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작업실
전성진 작가의 작업실 - 『몸을 두고 왔나 봐』
예기치 못한 베를린에서의 사고를 독보적인 입담으로 풀어놓았던 전성진 작가가, 농담의 뒷면에 남겨졌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글: 박소미
202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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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진 작가는 2023년 5월 28일 베를린의 볼더링 스튜디오에서 추락해 왼쪽 팔꿈치 인대 두 개가 파열되고 왼쪽 발목이 삼중 골절됐다. 3주 뒤 그는 셀럽 맷의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 265화에 출연해 사고 당일과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문제적이라 할 수 있는 농담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그의 농담은 전염성이 강했고, 해당 에피소드는 애플 팟캐스트 기준 ‘2023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공유된 에피소드’ 2위에 올랐다. 나도 그의 이야기에 전염된 청취자 중 한 명이었다.

 

같은 해 그가 볼더링 사고에 관해 연재한 뉴스레터 〈문제적 회복기〉를 착실하게 구독했고, 언젠가 이 이야기를 책으로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년 뒤 도착한 『몸을 두고 왔나 봐』는 “농담의 뒷면”을 담은 책이었다. 전성진은 “농담에 익숙한 나는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면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했으니, 이 책은 그가 도망치지 않고 농담의 뒷면에 고여 있던 시간을 응시한 기록이다. 어떤 사건은 우리를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든다. 우리가 무언가를 두고 왔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성진은 말한다. 두고 온 몸이 실타래처럼 풀어내는 이야기에 관해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몸을 두고 왔나 봐』 작업을 마친 후기를 들려주세요.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어서 집필 시작부터 끝까지 그저 놀랍기만 했습니다. 첫 번째 책이었던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는 하루에 A4용지 한 장 반씩 따박따박 써서 완성했거든요. 다음 날 약속이 있으면 전 날 세 장 쓰기도 하고, 잘 안 써지는 날이면 멈췄다가 다음 날 전날 치만큼 더 쓰기도 했어요. 이번 책을 쓰면서 그 경험이 얼마나 흔치 않은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다친 얘기, 어린 시절 기억 같은 걸 적다 보니 더 진도가 안나가더라고요. 거의 한 달은 아무 것도 못 썼습니다. 썼다 지웠다만 했어요. 다음 작업이 두려워질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책 이전에 팟캐스트와 뉴스레터를 통해 ‘볼더링 사고’를 한차례 다루셨습니다. 이번 책을 집필하며 좀더 들여다보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을까요?

베를린 볼더링 스튜디오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겪고 오랫동안 스스로가 낯설다는 감각을 느꼈어요. 팟캐스트 출연도, 뉴스레터도 어서 빨리 예전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더 사고에 대한 얘기를 많이 다뤘죠. 속에서 뭐든 꺼내 놓으면 해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잠시 동안은 괜찮았어요. 그런데 좀 지나면 다시 사고 장면이 떠오르고, 다칠 것 같고, 사는 게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편집자님께 다음 책 주제로 회복기를 써보고 싶다고 제안했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들여다 볼게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쓴다고 하면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반 집필 과정에서 고생한 것 같아요. 아무 것도 쓰지 못한 한 달은 들여다 보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통증의 뒷면에는 자주 외로움이 있습니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안네를 만나 드디어(!) 부상의 언어를 공유하던 중, 사고 이후 어떤 면에선 줄곧 외로웠음을 깨닫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독자 분들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최근 북토크에서 ‘지금의 성진이 과거의 다친 성진과 만날 수 있으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저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장이나 변신을 하고 저에게 가서 제가 다쳤던 경험을 나눴을 거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안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저에게 해주고 싶어요. 다쳤을 당시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다친 경험이 없는 사람들 뿐이었거든요. 위로와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한계가 있었어요. 한계를 느낄 때 특히 외로웠죠. 그래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안네에게 했듯 제가 겪었던 일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아니면 제 책을 선물해도 좋겠네요.

 

우리는 종종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소화하기 어려운 사건을 묻어둔 채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두고 온 과거를 다시 마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감각하기 아닐까요? 묻어두거나 두고 온 감정, 기억은 자기를 알아봐 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틈을 보다가 불쑥불쑥 올라온 거든요. 그때 감각으로 느끼고 알아 볼 줄 알아야 쫓아갈 수 있어요. 내가 뭘 두고 왔는지를 따라가는 첫 걸음인 거죠. 물론 무시하거나 외면해도 되지만, 그러면 예상치 못한 곳으로 튄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보다 다른 것에 의존하게 된다거나,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헷갈려 진다거나, 남탓을 한다거나요. 저도 능숙하지는 못해서 의식적으로 연습하려고 해요. 점점 익숙해지고 있어요.

 

책에 실린 일기에서 평생 죽음이 무서웠는데 이제 노화와 질병이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동시에, 그것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필연적인 미래임을 분명히 합니다.(90-91쪽) 사고 전후로 노화나 질병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평생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았는데요. 다치고 나서 ‘죽음이 축복이다’라는 말에 처음으로 공감했습니다. 미래에 안락사가 허용된다고 해도 내가 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만약 남은 생을 병상에서만 보내야 한다면 미련 없이 선택하지 않을까 해요. 놀랍게도 독실한 기독교인인 저희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시더라고요.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연명치료를 하는 사람을 많이 봤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셨어요. 

 

한편 책 속에서 작가님과 농담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드러납니다. 농담이 때로 방어기제가 되어 상처를 숨기기도 하지만, 농담의 옷을 입었기에 통과할 수 있었던 시간도 있습니다. 작가님께 농담이란.

저는 농담을 좋아하고 잘해요. 크든 작든 매력이자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겁이 나거나 도망치고 싶을 때 농담에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땐 제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농담이 저를 하는 것 같아요. 꼭 농담에 잡아먹히는 기분이죠. 그런 상황을 잘 감각해서 더 재미있고, 즐겁게 농담을 다루고 싶어요. 앞으로 다양한 사람에게 더 많은 농담을 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한 반려 [ _______ ]

박순순입니다. 한국 유기견보호소에서 베를린으로 해외입양 한 7살 강아지고요. 저와는 4년 반, 애인과는 3년 반을 살았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주보호자라 애인이 좀 아쉬워해서 애인의 성을 붙였습니다. 이번 책은 쓰기 힘들었던 만큼 순순이를 붙잡고 많이 징징거렸어요. 집에서 작업할 때는 10분에 한 번꼴로 순순이를 예뻐한다는 핑계로 순순이가 누워 있는 침대로 뛰어들어서 쓰다듬고, 얼굴 가지고 장난치고, 뽀뽀하고, 강아지처럼 몸을 뒤집으면서 재롱부리고……. 기타 등등의 기묘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순순이는 온몸으로 저의 애정표현을 받아준 마음이 넓은 강아지입니다.



작업실을 소개해 주세요. 

순순이를 돌봐야 하는 날에는 주로 집에서, 그렇지 않은 날에는 베를린 주립도서관(Staatsbibliothek zu Berlin)에서 작업을 했습니다. 집에서 하는 날에는 작업 효율이 엉망이에요. 갑자기 집청소를 하거나 하염없이 유튜브 릴스를 봐 버리곤 하거든요. 베를린 주립도서관은 건물이 꼭 ‘지식의 신전’처럼 생겨서 그런지 훨씬 더 집중이 잘됩니다. 아침 일찍 가서 좋은 자리를 맡아 놓고 밤 늦게 돌아오는 날도 많았어요. 여기 말고도 베를린은 도서관이 워낙 잘되어 있어서 동네에도 갈만한 곳이 많아요. 베를린에 오시면 카페투어 말고 도서관 투어 한 번 해보세요. 좋은 환경에서 작업하기 좋아요.


ⓒ Gunnar Klack

마감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마음 놓고 한 3, 4일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싶었는데요. 일하고 있는 카페가 바빠지기 시작해서 딱히 쉬지를 못했어요. 베를린에 이렇게나 카페가 많은데 대체 그 많은 손님이 어디서 나타나는 건지……. 놀라운 나날이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홍보하는 기간이 끝나면 바로 다른 마감을 시작해야 해요. 12월 말이나 1월 초에 찾아뵐 수 있을 듯한데 이번엔 연재가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열심히 일하고 마음이 편할 때 쉬어야겠어요. 지금은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아요.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작업 중 특히 재밌게 본 타인의 작품은 무엇인가요?

올해 저는 정말 『괴물들』에 빠졌었네요. 제가 몇 년 사이 가장 많이 고민한 주제를 다룬 책이기도 했고, 작가의 글솜씨가 맛깔나기도 해서요. 글이 안 써질 때 이 책, 저 책 어슬렁거리면서 구경을 했는데, 『괴물들』은 정말 빨리 읽었어요. 책에 나오는 영화를 찾아보기도 하고, 책 속의 실제 사건을 검색해 보기도 하고요. 지금 시대에 다뤄야 하지만 예민해서 선뜻 나서는 이가 없던 주제를 앞장서서 다룬 책이라 좋아요.

 


"후유증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과거를 인정하는 방식과 닮았다. 되돌릴 수 없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미련 없이 현재를 받아들이고 다가올 일에 집중하는, 결국에는 자유로워지는 여정이었다. 묘한 감각도, 폭력의 기억도 결국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이다." (195쪽)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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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두고 왔나 봐

<전성진>

출판사 | 안온북스

괴물들

<클레어 데더러> 저/<노지양> 역

출판사 |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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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미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쉽게 눈을 떼지 못하고 저장해 둡니다. 그 사람들...어떤 얼굴 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