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는 “이 책의 메시지를 너무 단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며, “유토피아 사회의 핵심을 재산공유제로 규정하고 모어를 최초의 공산주의 사상가로 받아들인 카우츠키 식의 해석이 대표적인 오독의 사례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옮긴이의 카우츠키 식 해석에 대한 ‘단죄’가 영 불편했다.
본문 제2부 16번 각주를 통해 “땅을 경작하지 않은 채 방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연법칙에 따라 그 땅을 이용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유토피아 사람들의 주장을 ‘제국주의 논리’로 규정한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이상적인 독자는 곧 이 책을 통해 영적인 가치에 눈뜨는 사람”(「해제」)이라는 데에는 다소 회의적이다.
사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 5년간 머물렀던 포르투갈인 뱃사람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의 입을 빌려 수시로 사유재산제를 비판한다.
“그런데 모어 씨, 내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돈이 모든 것의 척도로 남아 있는 한, 어떤 나라든 정의롭게 또 행복하게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 최악의 시민들 수중에 있는 한 정의는 불가능합니다.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수는 불안해하고 다수는 완전히 비참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토머스 모어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에선 사람들이 잘살 수 없다고 반박한다.
“모든 사람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할 텐데 어떻게 물자가 풍부하겠습니까? 이익을 얻을 희망이 없으면 자극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려 하고 게을러질 것입니다.”
제1부의 간략한 소개에 이어 제2부에선 유토피아의 지형, 강, 도시, 사람들, 관습, 제도, 법 등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가 유토피아의 이모저모를 설명한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하루 24시간 중 여섯 시간만 일에 할당합니다. 이들은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식사를 한 후에는 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나머지 세 시간 일을 하러 갑니다. 그 후에 식사를 하고 8시에 취침하여 여덟 시간을 잡니다.”
「해제」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에라스무스의 『바보 예찬』에 화답한 작품이다. “이 텍스트에 모어는 라틴어 식으로 ‘누스쿠아마Nusquama(아무데에도 없는 곳)’라는 제목을 붙였고, 에라스무스와 모어는 서신교환을 하면서 이 저작을 ‘우리의 누스쿠아마’라고 불렀다. 모어는 영국으로 돌아온 다음 라틴어 식 이름인 누스쿠아마를 그리스어 식 이름인 유토피아Utopia로 바꾸었다.”
유토피아는 ‘아무데에도 없는 곳’이지만,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소장 국문학자 서신혜의 『조선인의 유토피아』(문학동네, 2010)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동양의 이상사회는, 모든 것이 천부적으로 충족된 신화적 이상공간인 산해경형(山海經型), 도교적 이상공간이되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신국(神國)인 삼신산형(三神山型), 인위적 권력을 배제하여 현실 속에 이룬 이상공간인 무릉도원형(武陵桃源型), 현실 속에 이룩한 유교적 이상공간인 대동사회형(大同社會型)으로 나뉜다.”
우리 옛 선조들의 문집이나 각종 설화에도 이상향을 가리키는 표현은 숱하다. “옥야(沃野)는 비옥한 땅을 나타내는 말이니 뛰어난 생산력을 강조한 용어이고, 복지(福地)는 아름다운 계곡이나 동굴 속 세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낙토(樂土)는 낙원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 힘든 것이 없는 즐거운 땅이라는 의미이며, 부산(富山)은 물자가 풍족하여 가난이 없다는 의미를, 선경(仙境)은 신선이 살 만큼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상향을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으로는 청학동(靑鶴洞), 이화동(梨花洞), 동천(洞天), 단구(丹邱), 회룡굴(回龍窟) 등이 있다. 한편 다산 정약용이 소개한 미원(薇源)은 우리 선인들이 그려온 이상세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세상과 단절하여 오가지 않으면서, 누구나 땀 흘려 일하며, 최소한의 예의범절로 사회의 규칙을 지켜가는 소규모 가족 공동체가 바로 우리 선인들이 그린 이상세계요, 또한 미원이라는 이상세계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에서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비중은 높다. <몽유도원도>는 안견(安堅)이 안평대군의 명을 받들어 그렸다. 안평대군이 꾼 꿈 이야기를 토대로 안견은 사흘 만에 <몽유도원도>를 완성했다. 그런데 안평대군의 꿈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엇갈린 행보는 꽤 시사적이다.
프랑스 과학자 알베르 자카르(Albert Jacquard, 1925- )에게 유토피아는 ‘바람직한 미래상’이다. 또 그걸 제시하는 것은 일종의 당위다. 알베르 자카르의 『나의 유토피아(Mon Utopie)』(채계병 옮김, 이카루스미디어, 2009)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이 하나의 의무인 나이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그의 “유토피아는 교육에 관한 계획”이다. 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꿈을 묘사하는데 그치는 유토피아는 유용하기보다는 해롭다.” “반면 ‘왜 안 되는데?’라는 반문으로 받아들여질 때 유토피아는 역동적 창조력의 근원으로 새롭게 힘을 얻을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알베르 자카르는 오늘날 현실과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변화 계획이 ‘왜 안 되는데?’라는 반문으로 받아들여지는 영역들 중 몇 가지를 든다. 그중에서 “치료가 행해져야 하는 것은 치료로 인해 앞으로 사회에 발생할 수익 때문이 아니라 환자가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공동체는 당연히 그에 대한 도움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치료받을 권리」)
「정보에 대한 권리」의 측면에선 “첨단 정보과학 기술의 행복한 귀결은 중요하지만 그 영향이 너무 새롭고 광범위해 그 위험성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알베르 자카르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의 틀은 다음과 같다.
“진화의 고리 한마디를 보태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인간, 어떤 종도 이제까지 탐험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는 인간,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인간, 특히 자신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인간이다.”
일견 비슷해보여도 ‘유토피아 이야기’ 세 권의 구색은 제각각이다. 과학평론가 이인식이 쓰고 엮은 『유토피아 이야기』(갤리온, 2007)는 “이상사회를 묘사한 대표적인 저술을 문학작품 위주로 골라서 그 내용을 간추려 놓은 유토피아 길라잡이”다. 플라톤의 『국가』부터 조지 오웰의 『1984』까지 유토피아 걸작 아홉 편에 대해서 저자와 줄거리를 살피고 중요한 내용을 발췌했다.
서양의 이상사회는 코케인, 아르카디아, 천년왕국, 유토피아의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먼저 코케인(Cockayne)은 가장 환상적이다. “도처에 꿀과 포도주 강물이 넘쳐흐르고 누구나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는 지상낙원이다. 모든 사람이 성과 노동에서 해방되어, 환희와 열락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는 환락향이다. 코케인은 농민과 노동자 등 가난한 사람이 꿈꾸는 천국이다. 세계 각국의 민담과 설화에는 코케인에의 소망이 담겨 있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의 산악지대를 가리키는 아르카디아(Arcadia)는 “아름다운 풍광과 순박한 인정을 지닌 목가적 이상향을 뜻한다.” 무한한 풍요의 세계라는 점에서 코케인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코케인이 무절제한 쾌락을 추구하는 반면 “아르카디아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절제가 있다.” 아르카디아는 “자연적 풍요의 개념에 도덕적 의미가 첨가된 이상사회”다.
천년왕국(Millennium)은 성서의 「요한계시록」에서 유래한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예수가 재림하여 그의 왕국을 건설한 후 최후의 심판이 오기까지 천 년 동안 지배하게 되어 있다. 천년왕국은 역사의 종말이 오기 전에 의롭고 착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이상향이다.” 유토피아는 세 유형에 비해 현실적이지만, 이들의 핵심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
“네 유형의 이상사회는 성격을 달리한다. 코케인과 아르카디아는 과거에 속하지만 천년왕국과 유토피아는 미래에 존재한다. 코케인이 인간의 욕구 충족이 포화 상태인 환락원이라면 아르카디아는 욕망이 절제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안식의 고향이다. 천년왕국은 신의 섭리에 의해 실현되지만, 유토피아는 인간의 의지로 성취된다.”
‘유토피아 이야기’의 원조 격인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 1895-1990)의 『유토피아 이야기(The Story of Utopias)』(박홍규 옮김, 텍스트, 2010)에선 유토피아를 도피 유토피아와 재건 유토피아로 구분한다.
“도피 유토피아는 외계를 그대로 방치하는 반면, 재건 유토피아는 외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재건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그 생활 조건 위에서 유토피아와 교섭할 수 있게 된다. 도피 유토피아는 사상누각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고, 재건 유토피아는 측량사나 건축가나 벽돌공과 상담하여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집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루이스 멈퍼드는 유토피아라는 분리된 현실을 탐구한다. “이상국으로 분류되는 유토피아 그 자체는, 훌륭한 도시라는 형태의 공동체와 함께 ‘좋은 생활’을 과감하게 추구하는 하나의 독립된 세계다.” 개인의 유토피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행위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유토피아는 그것을 낳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즐거운 곳”이며, “우리가 유토피아를 여행하는 유일한 이유는 유토피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문학평론가 임철규의 『왜 유토피아인가』(민음사, 1994/한길사, 2009)는 ‘유토피아, 문학, 이데올로기에 관한 비평’이다. 여기선 이 책의 표제 글만 살펴본다. 먼저 유토피아의 뜻풀이다. “이 말은 그 어원 자체가 어원상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뜻 때문인지 부정적인 동시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은 부정적인 측면으로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꿈이 실현되는,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제거되어 욕망과 그 성취 사이에 그 어떤 긴장과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곳’”이다.
“어떤 개념에 기대든 간에 유토피아는 이상사회를 표방하는 까닭에 당위의 세계이며, 현실에 대한 제도적인 비판과 개혁을 위한 제안을 하므로 또한 규범의 세계”다. 유토피아적 비전은 미래를 지향한다. “유토피아는 도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와 유토피아는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유토피아로 향하는 노력이지 그 성취는 아닌 것이다.”
최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