도대로 연주가 풀렸나요?”
“네, 놀랄 정도로 첫 의도대로 녹음이 끝났어요.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음악이에요. 듣고 나서 사람들이 ‘어디에 속하는 음악이야?’라고 많이 물었어요. 그때마다 ‘이정식의 음악이야’라고 대답했죠.”
“음반을 낸다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 팔려야 한다는 것을 예상하고 내는 건데요. 상업성과 타협 없이 온전히 자기 색깔 그대로 음반을 내는 것이 부담스럽진 않으셨어요?”
“작업하면서 상업적인 부분, 그러니까 장사에 대한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런 음악을 찾는 사람도 있을 거야, 하고 생각했어요. 재즈라고 하면 흑인들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국적인 토양에 맞는 재즈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장사와 타협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는 없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할 생각이에요.”
재즈는 관록의 음악이다
1961년생인 이정식은 올해 마흔일곱이다. 무대에서 피로를 느낄 때다. 음악은 영혼과 몸이 함께 움직여주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멜로디가 머릿속에 맴돌아도 그것을 세상으로 끌어내 주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마흔일곱의 이정식도 육체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답답해했다. 젊었을 때는 20분 정도만 불어도 입술과 손가락이 풀렸는데 이제는 두 시간은 워밍업을 해야 몸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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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닉적인 성장은 이제 힘들지 않나요?”
“어느 분야든 그렇겠지만 젊었을 때 열심히 해 두어야 하죠. 젊었을 때는 하나를 배우면 열 개를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더는 늘지 않아요.”
“그럴 때 답답하진 않으세요?”
“이젠 안 되나 보다, 하고 포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욕심이 나니까 결국 계속 연습을 하게 되죠.”
“클래식 연주자는 나이가 들면 전성기 때 연주에 턱없이 못 미치는 연주를 할 수밖에 없는데요. 재즈 연주자는 어떤가요?”
“재주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녹아드는 맛이 있어서 오히려 감동이 더 늘죠. 물론 테크닉이나 실력은 젊은 애들을 못 따라가지만 관록이라는 게 있어요. 재즈는 관록의 음악이에요. 최세진 선배님처럼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설레요. 나도 나이 먹으면 저렇게 늙겠지 싶어서요.”
젊었을 땐 몸뚱이가 뿜어내는 활기와 열정으로 미숙한 정신을 끌고 갔다면, 나이가 든 후에는 넉넉한 영혼이 세월의 풍상으로 닳고 닳은 몸을 움직인다. 인간을 감동케 하는 건 결국 테크닉이 아니라 세월을 이겨낸 삶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정식은 스탄 게츠의 마지막 연주를 이야기했다. 폐암으로 죽기 직전에 했던 연주. 너무 힘들어 피아노에 의지하다시피 했던 그 연주를 CD로 들으면 참 대가의 엉성한 라이브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어떤 상황에서 연주를 했다는 것을 안다면 음악을 뛰어넘는 감동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한국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
이정식은 자신이 음악적인 정점은 지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아직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연주가가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음악적인 정점을 지났다고 해서 그가 음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곳을 지나쳤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정 그가 하고 싶은 음악은 이제 막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1년에 몇 차례씩 외국 연주를 가도 예전만큼 감흥이 없어요. 거기 가면 흑인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데, 그 음악이 내 것 같지 않거든요. 남의 옷을 입은 느낌.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 재즈 연주를 하는데 그때도 흑인 재즈를 별로 연주하지 않아요.”
“그럼 어떤 음악을 연주하시고 싶은가요?”
“‘저건 재즈가 아니야’라고 할 만큼 내 정체성이 표현된 음악, 한국적인 음악이요. 저는 흑인 음악보다 전원일기의 테마 음악이 더 내 것 같아요. 사람들도 흑인 재즈 음악보다 체화된 한국적 멜로디에 더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 같고요. 외국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지금 한국에서 한국 사람과 함께 연주하는 것이 저한테 더 의미가 있습니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는, 나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음악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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