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겁결에 꼽아본 ‘올해의 책’
명상서적을 즐겨 읽지 않는 내가 마음 다스리기 부류의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무심』을 선물 받은 덕분이다. 여기엔 어떤 인연의 끈이 작용하는데, 지난해 이맘 때 나는 제삼자의 부탁으로 낯모르는 누군가에게 내 책을 부쳤다.
200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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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서적을 즐겨 읽지 않는 내가 마음 다스리기 부류의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무심』을 선물 받은 덕분이다. 여기엔 어떤 인연의 끈이 작용하는데, 지난해 이맘 때 나는 제삼자의 부탁으로 낯모르는 누군가에게 내 책을 부쳤다.
『무심』은 다른 책 한 권과 함께 낯선 누군가로부터 거의 1년 만에 되받은 선물이다. 그에게 부쳐준 내 책값은 제삼자가 치렀으니, 나는 딱히 그의 선물을 받을 자격은 없다. 하지만 그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분은 내가 보내드린 책을 읽어주셨기 때문이다.
문화영의 『무심』(수선재, 2004, 필자는 2008년 1월 25일 펴낸 3판 3쇄를 읽음)은 표지와 속표지의 제목 중간에, 그러니까 ‘무’와 ‘심’ 사이에, 부제목으로 볼 수 있는 문구가 박혀 있다. “사람은 어떻게 자유로워지나?” ‘무심’하고 ‘명상’을 하면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무심(無心)이란 어떤 몰입의 경지로 보인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무심이 아니라 그때 그 한 가지만 하는 게 무심입니다. 다른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무슨 거창한 차원은 아닌 듯싶다. “밥 먹을 때도 이 생각 저 생각 하지 않고 그저 ‘맛있다’ 하면서 먹으면 그게 무심”이라니 말이다.
또 무심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진 않는다. “판단은 정확히 하되 거기에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얘기”다. “‘착함’의 기준을 ‘무심’이라고 하면 적절할 것 같다”라고도 한다. “누군가를 진짜 혼내주는 방법은 복수가 아니라 무심입니다.”
명상은 날마다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자기를 정돈하는 과정”이고 “자기 자리를 찾는 과정”이며,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명상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일정한 자세를 취하고 호흡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우리에게 어떤 이로움을 줄까?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이 맑아지면 경거망동을 하지 않는다. 자신감도 얻는다. “명상을 하다 보면 본질을 보는 눈이 개발되고 뭐든지 온몸으로 하게”된다. “명상은 인체의 상실됐던 DNA를 복원시켜 잃어버렸던 기능”까지 되찾게 해준다. 명상 또한 어떤 몰입의 경지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무심과 명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데 실패한다. 그래도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라는 조언은 크게 공감한다.
“남의 마음은 내 맘대로 안 됩니다. 내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은 철저히 내 것이고, 내 몸 밖에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일단 내 수중을 떠나면 내 소관이 아닙니다.”
130쪽의 ‘바닥 론’은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남편의 긍정적 음주 론’은 말이 안 된다. “남편이 너무 술을 많이 마신다? 집안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니까 그렇지, 집이 불안하면 못 그럽니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들어오게 됩니다.”
나중에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하면서도 오빠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매를 맞아주는 여동생의 태도를 긍정하는 이면엔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 나로선 알 길이 막막하다.
“전에 어떤 여학생이 왔었는데 어릴 때부터 오빠가 자기를 때렸답니다. 그런데 그냥 맞았답니다. 때리니까 도망을 가기도 하고 왜 때리느냐 고는 하지만 그냥 맞아주는 겁니다. 왜냐 하면 맞는 순간에 이미 상대방이 자기를 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책 서문에서 “되풀이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되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으로 ‘진화’를 풀이한 것도 썩 와 닿진 않았다. 진화는 달라진 생존환경에 적응하는 거다. 진화와 진보는 별개의 문제다. 진화가 “열정을 가지고 (남들이 한 발 가는데) ‘두 발’ 가는 것”이라는 책 후반부의 뜻풀이는 그나마 괜찮다.
법정 스님의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숲, 2008)는 산문의 품격을 맛보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 다스리기에도 그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법정 스님이 산중에 홀로 살면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맑고 향기롭게’ 소식지에 쓴 글을 모았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글들이 맑고 향기로울뿐더러 그윽하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상황이 있다. 남과 같지 않은 그 상황이 곧 그의 삶의 몫이고 또한 과제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업이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다. 할 일 없이 지내는 것은 뜻있는 삶이 아니다. 그때 그곳에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를 일으켜 세운다.”(「아궁이 앞에서」에서)
“산중에서 홀로 사는 우리 같은 부류들은 뭣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함께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단박에 해치울 일도 자꾸만 이다음으로 미루는 타성이다. 그때 그곳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그날의 삶이다. 그와 같은 하루하루의 삶이 그를 만들어간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없다. 스스로 만들어갈 뿐이다.”(「청소 불공」에서)
이 글의 주제가 되는 마음 다스리기로 돌아온다. “병원 대기실에서는 많은 인내력이 따라야 한다. 미리 예약된 시간에 서둘러 도착해도 자신의 이름 부르기를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때가 많다. 더러는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환자가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진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병원 출입이 잦은 나도 늘 느끼는 바다. 그런데 나는 법정 스님처럼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도 환자에게는 치유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기는커녕 짜증과 피곤함만 겹친다. 갈수록 더 그렇다.
“우리들의 성급하고 조급한 마음을 어디 가서 고치겠는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다리는 이런 병원에서의 시간이야말로 성급하고 조급한 생각도 함께 치료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 뒤부터는 기다리는 일이 결코 지루하거나 무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중매체가 마음 다스리기에 하나도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텔레비전 프로나 신문기사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영양가 없는 음식을 몸에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처럼 정신 건강에 해롭다.” 내가 텔레비전을 내다버린 지는 1년이 넘었으나, 신문은 아직 못 끊고 있다.
이참에 책을 가려 읽어야 한다는 「홀로 걸으라, 행복한 이여」에 나오는 법정스님의 ‘독서론’을 음미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시시한 책은 속물들과 시시덕거리는 것 같아서 이내 밀쳐 낸다. 내 귀중한 시간과 기운을 부질없는 일에 소모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결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금년부터는 세상에 쏟아져 나온 그 많은 책들을 엄밀하게 골라 읽기로 했다. 말을 달리하자면 친구를 사귀더라도 진솔하고 알찬 사람들과 사귀고 싶다는 표현이다.”
법정 스님에게 “좋은 친구란 주고받는 말이 없어도 마음이 편하고 투명하고 느긋하고 향기로운 사이다.” 좋은 친구를 이보다 더 어떻게 말하랴! 더할 나위없는 좋은 친구의 뜻매김이 나오는「좋은 말씀을 찾아」에선 ‘좋은 말씀’에 얽힌 일화가 눈길을 붙잡는다.
고참 스님을 뜻하는 ‘구참스님’은 참으로 정겨운 표현이다. 정말이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안거는 출가한 승려가 일정 기간 동안 외출을 금하고 한곳에 머무르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후주에서) ‘결제’는 안거가 시작되는 일을, ‘해제’는 안거를 마치는 일을 말한다.
“산골에서는 전자파보다는 고랭지의 밭에 수없이 뿌려 대는 독한 농약 때문에 벌들이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때 청정식품의 대명사이던 고랭지 채소를 농약을 들이부어 가며 재배하는 현실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아무튼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세기의 혁명가들’ 편 참조)과 더불어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국내저자의 ‘올해의 책’으로 강하게 추천한다.
‘관독일기(觀讀日記)’에도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다. 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는 1764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부터 11월 30일까지 날마다 보고 읽은 것을 『관독일기』에 담았다. 전업문필가 이지누는 이를 본떠 ‘관독일기’를 써왔다. 『이지누의 관독일기 잠명편 | 눈은 자도 마음은 자지 마라』(호미, 2008)는 그 여섯 해째 몫으로 2007년 10월 19일 중양절부터 2008년 1월 16일까지 90일 동안 읽고 쓴 글을 묶었다.
“2007년은 선인들의 글 중에서 되도록 잠(箴)과 명(銘)을 골라 읽었다. ‘잠’은 바늘, 곧, 침(鍼)에서 가져온 말이다. 침이란 병든 곳을 치유하거나 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인 만큼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예방하고 반성하며 결점을 보완하려고 짓는 글을 ‘잠’이라고 했다. 또 ‘명’이란 자신의 곁에 두고 있는 물건들을 면밀히 살펴 그 이름과 용처를 정확히 이해한 뒤에 그 기물에 스스로 반추하며 새기는 글을 말한다.”
아무리 공개된 것일지라도 남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마음은 가볍지 않다. 더구나 옛사람의 서릿발 같은 잠과 명을 담았음에랴. 하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요즈음 시대에 알맞으며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만은 말하지 못하겠다.”(‘책을 내면서’에서) 이것은 또한 내가 이 책에 담긴 선인의 가르침을 주워섬기기보다는 ‘후학’의 ‘새김질’에 더 주목하는 이유다.
“제자리를 알고 스스로 힘써 자신의 마음을 닦아 기르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 이쯤 살고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감출 일도 아니며 예서 멈출 일은 더더욱 아니다. 깨달았으니 몸과 마음을 움직여 행동할 차례인 것이다.”
“아! 그립기만 하다. 사람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말이다. 자연 속에서 깨닫고 사람에게서 뉘우치며 다시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마음과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들을 겪고 싶다.”
『이지누의 관독일기 잠명편 | 눈은 자도 마음은 자지 마라』를 내가 뽑은 ‘올해의 책’에 추가하는데 망설일 이유는 전혀 없을 것 같다.
참고로 저는 올해 나온 번역서 중에선 아래의 책들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거짓된 진실』(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아고라)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정병선 옮김, 이후)
『뮤지코필리아』(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알마)
셋 다 분량이 묵직하지만 한번 빠져들면 헤쳐 나오기가 쉽지 않지요. 소설로는 호우원용의 『위험한 마음』(한정은 옮김, 바우하우스)을 괜찮게 읽었습니다. 재출간된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이재형 옮김, 부키)는 나름대로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션 B. 캐럴의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화 이야기』(김명주 옮김, 지호)도 우수했습니다.
국내저자의 책으로는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창비)와 김종철의 『땅의 옹호』(녹색평론사)에다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_음반리뷰』(박준흠 외 지음, 선)를 덧붙이면 좋겠네요.
『무심』은 다른 책 한 권과 함께 낯선 누군가로부터 거의 1년 만에 되받은 선물이다. 그에게 부쳐준 내 책값은 제삼자가 치렀으니, 나는 딱히 그의 선물을 받을 자격은 없다. 하지만 그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분은 내가 보내드린 책을 읽어주셨기 때문이다.
문화영의 『무심』(수선재, 2004, 필자는 2008년 1월 25일 펴낸 3판 3쇄를 읽음)은 표지와 속표지의 제목 중간에, 그러니까 ‘무’와 ‘심’ 사이에, 부제목으로 볼 수 있는 문구가 박혀 있다. “사람은 어떻게 자유로워지나?” ‘무심’하고 ‘명상’을 하면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무심(無心)이란 어떤 몰입의 경지로 보인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무심이 아니라 그때 그 한 가지만 하는 게 무심입니다. 다른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무슨 거창한 차원은 아닌 듯싶다. “밥 먹을 때도 이 생각 저 생각 하지 않고 그저 ‘맛있다’ 하면서 먹으면 그게 무심”이라니 말이다.
또 무심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진 않는다. “판단은 정확히 하되 거기에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얘기”다. “‘착함’의 기준을 ‘무심’이라고 하면 적절할 것 같다”라고도 한다. “누군가를 진짜 혼내주는 방법은 복수가 아니라 무심입니다.”
명상은 날마다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자기를 정돈하는 과정”이고 “자기 자리를 찾는 과정”이며,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명상이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일정한 자세를 취하고 호흡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우리에게 어떤 이로움을 줄까?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이 맑아지면 경거망동을 하지 않는다. 자신감도 얻는다. “명상을 하다 보면 본질을 보는 눈이 개발되고 뭐든지 온몸으로 하게”된다. “명상은 인체의 상실됐던 DNA를 복원시켜 잃어버렸던 기능”까지 되찾게 해준다. 명상 또한 어떤 몰입의 경지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무심과 명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데 실패한다. 그래도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라는 조언은 크게 공감한다.
“남의 마음은 내 맘대로 안 됩니다. 내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은 철저히 내 것이고, 내 몸 밖에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일단 내 수중을 떠나면 내 소관이 아닙니다.”
130쪽의 ‘바닥 론’은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남편의 긍정적 음주 론’은 말이 안 된다. “남편이 너무 술을 많이 마신다? 집안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니까 그렇지, 집이 불안하면 못 그럽니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들어오게 됩니다.”
나중에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하면서도 오빠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매를 맞아주는 여동생의 태도를 긍정하는 이면엔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는지 나로선 알 길이 막막하다.
“전에 어떤 여학생이 왔었는데 어릴 때부터 오빠가 자기를 때렸답니다. 그런데 그냥 맞았답니다. 때리니까 도망을 가기도 하고 왜 때리느냐 고는 하지만 그냥 맞아주는 겁니다. 왜냐 하면 맞는 순간에 이미 상대방이 자기를 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책 서문에서 “되풀이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되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으로 ‘진화’를 풀이한 것도 썩 와 닿진 않았다. 진화는 달라진 생존환경에 적응하는 거다. 진화와 진보는 별개의 문제다. 진화가 “열정을 가지고 (남들이 한 발 가는데) ‘두 발’ 가는 것”이라는 책 후반부의 뜻풀이는 그나마 괜찮다.
법정 스님의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숲, 2008)는 산문의 품격을 맛보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 다스리기에도 그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법정 스님이 산중에 홀로 살면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맑고 향기롭게’ 소식지에 쓴 글을 모았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글들이 맑고 향기로울뿐더러 그윽하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주어진 상황이 있다. 남과 같지 않은 그 상황이 곧 그의 삶의 몫이고 또한 과제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업이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다. 할 일 없이 지내는 것은 뜻있는 삶이 아니다. 그때 그곳에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를 일으켜 세운다.”(「아궁이 앞에서」에서)
“산중에서 홀로 사는 우리 같은 부류들은 뭣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함께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단박에 해치울 일도 자꾸만 이다음으로 미루는 타성이다. 그때 그곳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그날의 삶이다. 그와 같은 하루하루의 삶이 그를 만들어간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없다. 스스로 만들어갈 뿐이다.”(「청소 불공」에서)
이 글의 주제가 되는 마음 다스리기로 돌아온다. “병원 대기실에서는 많은 인내력이 따라야 한다. 미리 예약된 시간에 서둘러 도착해도 자신의 이름 부르기를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때가 많다. 더러는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환자가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진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병원 출입이 잦은 나도 늘 느끼는 바다. 그런데 나는 법정 스님처럼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것도 환자에게는 치유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기는커녕 짜증과 피곤함만 겹친다. 갈수록 더 그렇다.
“우리들의 성급하고 조급한 마음을 어디 가서 고치겠는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다리는 이런 병원에서의 시간이야말로 성급하고 조급한 생각도 함께 치료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 뒤부터는 기다리는 일이 결코 지루하거나 무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중매체가 마음 다스리기에 하나도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텔레비전 프로나 신문기사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영양가 없는 음식을 몸에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처럼 정신 건강에 해롭다.” 내가 텔레비전을 내다버린 지는 1년이 넘었으나, 신문은 아직 못 끊고 있다.
이참에 책을 가려 읽어야 한다는 「홀로 걸으라, 행복한 이여」에 나오는 법정스님의 ‘독서론’을 음미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시시한 책은 속물들과 시시덕거리는 것 같아서 이내 밀쳐 낸다. 내 귀중한 시간과 기운을 부질없는 일에 소모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결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금년부터는 세상에 쏟아져 나온 그 많은 책들을 엄밀하게 골라 읽기로 했다. 말을 달리하자면 친구를 사귀더라도 진솔하고 알찬 사람들과 사귀고 싶다는 표현이다.”
법정 스님에게 “좋은 친구란 주고받는 말이 없어도 마음이 편하고 투명하고 느긋하고 향기로운 사이다.” 좋은 친구를 이보다 더 어떻게 말하랴! 더할 나위없는 좋은 친구의 뜻매김이 나오는「좋은 말씀을 찾아」에선 ‘좋은 말씀’에 얽힌 일화가 눈길을 붙잡는다.
고참 스님을 뜻하는 ‘구참스님’은 참으로 정겨운 표현이다. 정말이지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안거는 출가한 승려가 일정 기간 동안 외출을 금하고 한곳에 머무르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후주에서) ‘결제’는 안거가 시작되는 일을, ‘해제’는 안거를 마치는 일을 말한다.
“산골에서는 전자파보다는 고랭지의 밭에 수없이 뿌려 대는 독한 농약 때문에 벌들이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때 청정식품의 대명사이던 고랭지 채소를 농약을 들이부어 가며 재배하는 현실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아무튼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세기의 혁명가들’ 편 참조)과 더불어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국내저자의 ‘올해의 책’으로 강하게 추천한다.
‘관독일기(觀讀日記)’에도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다. 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는 1764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부터 11월 30일까지 날마다 보고 읽은 것을 『관독일기』에 담았다. 전업문필가 이지누는 이를 본떠 ‘관독일기’를 써왔다. 『이지누의 관독일기 잠명편 | 눈은 자도 마음은 자지 마라』(호미, 2008)는 그 여섯 해째 몫으로 2007년 10월 19일 중양절부터 2008년 1월 16일까지 90일 동안 읽고 쓴 글을 묶었다.
“2007년은 선인들의 글 중에서 되도록 잠(箴)과 명(銘)을 골라 읽었다. ‘잠’은 바늘, 곧, 침(鍼)에서 가져온 말이다. 침이란 병든 곳을 치유하거나 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인 만큼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예방하고 반성하며 결점을 보완하려고 짓는 글을 ‘잠’이라고 했다. 또 ‘명’이란 자신의 곁에 두고 있는 물건들을 면밀히 살펴 그 이름과 용처를 정확히 이해한 뒤에 그 기물에 스스로 반추하며 새기는 글을 말한다.”
아무리 공개된 것일지라도 남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마음은 가볍지 않다. 더구나 옛사람의 서릿발 같은 잠과 명을 담았음에랴. 하지만 “그것들이 반드시 요즈음 시대에 알맞으며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만은 말하지 못하겠다.”(‘책을 내면서’에서) 이것은 또한 내가 이 책에 담긴 선인의 가르침을 주워섬기기보다는 ‘후학’의 ‘새김질’에 더 주목하는 이유다.
“제자리를 알고 스스로 힘써 자신의 마음을 닦아 기르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 이쯤 살고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감출 일도 아니며 예서 멈출 일은 더더욱 아니다. 깨달았으니 몸과 마음을 움직여 행동할 차례인 것이다.”
“아! 그립기만 하다. 사람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말이다. 자연 속에서 깨닫고 사람에게서 뉘우치며 다시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마음과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들을 겪고 싶다.”
『이지누의 관독일기 잠명편 | 눈은 자도 마음은 자지 마라』를 내가 뽑은 ‘올해의 책’에 추가하는데 망설일 이유는 전혀 없을 것 같다.
***
참고로 저는 올해 나온 번역서 중에선 아래의 책들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거짓된 진실』(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아고라)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정병선 옮김, 이후)
『뮤지코필리아』(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알마)
셋 다 분량이 묵직하지만 한번 빠져들면 헤쳐 나오기가 쉽지 않지요. 소설로는 호우원용의 『위험한 마음』(한정은 옮김, 바우하우스)을 괜찮게 읽었습니다. 재출간된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이재형 옮김, 부키)는 나름대로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션 B. 캐럴의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화 이야기』(김명주 옮김, 지호)도 우수했습니다.
국내저자의 책으로는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창비)와 김종철의 『땅의 옹호』(녹색평론사)에다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_음반리뷰』(박준흠 외 지음, 선)를 덧붙이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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