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이 건네는, ‘사라진 주체’에서 보는 푼크툼의 순간 - 『교수대 위의 까치』
지난 18일 롯데시네마 홍대입구관에서 열린 45번째 ‘아름다운 책 人터뷰’에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초대됐다. 최근 출간된 『교수대 위의 까치』의 7장에 실린 ‘사라진 주체’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롤랑 바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이 기록은 중앙대 강단에선 사라졌지만 우리 앞에 더욱 자주 출몰하는 진 교수가 ‘왜 대중을 사로잡을까?’에 대한 작은 단초가 될지도 모르겠다.
200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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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자 진중권이 귀환(?)했다. 그는 최근 6년간 몸을 담았던 중앙대학교의 강단에서 사라졌다(?). 이유야 누구나 다 알 만한 비밀이고, 해당 학교에선 소동도 있었지만, 그는 그 사건으로 이전보다 더 알려졌고 유명하게 됐다.
이건 참 아이러니하다. 진중권은 (강단에서) 사라졌지만, 우리를 더욱 사로잡고 휘어잡았다.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진중권에 대한 ‘푼크툼’. 푼크툼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자세히 나오지만, 쉽게 말해, 필(feel)이 꽂혔다는 거다. ‘진중권’, 그 이름을 잘 모르던 사람까지 꽂히게 만든 마술적인 힘. 타의에 의해 ‘사라진 주체’가 됐지만, 개별적이고 고독하게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 진귀한 경험.
알다시피, 지금 TV는 지상파나 케이블이나 상관없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완전 대세다. ‘진짜 리얼’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지만, 리얼로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때문인지, 브라운관 속 리얼리티는 몸집을 키우고 있다. 특히나 케이블은 연예인들만의 리얼을 넘어, 일반인들이 종횡무진한다. 시청률은 덤이다. 뉴스를 만들고, 이슈가 된다.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감도 좁혀진다. 누군가의 말마따나(씨네21 이다혜), ‘리얼은 가짜 같아지고 가짜는 리얼 같아진다. 리얼리티 쇼의 재미는, 그 모든 경계가 불분명한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진 교수의 임용 탈락은 리얼리티쇼 같다. 진 교수는 진짜 잘린 것일까. 그건 리얼일까. 헷갈린다. 이라크전에 대한 보들리아르의 말(“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처럼 대중에게 더욱 익숙해진 그를 보자면, 현실(리얼리티)의 자리에 가상(가짜)이 들어와 있는 것?
지난 18일 롯데시네마 홍대입구관에서 열린 45번째 ‘아름다운 책 人터뷰’에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초대됐다. 최근 출간된 『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펴냄)의 7장에 실린 ‘사라진 주체’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롤랑 바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이 기록은 중앙대 강단에선 사라졌지만 우리 앞에 더욱 자주 출몰하는 진 교수가 ‘왜 대중을 사로잡을까?’에 대한 작은 단초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꽂히면 푼크툼, 아니 진크툼(진중권 푼크툼!)이고, 안 꽂히면 말고.
책의 콘셉트는 ‘낯설게 보기’다. “그림을 보다 보면, 표준적인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적이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면 이른바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것)’이 사람을 확 사로잡기도 하고,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왜 저러지? 왜 저렇게 했을까? 그런 그림을 모아보자고 해서 열두 꼭지를 모았다. 사실 더 있었다. 쓰다 보니 숫자에 대한 미신도 있고, (웃음) 열두 꼭지로 만들었다.”
또 이날 주제는 타의로 중앙대를 떠나게 된 그를 위해 학생들이 마련한 마지막 강의의 내용이었다. 강단에서 사라지게 된 교수가 학생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강의가 화가의 자화상을 다룬 ‘사라진 주체’라니, 재밌지 않나. 이건, 리얼인가, 아닌가. 강연을 엿보고 판단하시라.
진중권, 푼크툼을 회화에 꽂다
이번 책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푼크툼’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에서 빌린 개념이다. 롤랑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을 내세웠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로 사진을 보는 것이 스투디움이다. 우리는 신문, 『내셔널 지오그래피』 광고에 등장한 사진 등을 보고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별다른 예외가 없다. 그것이 스투디움이다.
반면 똑같은 제재를 보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꽂히는 것이 푼크툼.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이에겐 꽂힌다는 보장, 없다. 사진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우발적이고, ‘절대적인 우연 효과에 의해 발생한’(롤랑 바르트) 개념이다. 이는 롤랑 바르트의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 잘 나와 있다. 수잔 손탁과 함께 묶은 『사진론 : 바르트와 손탁』에서도 접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스투디움. “나는 이런 사진들에 대해 때로는 감동적인, 일종의 일반적인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감동은 도덕적, 정치적인 교양이라는 합리적인 중계를 거친다.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거의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 감정 상태에 속한다. (…) 그것은 스투디움이라는 말인데, 무엇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호의, 즉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스투디움은 코드화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다음은, 푼크툼. “두 번째 요소는 스투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스투디움과 박자를 맞추려고 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요소를 찾지 않고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이 낙인들, 이 상처들은 점이다. 이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 그러니까, 푼크툼은 찌른다. 개별적인 나를 찌른다는 것.
진 교수는 롤랑 바르트를 ‘찌른’ 두 개의 예를 제시한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가 어릴 때 온실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이에 사로잡혔다.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왜 나를 사로잡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이렇게 마술적인 힘, 사로잡는 힘을 푼크툼이라고 표현했다. 또 제임스 반 데어 지(James van der Zee)가 흑인 중산층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바르트는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의 벨트에 꽂힌 거다. 즉, 사진 주제와 상관없는 디테일에 그렇게 된 거다.”
그러나 이는, 사진의 개념이다. 피사체가 있어서, 지표성이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 푼크툼이다. 회화에는 기본적으로 피사체가 없기 때문에, 회화에 쓰기는 문제적 개념이라고 진 교수는 지적한다. “푼크툼은 향수적이다. 노스탤지어. 그게 얼마나 보편성을 가지겠나. 한편으로 유아론적이다. 나한테만 와 닿는 거다. 사진작가는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미학이 있다. 절대적 우연은 예술과 미학이 될 수 없고, 수용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진가들 사이에서는 푼크툼을 버리자는 말도 나온다.”
그럼에도 진 교수는 푼크툼이 버리기엔 참 아까운 개념이란다. 어떻게든 푼크툼을 살리고 싶다고 했다. “경직되고 좁은 것을 완화해서 나만이 겪는 체험이라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20여 년 전, 친구의 집에서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에 꽂힌 적이 있다. 또 아우구스트 잔더라는 사진작가가 있다. 사회과학적 사진을 찍고, 특정 주제만 찍는 유형학적 사진의 창시자다. 그 사람의 사진은 독일 사회를 읽어내는 사진이다. 그 사람의 「석탄 배달부」라는 사진이 확 들어왔는데, 3년 뒤 다른 작가의 같은 주제로 찍은 사진을 봤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한테 꽂힌 게 다른 사람에게도 꽂힐 수 있구나! 푼크툼도 전달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밀히는 안 된다. 회화에는 피사체가 없으니까.”
진 교수가 제시하는 것은, 푼크툼의 개념을 완화시켜 그림을 읽는 다양한 방법을 도출해보자는 것이다. 도상학이나 도상해석학적으로 보는 순간, 보편적으로 읽게 해주는 그런 코드가 아닌.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걸린 그림 가운데 너무 많이 알려진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냥 훌쩍 지나치기도 한다. 반면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혹은 작품 앞에 압도당하거나 꽂힐 수 있다. “표준 전과식의 설명도 아니고, ‘이게 뭐다’라고 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예술 작품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다양한 층위가 있다. 물론 표준적인 해석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말고 남들이 던지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남들이 하지 않는 답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 작품과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를 가지면, 작품 해석이 다양하고 풍부해지지 않을까.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고전이고 좋은 작품이다.”
그러니까, 『교수대 위의 까치』는 범례적인 책이다. 당신도 이렇게 할 수 있어. 한번 해 보라는 식의. 어떻게 접근하면 되느냐고? 진 교수의 팁은 검색을 통한, 경계를 넘나드는 길 찾아보기. “99.9% 구글에서 정보를 찾았다.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등 다양한 언어로 나온 자료를 통해 이 책을 썼다.”
자화상의 어떤 역사
이날의 주제로 들어가자. 요하네스 굼프(Johannes Gump, 1626~?). 듣보잡이라고? 맞다. 알려진 작품도, 찾을 수 있는 작품도 「자화상」밖에 없을 정도란다. 미술사를 찾아봐도 거의 나오지 않고, 쉽게 볼 수 있는 작가의 작품도 아니다. 그런데, 진 교수는 꽂.혔.다. 그러니까, 푼크툼.
이 작품 「자화상」, 희한하다. 주체가 3개다. 하나는 뒤통수, 다른 하나는 거울, 남은 하나는 캔버스. 즉 현실과 비현실, 더욱 비현실이 함께 나타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드러낸다. 그림을 보는 관객과 눈이 마주친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작가는 뒤통수만 보인다.
여기서 잠깐 자화상의 역사를 짚어 보고 가자. “자화상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 등장했다. 중세 때 화가는 개성이 없었다. 지금 앉아 있는 의자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듯, 중세까지 화가는 장인의 의미였다. 최초의 자화상은 역사화에 자신을 배치했다.” 그림의 일부이자 역사의 목격자로서의 화가 자신. “초기 르네상스의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이 묘사하는 신성한 사건에 목격자로서 참여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가령 아뇰로 가디(Agonolo Gadi, 1350~1396년)가 그린 산타 크로체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보자. 화면 왼쪽에 테두리에 몸이 반쯤 잘려나간 채로 한 사내가 서 있는데, 그 사내의 프로필은 화가가 그린 가족의 초상 속에 등장하는 본인의 옆얼굴과 일치한다.”(pp. 139~141)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 속의 화가가 그림 밖의 관객을 바라보게 된다. 필리피노 리피의 자화상이 바로 그것. 「시몬 마구스와의 논쟁과 베드로의 책형」의 경우다. “누가 화가인지 찾는 방법이 있다. 누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가. 그게 화가다.”
독립적인 화가의 자화상이 나오는 것은 타치아노와 바사리다. 다만 화가라는 사실은 강조되지 않았다. 그림의 왼쪽 끝에 아주 소심하게 붓이 들려 있음을 보여줄 뿐. “타치아노의 「자화상」을 보자. 옷이 화려하다. 나도 살 만큼 산다는 거다. 사회적 지위를 강조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인 양.” 물감을 묻혀가며 그림을 제작하는 공인(工人)으로서의 자부심은 그다지 찾아볼 수가 없다.
한 걸음 더 가보자. 안니발레 카라치의 「자화상」. 그림을 그리는 순간을 담았다. “카라치에 와서야 ‘나는 예술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라는 예술가의 자의식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굼프의 자화상
그렇다면, 굼프의 작품은 독창적이었을까. 카라치의 다른 그림, 「이젤 위의 자화상」을 보자. “카라치의 이 그림에는 화가(얼굴)가 없다. 주체가 없다. 저 멀리 창가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인물이 서 있다. 이건 재현에 대한 그림, 그림에 대한 그림이다. 메타적인 그림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얼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준다. 매우 현대적인 그림이다. 굼프는 이 그림을 봤을 것이다. 굼프는 카라치의 영향을 받았다.”
굼프가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회화의 자의식을 탐구한 셈이 됐다.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또는 거울을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pp.143~144)
카라치의 「이젤 위의 자화상」이나 굼프의 「자화상」은 가상이 현실을 압도한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의 문제. 복제가 원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보들리아르가 얘기한 개념을 17세기 화가들이 다룬 셈이다. 현실적 주체가 사라지면서 복제의 복제가 되고, 모방의 모방이 된다. 현실보다 재현이 더 현실적이다. 보들리아르는 말했다. ‘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의 끔찍함이 사라지고 게임 같은, 현실의 자리에 가상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1600년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비슷한 정서가 있었다.”
그 정서가, 바로 바니타스, 즉 ‘헛되다(Vain)’이다. 데이비드 데일리의 작품이 이를 잘 드러낸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 “17세기는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잖나. 삶이라는 게 가상이고, 연극이다, 허무하다, 같은 정서가 지배한 거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을 보면, 그림을 그린 베일리는 그림 속 사진에서의 모습일 때, 67세인가 그랬다. 나이가 많을 때 그렸는데, 그림은 젊을 때의 자신이 현실의 사진을 들고 있다. 뒤에 있는 모래시계, 해골, 쓰러져 있는 물잔, 꺼진 촛불은 바니타스, 즉 인생의 허망함을 드러낸다. 가상과 현실이 뒤바뀌었다.”
자화상은 진짜 나일까
진 교수는 지적한다. “거울을 보고 그린 것은 진정한 자화상이 아니다.” 눈을 빼서 보지 않는 이상,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은 타인이 자신을 본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화가들은 자기 얼굴을 그리기 위해 거울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렇게 그린 자화상은 실은 자기가 자기를 본 모습이 아니라,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자화상은 결국 타인을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p.151)
이에 에른스트 마흐는 그의 저서인 『감각의 분석』에서 「거울 없는 자화상」을 보여줬다. 말 그대로, 거울을 활용하지 않은 자화상이다. 단 하나 문제는, 얼굴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 이 그림에서는 소파에 길게 누운 몸과 자신을 그리는 손이 보인다. 얼굴의 일부가 드러나긴 하는데, 바깥을 향한 왼쪽 눈의 째진 틈과 그 사이로 보이는 코의 왼쪽 측면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그릴 때는 모종의 자기기만이 들어간다. 블로그에 자기 사진을 올리는데, 이것은 따지고 보면, 이상이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기 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거울을 볼 때의 생얼(민얼굴)이 진짜다. 일종의 허위의식인 거다. 정체성을 이상화할 때, 더 나은 나를 추동할 수도 있으나, 자기 소외를 불러오기도 한다.” 모종의 분열증이 끼어들게 되는 셈이다.
책에서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거울 단계’를 통해 설명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은 이상적 자아를 투사해놓고 현실의 자아의 불완전함을 보상받으려 한다. 화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상으로 구성한 이상적 자아를 현실의 무대 위에 연출하려 한다. 그 충동이야말로 어쩌면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를 성립시키는 모티프일지 모른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통해 자의식과 정체성을 주장할 때, 그들 역시 거울에 자신을 비춰놓고 그 이상적 자아를 화폭 위에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p.151)
“주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초상은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17세기 고전주의 인식론의 표상이며, 원본이 사라지고 복제가 자립성을 띠? 것은 17세기 바로크 세계 감정의 표상이다. 초상(재현)이 화가(주체)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립하는 데에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 불안함은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즉, 화가들은 다른 사물을 그릴 때와 달리 자화상을 그릴 때에는 거울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자화상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지도 모른다.”(pp. 148~150)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의 자화상
진 교수는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자화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설명한다. 굼프의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의 뒤통수를 보는데, 이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거울을 두 개 이상 쓰지 않는 한. 르네 마그리트의 「재현 금지」가 이를 잘 표현했다. “일종의 유체이탈인데, 착란증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가 자기의 몸에서 빠져나가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주체는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17세기에 일반적이었다. 제재가 아닌 재현에 대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 유명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대표적이다.” 즉, 이는 OBE(out-of-body experience).
두 번째는 자기 몸 안에서 있으면서 바깥에서 자기를 보는 경우다. ‘도플갱어’와 같은 것이다. 로비스 코린트의 「하얀 파자마를 입은 자화상」이나 빈센트 반 고흐의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이 대표적이다. 전자에서 화가는 오른손에 팔레트를, 왼손에 붓을 들고 있다. 그러나 코린트는 실제로는 오른손잡이였다. 자신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그린 것이다. 후자에서도 고흐는 실제로 잘라낸 왼쪽 귀가 아닌, 오른쪽 귀가 잘린 것으로 묘사했다. “만약 고흐가 (그림 속의 주체가) 자신이라고 인식했다면 (귀가 잘린 위치를) 바꿨을 것이다. 밤 12시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촛불을 켜고 3분 동안 뚫어지게 봐라. 그런 착란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웃음)” 이것은, AH(autoscopic hallucination).
세 번째 유형은, 내가 나를 보는데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다. HAS(heautoscopic)로 일컬어지며, 조반니 바티스타 파지의 「건축가 친구와 함께 있는 자화상」이 그렇다. 거울 속는 두 인물이 있다. 그런데, 누가 화가인지 헷갈린다. “이 그림은 이유가 있다. 화가는 건축가와 한 몸 같은 친구였다. 건축과 회화는 디자인(이탈리아어로 ‘disegno’)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한 몸이다시피 묘사한 것이다.”
느닷없이 왜 신경생리학이냐고? 굼프의 자화상은 그러니까, 세 번째 유형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하나의 인격이 현실, 거울, 화폭 위에서 삼중으로 분열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정작 현실의 모델은 얼굴이 없다. 거울 속의 얼굴은 시선을 회피한다. 오로지 캔버스 위의 얼굴만이 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관객의 주목을 자기한테로 잡아끈다. 복제의 복제, 모방의 모방에 불과한 캔버스 위의 얼굴이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현실성을 띠는 셈이다.”(p.157)
진 교수는 굼프가 남긴 또 다른 자화상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앞선 자화상과 달리, 포맷이 사각형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앞서의 것(원형)이 낫지 않나. 이건(사각형) 너무 화려하다. 아까 것은 집중도도 있고 단색이 중심이다. 사각 포맷의 캔버스라고 느껴진다. 원형은 거울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한 번 더 꼬아준다.”
굼프의 두 자화상의 결정적 차이이자 결정적 장면은, 눈이다. 거울에서 드러나는 눈의 위치가 다르다. 사각 포맷의 자화상은 거울 속 얼굴은 화가에게 시선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원형 포맷은 다르다. “분명 거울을 보는데, 눈을 안 맞추고 무시한다. 얼마나 섬뜩하나. 시선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관객과 눈을 맞추는 것은 캔버스의 것이다. 아주 작은 디테일이다. 주체가 사라진 것은 17세기에도 있었고 굼프 혼자 한 것은 아니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굼프의 작품에 꽂힌 것은 이런 아주 작은 디테일 때문이다. 이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굼프의 「자화상」이 진 교수를 사로잡은 이유. 그림은 이렇게도 볼 수 있음을 범례적으로 보여준 것. ‘모델-재현’의 상식적 관계를 무너뜨린 디테일. “재현은 모델과 상관없이 제 의지를 가지고 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이 나인가? 뒤통수를 보이는 저 머리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인가? 그것도 아니면 캔버스 위의 얼굴인가?”(p.159)
이날, 나는 거울을 볼 자신이 없었다. 왠지 내 시선을 피하면서 독자적으로 표정을 낼 것 같아서. 복제가, 시뮬라크르가 나를 압도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살짝 궁금하다. 이 글을 쓴 나는 리얼일까. 아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리얼일까.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거꾸로 시대는 과연 리얼일까. 우리는 언제쯤 다시 거울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거울을 통해 인민의 아픔과 소외를 다독이고 눈 맞춰야 할 통치자가 등을 돌린 이 현실, 리얼일까. 인민에게서 등 돌린 통치자가 거울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등을 돌리는 모습이면 어쩌지. 사라진 통치자. 사라진 인민. 아, 이런 푼크툼의 순간이라면, 정말 싫다.
알다시피, 지금 TV는 지상파나 케이블이나 상관없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완전 대세다. ‘진짜 리얼’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지만, 리얼로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때문인지, 브라운관 속 리얼리티는 몸집을 키우고 있다. 특히나 케이블은 연예인들만의 리얼을 넘어, 일반인들이 종횡무진한다. 시청률은 덤이다. 뉴스를 만들고, 이슈가 된다.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프로그램 사이의 거리감도 좁혀진다. 누군가의 말마따나(씨네21 이다혜), ‘리얼은 가짜 같아지고 가짜는 리얼 같아진다. 리얼리티 쇼의 재미는, 그 모든 경계가 불분명한 데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진 교수의 임용 탈락은 리얼리티쇼 같다. 진 교수는 진짜 잘린 것일까. 그건 리얼일까. 헷갈린다. 이라크전에 대한 보들리아르의 말(“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처럼 대중에게 더욱 익숙해진 그를 보자면, 현실(리얼리티)의 자리에 가상(가짜)이 들어와 있는 것?
지난 18일 롯데시네마 홍대입구관에서 열린 45번째 ‘아름다운 책 人터뷰’에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초대됐다. 최근 출간된 『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펴냄)의 7장에 실린 ‘사라진 주체’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롤랑 바르트의 마음을 사로잡았듯, 이 기록은 중앙대 강단에선 사라졌지만 우리 앞에 더욱 자주 출몰하는 진 교수가 ‘왜 대중을 사로잡을까?’에 대한 작은 단초가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꽂히면 푼크툼, 아니 진크툼(진중권 푼크툼!)이고, 안 꽂히면 말고.
책의 콘셉트는 ‘낯설게 보기’다. “그림을 보다 보면, 표준적인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적이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매력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반면 이른바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것)’이 사람을 확 사로잡기도 하고,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왜 저러지? 왜 저렇게 했을까? 그런 그림을 모아보자고 해서 열두 꼭지를 모았다. 사실 더 있었다. 쓰다 보니 숫자에 대한 미신도 있고, (웃음) 열두 꼭지로 만들었다.”
또 이날 주제는 타의로 중앙대를 떠나게 된 그를 위해 학생들이 마련한 마지막 강의의 내용이었다. 강단에서 사라지게 된 교수가 학생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강의가 화가의 자화상을 다룬 ‘사라진 주체’라니, 재밌지 않나. 이건, 리얼인가, 아닌가. 강연을 엿보고 판단하시라.
진중권, 푼크툼을 회화에 꽂다
이번 책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푼크툼’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에서 빌린 개념이다. 롤랑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을 내세웠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로 사진을 보는 것이 스투디움이다. 우리는 신문, 『내셔널 지오그래피』 광고에 등장한 사진 등을 보고 그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별다른 예외가 없다. 그것이 스투디움이다.
반면 똑같은 제재를 보더라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꽂히는 것이 푼크툼. 나한테는 꽂히지만, 다른 이에겐 꽂힌다는 보장, 없다. 사진과 나 사이의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 우발적이고, ‘절대적인 우연 효과에 의해 발생한’(롤랑 바르트) 개념이다. 이는 롤랑 바르트의 저서인 『카메라 루시다』에 잘 나와 있다. 수잔 손탁과 함께 묶은 『사진론 : 바르트와 손탁』에서도 접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스투디움. “나는 이런 사진들에 대해 때로는 감동적인, 일종의 일반적인 흥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감동은 도덕적, 정치적인 교양이라는 합리적인 중계를 거친다.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거의 길들이기에 가까운 ‘평균’ 감정 상태에 속한다. (…) 그것은 스투디움이라는 말인데, 무엇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호의, 즉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스투디움은 코드화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다음은, 푼크툼. “두 번째 요소는 스투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혹은 스투디움과 박자를 맞추려고 온다. 이번에는 내가 이 요소를 찾지 않고 그것 스스로가 마치 화살처럼 사건의 현장을 떠나 나를 꿰뚫기 위해서 온다. 이 낙인들, 이 상처들은 점이다. 이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 그러니까, 푼크툼은 찌른다. 개별적인 나를 찌른다는 것.
진 교수는 롤랑 바르트를 ‘찌른’ 두 개의 예를 제시한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가 어릴 때 온실에서 찍은 사진을 보다가, 이에 사로잡혔다. 지금은 없지만 존재했던 어머니의 사진이 ‘왜 나를 사로잡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이렇게 마술적인 힘, 사로잡는 힘을 푼크툼이라고 표현했다. 또 제임스 반 데어 지(James van der Zee)가 흑인 중산층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바르트는 오른쪽에 서 있는 여성의 벨트에 꽂힌 거다. 즉, 사진 주제와 상관없는 디테일에 그렇게 된 거다.”
그러나 이는, 사진의 개념이다. 피사체가 있어서, 지표성이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 푼크툼이다. 회화에는 기본적으로 피사체가 없기 때문에, 회화에 쓰기는 문제적 개념이라고 진 교수는 지적한다. “푼크툼은 향수적이다. 노스탤지어. 그게 얼마나 보편성을 가지겠나. 한편으로 유아론적이다. 나한테만 와 닿는 거다. 사진작가는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미학이 있다. 절대적 우연은 예술과 미학이 될 수 없고, 수용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진가들 사이에서는 푼크툼을 버리자는 말도 나온다.”
그럼에도 진 교수는 푼크툼이 버리기엔 참 아까운 개념이란다. 어떻게든 푼크툼을 살리고 싶다고 했다. “경직되고 좁은 것을 완화해서 나만이 겪는 체험이라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20여 년 전, 친구의 집에서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에 꽂힌 적이 있다. 또 아우구스트 잔더라는 사진작가가 있다. 사회과학적 사진을 찍고, 특정 주제만 찍는 유형학적 사진의 창시자다. 그 사람의 사진은 독일 사회를 읽어내는 사진이다. 그 사람의 「석탄 배달부」라는 사진이 확 들어왔는데, 3년 뒤 다른 작가의 같은 주제로 찍은 사진을 봤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한테 꽂힌 게 다른 사람에게도 꽂힐 수 있구나! 푼크툼도 전달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밀히는 안 된다. 회화에는 피사체가 없으니까.”
진 교수가 제시하는 것은, 푼크툼의 개념을 완화시켜 그림을 읽는 다양한 방법을 도출해보자는 것이다. 도상학이나 도상해석학적으로 보는 순간, 보편적으로 읽게 해주는 그런 코드가 아닌.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걸린 그림 가운데 너무 많이 알려진 작품 앞에서 우리는 그냥 훌쩍 지나치기도 한다. 반면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혹은 작품 앞에 압도당하거나 꽂힐 수 있다. “표준 전과식의 설명도 아니고, ‘이게 뭐다’라고 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예술 작품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다양한 층위가 있다. 물론 표준적인 해석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말고 남들이 던지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남들이 하지 않는 답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 작품과 개별적이고 고독한 관계를 가지면, 작품 해석이 다양하고 풍부해지지 않을까. 시대마다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고전이고 좋은 작품이다.”
그러니까, 『교수대 위의 까치』는 범례적인 책이다. 당신도 이렇게 할 수 있어. 한번 해 보라는 식의. 어떻게 접근하면 되느냐고? 진 교수의 팁은 검색을 통한, 경계를 넘나드는 길 찾아보기. “99.9% 구글에서 정보를 찾았다.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등 다양한 언어로 나온 자료를 통해 이 책을 썼다.”
자화상의 어떤 역사
이날의 주제로 들어가자. 요하네스 굼프(Johannes Gump, 1626~?). 듣보잡이라고? 맞다. 알려진 작품도, 찾을 수 있는 작품도 「자화상」밖에 없을 정도란다. 미술사를 찾아봐도 거의 나오지 않고, 쉽게 볼 수 있는 작가의 작품도 아니다. 그런데, 진 교수는 꽂.혔.다. 그러니까, 푼크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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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자화상」, 희한하다. 주체가 3개다. 하나는 뒤통수, 다른 하나는 거울, 남은 하나는 캔버스. 즉 현실과 비현실, 더욱 비현실이 함께 나타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드러낸다. 그림을 보는 관객과 눈이 마주친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작가는 뒤통수만 보인다.
여기서 잠깐 자화상의 역사를 짚어 보고 가자. “자화상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 등장했다. 중세 때 화가는 개성이 없었다. 지금 앉아 있는 의자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듯, 중세까지 화가는 장인의 의미였다. 최초의 자화상은 역사화에 자신을 배치했다.” 그림의 일부이자 역사의 목격자로서의 화가 자신. “초기 르네상스의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이 묘사하는 신성한 사건에 목격자로서 참여한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가령 아뇰로 가디(Agonolo Gadi, 1350~1396년)가 그린 산타 크로체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보자. 화면 왼쪽에 테두리에 몸이 반쯤 잘려나간 채로 한 사내가 서 있는데, 그 사내의 프로필은 화가가 그린 가족의 초상 속에 등장하는 본인의 옆얼굴과 일치한다.”(pp. 139~141)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 속의 화가가 그림 밖의 관객을 바라보게 된다. 필리피노 리피의 자화상이 바로 그것. 「시몬 마구스와의 논쟁과 베드로의 책형」의 경우다. “누가 화가인지 찾는 방법이 있다. 누가 나와 눈이 마주치는가. 그게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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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인 화가의 자화상이 나오는 것은 타치아노와 바사리다. 다만 화가라는 사실은 강조되지 않았다. 그림의 왼쪽 끝에 아주 소심하게 붓이 들려 있음을 보여줄 뿐. “타치아노의 「자화상」을 보자. 옷이 화려하다. 나도 살 만큼 산다는 거다. 사회적 지위를 강조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인 양.” 물감을 묻혀가며 그림을 제작하는 공인(工人)으로서의 자부심은 그다지 찾아볼 수가 없다.
한 걸음 더 가보자. 안니발레 카라치의 「자화상」. 그림을 그리는 순간을 담았다. “카라치에 와서야 ‘나는 예술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라는 예술가의 자의식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가상이 현실을 압도하는 굼프의 자화상
그렇다면, 굼프의 작품은 독창적이었을까. 카라치의 다른 그림, 「이젤 위의 자화상」을 보자. “카라치의 이 그림에는 화가(얼굴)가 없다. 주체가 없다. 저 멀리 창가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인물이 서 있다. 이건 재현에 대한 그림, 그림에 대한 그림이다. 메타적인 그림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얼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준다. 매우 현대적인 그림이다. 굼프는 이 그림을 봤을 것이다. 굼프는 카라치의 영향을 받았다.”
굼프가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회화의 자의식을 탐구한 셈이 됐다.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또는 거울을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pp.143~144)
카라치의 「이젤 위의 자화상」이나 굼프의 「자화상」은 가상이 현실을 압도한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자기동일성이 없는 복제)의 문제. 복제가 원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보들리아르가 얘기한 개념을 17세기 화가들이 다룬 셈이다. 현실적 주체가 사라지면서 복제의 복제가 되고, 모방의 모방이 된다. 현실보다 재현이 더 현실적이다. 보들리아르는 말했다. ‘이라크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의 끔찍함이 사라지고 게임 같은, 현실의 자리에 가상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1600년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비슷한 정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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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서가, 바로 바니타스, 즉 ‘헛되다(Vain)’이다. 데이비드 데일리의 작품이 이를 잘 드러낸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 “17세기는 이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잖나. 삶이라는 게 가상이고, 연극이다, 허무하다, 같은 정서가 지배한 거다. 「바니타스 상징들이 있는 자화상」을 보면, 그림을 그린 베일리는 그림 속 사진에서의 모습일 때, 67세인가 그랬다. 나이가 많을 때 그렸는데, 그림은 젊을 때의 자신이 현실의 사진을 들고 있다. 뒤에 있는 모래시계, 해골, 쓰러져 있는 물잔, 꺼진 촛불은 바니타스, 즉 인생의 허망함을 드러낸다. 가상과 현실이 뒤바뀌었다.”
자화상은 진짜 나일까
진 교수는 지적한다. “거울을 보고 그린 것은 진정한 자화상이 아니다.” 눈을 빼서 보지 않는 이상, (거울을 보고 그린) 자화상은 타인이 자신을 본 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화가들은 자기 얼굴을 그리기 위해 거울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렇게 그린 자화상은 실은 자기가 자기를 본 모습이 아니라,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자화상은 결국 타인을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다.”(p.151)
이에 에른스트 마흐는 그의 저서인 『감각의 분석』에서 「거울 없는 자화상」을 보여줬다. 말 그대로, 거울을 활용하지 않은 자화상이다. 단 하나 문제는, 얼굴이 제대로 나올 수 없다는 것. 이 그림에서는 소파에 길게 누운 몸과 자신을 그리는 손이 보인다. 얼굴의 일부가 드러나긴 하는데, 바깥을 향한 왼쪽 눈의 째진 틈과 그 사이로 보이는 코의 왼쪽 측면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그릴 때는 모종의 자기기만이 들어간다. 블로그에 자기 사진을 올리는데, 이것은 따지고 보면, 이상이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기 모습이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거울을 볼 때의 생얼(민얼굴)이 진짜다. 일종의 허위의식인 거다. 정체성을 이상화할 때, 더 나은 나를 추동할 수도 있으나, 자기 소외를 불러오기도 한다.” 모종의 분열증이 끼어들게 되는 셈이다.
책에서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거울 단계’를 통해 설명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은 이상적 자아를 투사해놓고 현실의 자아의 불완전함을 보상받으려 한다. 화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상으로 구성한 이상적 자아를 현실의 무대 위에 연출하려 한다. 그 충동이야말로 어쩌면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를 성립시키는 모티프일지 모른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통해 자의식과 정체성을 주장할 때, 그들 역시 거울에 자신을 비춰놓고 그 이상적 자아를 화폭 위에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p.151)
“주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초상은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17세기 고전주의 인식론의 표상이며, 원본이 사라지고 복제가 자립성을 띠? 것은 17세기 바로크 세계 감정의 표상이다. 초상(재현)이 화가(주체)에게서 떨어져 나와 자립하는 데에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 불안함은 자화상이라는 장르 자체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즉, 화가들은 다른 사물을 그릴 때와 달리 자화상을 그릴 때에는 거울을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자화상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지도 모른다.”(pp. 148~150)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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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교수는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자화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설명한다. 굼프의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의 뒤통수를 보는데, 이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거울을 두 개 이상 쓰지 않는 한. 르네 마그리트의 「재현 금지」가 이를 잘 표현했다. “일종의 유체이탈인데, 착란증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가 자기의 몸에서 빠져나가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주체는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17세기에 일반적이었다. 제재가 아닌 재현에 대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 유명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가 대표적이다.” 즉, 이는 OBE(out-of-body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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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자기 몸 안에서 있으면서 바깥에서 자기를 보는 경우다. ‘도플갱어’와 같은 것이다. 로비스 코린트의 「하얀 파자마를 입은 자화상」이나 빈센트 반 고흐의 「붕대로 귀를 감은 자화상」이 대표적이다. 전자에서 화가는 오른손에 팔레트를, 왼손에 붓을 들고 있다. 그러나 코린트는 실제로는 오른손잡이였다. 자신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그린 것이다. 후자에서도 고흐는 실제로 잘라낸 왼쪽 귀가 아닌, 오른쪽 귀가 잘린 것으로 묘사했다. “만약 고흐가 (그림 속의 주체가) 자신이라고 인식했다면 (귀가 잘린 위치를) 바꿨을 것이다. 밤 12시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촛불을 켜고 3분 동안 뚫어지게 봐라. 그런 착란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웃음)” 이것은, AH(autoscopic hallucination).
세 번째 유형은, 내가 나를 보는데 어디에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다. HAS(heautoscopic)로 일컬어지며, 조반니 바티스타 파지의 「건축가 친구와 함께 있는 자화상」이 그렇다. 거울 속는 두 인물이 있다. 그런데, 누가 화가인지 헷갈린다. “이 그림은 이유가 있다. 화가는 건축가와 한 몸 같은 친구였다. 건축과 회화는 디자인(이탈리아어로 ‘disegno’)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한 몸이다시피 묘사한 것이다.”
느닷없이 왜 신경생리학이냐고? 굼프의 자화상은 그러니까, 세 번째 유형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하나의 인격이 현실, 거울, 화폭 위에서 삼중으로 분열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정작 현실의 모델은 얼굴이 없다. 거울 속의 얼굴은 시선을 회피한다. 오로지 캔버스 위의 얼굴만이 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관객의 주목을 자기한테로 잡아끈다. 복제의 복제, 모방의 모방에 불과한 캔버스 위의 얼굴이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현실성을 띠는 셈이다.”(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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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교수는 굼프가 남긴 또 다른 자화상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앞선 자화상과 달리, 포맷이 사각형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앞서의 것(원형)이 낫지 않나. 이건(사각형) 너무 화려하다. 아까 것은 집중도도 있고 단색이 중심이다. 사각 포맷의 캔버스라고 느껴진다. 원형은 거울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한 번 더 꼬아준다.”
굼프의 두 자화상의 결정적 차이이자 결정적 장면은, 눈이다. 거울에서 드러나는 눈의 위치가 다르다. 사각 포맷의 자화상은 거울 속 얼굴은 화가에게 시선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원형 포맷은 다르다. “분명 거울을 보는데, 눈을 안 맞추고 무시한다. 얼마나 섬뜩하나. 시선의 흐름이 만들어지고 관객과 눈을 맞추는 것은 캔버스의 것이다. 아주 작은 디테일이다. 주체가 사라진 것은 17세기에도 있었고 굼프 혼자 한 것은 아니나, 전혀 알려지지 않은 굼프의 작품에 꽂힌 것은 이런 아주 작은 디테일 때문이다. 이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굼프의 「자화상」이 진 교수를 사로잡은 이유. 그림은 이렇게도 볼 수 있음을 범례적으로 보여준 것. ‘모델-재현’의 상식적 관계를 무너뜨린 디테일. “재현은 모델과 상관없이 제 의지를 가지고 따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것이 나인가? 뒤통수를 보이는 저 머리인가? 아니면 거울 속의 얼굴인가? 그것도 아니면 캔버스 위의 얼굴인가?”(p.159)
이날, 나는 거울을 볼 자신이 없었다. 왠지 내 시선을 피하면서 독자적으로 표정을 낼 것 같아서. 복제가, 시뮬라크르가 나를 압도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살짝 궁금하다. 이 글을 쓴 나는 리얼일까. 아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리얼일까.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거꾸로 시대는 과연 리얼일까. 우리는 언제쯤 다시 거울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거울을 통해 인민의 아픔과 소외를 다독이고 눈 맞춰야 할 통치자가 등을 돌린 이 현실, 리얼일까. 인민에게서 등 돌린 통치자가 거울 속에서 우리에게 계속 등을 돌리는 모습이면 어쩌지. 사라진 통치자. 사라진 인민. 아, 이런 푼크툼의 순간이라면,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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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