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지지율 87%, 오바마도 극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 2014년 그의 행보는? - 레임덕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레임덕은 없다”고 잘라 말하지만 레임덕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정권 말기에 레임덕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201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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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
레임덕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레임덕은 없다”고 잘라 말하지만 레임덕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정권 말기에 레임덕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어느 누군가에게 레임덕은 먼 얘기다. 2011년 1월 1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의 이야기다. 퇴임 2주를 앞두고 펼친 여론조사에서 룰라는 87%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퇴임하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이렇게 높은 것은 여론조사가 생긴 이후로 브라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브라질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초유의 일이 아닐까 싶다.
지지율이 말해주듯 룰라는 브라질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룰라의 집권기에 브라질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2003~2008년까지 브라질 빈곤층은 43%가 줄어들었고, 인구 1억 9000여만 명 중 빈곤층에 속하던 3200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또 룰라 집권 첫해 12.3%였던 실업률은 6%대로 내려왔다. 8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브라질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8위로 부상했다. 또 그동안 브라질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채무국 신세에서 채권국으로 탈바꿈했다.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도 유치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2010년 브라질 대선에서 여당의 지우마 호세프 후보뿐만 아니라 야당의 조제 세하 후보까지 모두 룰라를 전면에 내세우고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사회민주당 조제 세하 후보는 대선을 앞둔 2010년 9월 “역사적 인물 룰라와 세하, 경험 있는 두 지도자”란 광고를 내보냈고, “내가 룰라의 정책을 지속시킬 적임자”라고 호소했다.1) 지우마 호세프 후보는 즉각 이를 비판했다. 해프닝 아닌 해프닝이 일어난 셈이다.
여당도 아니고 야당에서 룰라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룰라의 압도적인 지지율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선과 총선을 같이 치른 이번 선거의 포스터와 정치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은 퇴임을 앞둔 룰라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라고 지칭한 것도 과장이 아닌 셈이다.2)
선반공 출신 노조지도자에서 브라질의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된 룰라. 과연 룰라는 어떻게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차근차근 살펴보자.
노동자에서 정치인으로
룰라는 1945년 브라질 북동부의 가난한 마을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도 길거리에서 땅콩이나 사탕을 팔아야 했던 그는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상태로 15세 무렵부터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세 때는 옆 동료의 실수로 프레스에 깔려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1963년 룰라는 상파울로 외곽에 있는 산업지대인 ABC 공업단지(Santo Andre, Sao Bernardo, Sao Caetano)에 있는 자동차 공장 선반공으로 취직했다. 당시 공장에 다니고 있던 그의 형이 노조 가입을 권유했지만 룰라는 처음에 노조 활동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독학과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자격증을 딴 뒤 이 자격증을 인정해주고 처우를 개선해줄 것을 고용주에게 요구했지만 거절당한다. 그때 형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1966년 노조에 가입하게 된다.3)
1969년 공장노동자였던 임신 9개월의 아내를 간염으로 잃은 룰라는, 그해에 상베르나르도 금속노조 대의원을 맡았고, 1972년 금속노조 사회복지부문 제1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1975년에는 14만여 명의 노동조합원 중 92%의 지지를 얻어 상베르나르도 금속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당시만 해도 노동조합은 정치적인 입장 표명보다는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등에 몰두하고 있던 때였다. 룰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1977년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브라질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노사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할 때 세계은행의 비밀보고서가 언론에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가 공식적인 인플레 수치를 조작해 발표한 것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 바람에 노동자들은 34.1%에 이르는 임금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룰라는 곧 금속노조를 이끌고 투쟁에 나선다. 1978년 5월의 일이다. 파업투쟁의 성격은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정부와 노동법원의 노사관계 개입 거부, 노동법의 개정, 노조활동의 자유보장 등 점차 정치적인 성향이 짙어졌다.4)
때마침 이해에 브라질 정부와 의회는 필수 기간산업 부문에 대한 파업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키자 파업은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5) 1979년 3월 금속노동자들은 다시 한번 총파업을 선언했다. 임금인상과 현장에 대한 통제력 증대를 요구하는 파업이었다. 정부는 곧 파업이 불법이라며 탄압을 시작했다. 그러나 야당은 이런 파업에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룰라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9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0년 2월 10일 상파울루에서 브라질 노동자당(PT)이 탄생했다. 당시 PT당은 창립 문건에서 “노동자들은 기존의 경제, 사회, 정치 제도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정치인들과 정당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데 지쳤다. 노동자당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의지로 탄생했다”고 밝히고 있다.6)
또 “방에 앉아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는 사람들의 고루한 이데올로기와 자기도취는 이제 끝내야 한다. 당은 이론의 산물이 아닌 24시간 실천의 산물이다”라고 선언했다.7) PT당에 대해 룰라가 “브라질 역사상 엘리트의 뜻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최초의 정당”이라고 말한 것처럼 PT당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정당이었다.8)
PT당을 만들고 지도자가 된 룰라는 1980년 4월 또 한번 총파업을 벌인다. 48시간의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일 것, 고용안정 보장, 임금인상이 주요 요구조건이었다. 당시 브라질 정권을 잡고 있던 군부는 4월 17일 상베르나르도 금속노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룰라의 위원장직을 박탈했다. 그리고 룰라를 비롯한 16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체포되었다.9)
50여 일 만에 파업은 끝났다. 비록 노동자들이 내건 요구조건은 수용되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정당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PT당은 1982년까지 정당 요건을 모두 갖추고 본격적으로 정치 일선에 뛰어들게 된다.
1982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면서 룰라는 상파울로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득표율 10%를 기록해 4위에 머물렀다. 또 PT당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하원의원 8명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PT당은 계속 성장했다. 1986년 선거에서는 하원의원 16명이 당선되었다. 룰라도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상파울로에서 65만 6000표를 얻어 브라질 하원의원 중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1988년 시장 선거에서 PT당은 3개 주의 수도와 36개의 시에서 시장과 1,000명 이상의 시의원을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특히 브라질 최대의 도시인 상파울로에서 PT당 출신 시장이 탄생해 PT당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몫을 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룰라는 군부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1989년 대통령 직접선거에 출마한다.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1989년 11월 15일 룰라는 대통령 선거에서 17%의 지지율을 얻어 결선투표에 올랐다. 당시 그가 내세운 공약은 임금의 대폭 인상, 과감한 농지개혁, 은행을 비롯한 모든 경제구조의 재편성, 외채의 완전지불 유예 등이었다. 급진적인 공약을 들고 결선투표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브라질의 빈부격차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탄생한 지 10년도 채 안 된 정당의 후보가 결선투표까지 진출하고, 결선투표에서도 총 3100만 표를 얻어 46%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통령 당선자 페르난두 콜로르는 룰라보다 400만 표 많은 3500만 표를 얻었다.
하지만 룰라는 빈민을 비롯한 노동자들에게는 지지를 얻었지만 국제투자자들과 기업인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일례로 당시 상파울루산업연맹 책임자는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기업인 80만 명은 브라질을 떠나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룰라의 당선을 반대했다.10)
대선 패배 후 룰라는 “나는 룰라를 위한 권력을 원치 않는다. 룰라가 있든지 없든지 노동자계급은 언젠가 권력을 획득하리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계급이 그것을 인식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11)
이후 룰라는 1994년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구호를 내걸고 다시 대선에 도전했다. 1994년 대선은 룰라에게 유리한 듯 보였다. 콜로르 정부의 실정과 부정부패로 브라질 경제가 파탄 상태였기 때문이다. 선거 초기에는 여론조사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던 사회민주당 소속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소 후보에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카르도소가 입안한 화폐개혁 정책인 ‘헤알 계획’으로 월간 48.2%에 이르던 물가상승률이 1.5%로 떨어지는 등 물가가 안정된 것에 브라질 국민들이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카르도소는 1998년 재선에 성공해 브라질 역사상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3전 4기
1998년 대권도전에 또다시 실패한 룰라는 2002년 10월 네 번째 대선에 출마한다. 카르도소 대통령의 실정으로 브라질은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 있었고, 룰라의 당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대선을 얼마 앞둔 2001년 6월 여론조사에서 룰라는 41.6%의 지지율을 기록해 18.4%만을 기록한 조세 세하 후보를 여유롭게 따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4년에도, 1998년에도 초기 여론조사에서 앞서가다가 뒤집혔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제,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 ‘헤알화’의 가치가 3%나 폭락하고, 국제금융시장에서 브라질 채권 보유비중을 낮추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브라질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했다. 브라질에는 경제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이것이 국제금융자본의 음모인지, 아르헨티나발 중남미 경제위기의 여파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룰라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제투자자들과 기업인들, 미국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폴 오닐 미국 재무장관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6월 21일 오닐은 브라질 사태가 ‘경제적인 사안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미국 납세자들의 돈을 정치적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브라질에 대책 없이 던져 넣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한 것이다. 룰라의 당선가능성이 높은 것이 ‘정치적 불확실성’이란 얘기다.12)
음모론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2002년 4월 룰라가 대선후보로 등록한 이후부터 브라질 금융사정이 나빠진 점을 지적한다. 2009년 400억 달러 이상이었던 외환보유액이, 2010년 4월을 기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6월까지 329억 달러로 떨어졌다는 것이다.13)
세계 헤지펀드 업계의 대부 조지 소로스가 한 말도 음모론에 힘을 실어준다. 조지 소로스는 2002년 7월 브라질 일간지와의 회견에서 “로마시대에는 로마인들만이 투표했다. 현대 세계 자본주의에서는 브라질인만이 아닌 미국 금융기관들만이 투표한다”며 “(선두를 달리고 있는) 노동자당의 룰라 후보가 당선되면 브라질은 국가 파산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14) 이 말이 알려지자마자 헤알화의 가치는 폭락했다. 그리고 브라질의 기업들은 외국계 은행으로부터 원금 상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룰라가 여론조사에서 앞서갈 때마다 헤알화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다. 2002년 8월 여론조사에서 룰라와 집권 여당의 조세 세하 후보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자 헤알화의 가치가 3.8% 떨어졌고, 증시도 3.2%로 하락했다. 시장은 룰라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룰라가 급진적인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카르도소 정부도 조제 세하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룰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금융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나서서 “만약 적임자를 뽑지 않으면 브라질은 내년에 아르헨티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15)
그러나 룰라는 1989년 첫 대권 도전 이후 조금씩 자신의 급진적인 정책을 수정해나가고 있었다. 1989년 외채에 대한 이자 지불 중지, 국영 부문의 민주화?민영화 반대, 무토지 농민을 위한 토지개혁 등 급진적인 정책을 공약으로 내놓았던 룰라는, 1994년 대선에서는 국가 개혁 및 부패 일소, 사회적 약자의 시민권 보호, 환경보호, 경제적 분배와 고용 창출에 기여하는 생산 구조의 재편 등으로 한결 완화된 공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1998년에는 경제성장과 일자리 확보, 경쟁력 강화와 수출 증진을 위한 산업정책, 소득분배의 형평성, 굶주림과의 전쟁 등을 내세웠다. 2002년에는 IMF와의 협정 준수, 엄격한 재정 관리를 통한 경제안정화정책 수행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브라질 국내 기업가와 은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위덕대학교 오삼교 교수는 대선을 거듭할수록 달라지는 PT당의 정책에 대해 “점차 급진적 성격이 완화되고 브라질 자본주의의 관리와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경향이 강화되어왔다”고 평한다.16)
룰라는 IMF와의 협정 준수, 외채 전액 상환을 거듭 강조하며 브라질 내 기업인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2002년 10월 열린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했지만 과반 득표에는 실패해 결선투표를 치른 결과 3전 4기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가시밭길을 헤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 룰라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당선소감을 밝혔다.17) 노동자 출신으로 빈곤층을 껴안겠다는 말을 최초로 한 것이다.
그리고 2002년 10월 28일 대국민 연설에서 룰라는 “(차기) 정부는 브라질이 지고 있는 국제적인 책임을 다하고 반인플레 정책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며 외채 지불정지 사태는 없을 것이고, 긴축재정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룰라는 가장 먼저 취할 정책이 가난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기 내에 브라질인이 적어도 하루에 세끼는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18)
룰라 앞에는 파탄 난 경제, 높은 실업률, 2,60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환 상환액 등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빈곤 퇴치라는 오랜 숙원도 해결해야 했다.
2003년 1월 정식 취임한 룰라는 우선 빈곤퇴치에 나섰다. 전투기 도입 사업을 중단하고, 이 예산으로 빈곤퇴치 사업을 벌인 것이다. 전체 인구 1억 7500만 명 중 31%인 5400여만 명이 하루 1달러 미만의 수입에 의존하는 빈곤층이며, 이 중 4000만 명이 만성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만큼 룰라는 ‘포미제로(Fome Zero: 기아제로)’ 정책 시행에 심혈을 기울였다. 취임 직후 각료들과 함께 빈민가를 둘러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편으로 그는 국제금융시장이 만족할 만한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미국 보스턴 은행 총재를 역임하고 사회민주당 소속의 엔리케 메이렐레스를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카르도소 정부에서 계속해온 재정긴축과 고금리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뜻밖의 보수주의(unexpected conservatism)’로 금융시장 안정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19)
이런 보수주의 정책 때문에 룰라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무원 연금개혁안과 더딘 농지개혁으로 그는 오랜 지지자들에게 ‘변절자’란 비판을 들었다. 또 공기업 민영화를 더 이상 추진하지 않아 우파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취임 8개월 만에 84.3%에 이르던 지지율이 58.9%로 크게 떨어지기도 했다.
성장과 분배 사이에서 룰라는 균형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그 길은 좌파와 우파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가시밭길이었다. 가시밭길은 또 있었다. PT당의 중진의원들이 룰라를 ‘변절자’라고 비난하며 당을 떠난 데 이어, 2005년에는 룰라 비서실장 측근의 뇌물수수, 현직 장관의 대출청탁, 우편공사 등 국영기업들의 인사?납품 비리, PT당 의원의 야당 매수 의혹 등 여러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
지지율은 40%까지 떨어졌고, 탄핵까지 거론됐다. 재선도 불투명해 보였다. 여러 스캔들이 터지고, 전통적인 지지층이 이탈하면서 재선이 힘들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룰라는 2006년 대선에서 결선투표까지 간 끝에 재선에 성공했다. ‘기아제로’와 ‘볼사 파밀리아’라고 불리는 가족지원금에 힘입은 빈곤층의 지지 덕분이었다.
순풍에 돛 단 듯
룰라는 취임 초기부터 ‘포미제로’와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정책을 통해 빈곤층에게 지원을 해왔다. 이 두 정책은 룰라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의 양대 산맥이다. 카르도소 정부에서 시행하던 정책을 이어받은 ‘포미제로’는 빈곤층에 대한 식량 무상공급을 골자로 한다.
이에 비해 ‘볼사 파밀리아’는 저소득층 생계지원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현금지급 복지정책 중 가장 효과적인 정책으로 꼽히는 ‘볼사 파밀리아’는 생계와 교육을 결합한 것이다. 1240만 가구, 5000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 최대의 복지정책인 ‘볼사 파밀리아’는 자녀들이 학교에 나가고 예방접종을 하는 조건으로 일정액의 돈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자녀 수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대신 결석률이 15%에 이르면 지원이 보류된다.
문맹과 질병, 그리고 생계 등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이 제도는 브라질 경제에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우선, 이 제도를 통해 아동노동을 줄일 수 있게 됐다. 빈곤층 아이들은 생계를 위해 그동안 노동시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돈까지 지원하는 제도를 통해 아동노동을 없앨 수 있었다.
둘째, 교육을 통해 가난을 대물림하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게 됐다.
셋째, 질병으로 인한 유아 사망률을 줄일 수 있게 됐다.
넷째,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다.
실제로 ‘볼사 파밀리아’와 같은 빈곤퇴치 프로그램으로 인해 최저임금이 상승하면서 빈부격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2003~2008년 상위 10%의 소득이 매해 평균 3.9% 증가할 동안 하위 10%의 소득은 평균 9.6% 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효과는 빈곤퇴치 프로그램으로 빈곤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려 내수 시장을 키웠다는 것이다. 내수시장이 살아나면서 브라질 경제도 호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2008년에 IMF의 구제금융을 모두 다 갚고, 순채권국이 되었다. 현재 ‘볼사 파밀리아’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고, ‘포미제로’와 함께 이를 실현시킨 룰라는 2010년 5월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이 수여하는 ‘기아퇴치상’을 받았다.
가난은 나의 힘
룰라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이 ‘가난’이라고 말한다. 가난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2010년 12월 23일 브라질TV와 라디오에 출연해 “나의 꿈과 희망은 서민의 영혼과 가난에서 나왔다”며 “빈곤층 출신이라는 사실이 도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20)
‘가난’했던 룰라는 ‘가난한 자’와 ‘빈곤한 자’, 그리고 ‘노동자’를 언제나 잊지 않았다. 비록 집권 1기에 ‘변절자’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성장과 분배라는, 좀처럼 잡기 힘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브라질을 경제대국으로 올려놓았다. 그에게 ‘남미에서 가장 성공한 지도자’란 평가가 붙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난에 대한 그의 정책 덕분에 그는 빈민층과 서민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기비결은 이게 다가 아니다. 룰라가 노조지도자로 명성을 떨치던 상베르나르도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룰라는 교육은 못 받았어도 머리 회전이 빠르고 커뮤니케이션을 잘했다.”
“그는 한 번 본 사람은 반드시 기억하고 다시 만나면 쒱 이름을 불렀다.”
“룰라는 대통령이 된 뒤 금속노조를 여러 번 찾아오고, 옛 친구들과 연락하며 뿌리를 잊지 않았다. 출신 기반을 잊지 않고 우리를 위해 일한 게 큰 지지를 받는 이유 같다.”21)
서민적인 소탈함도 룰라의 장점이다.
상파울루의 한 대학생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북동부 출신이 대통령이 돼 서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며 “말하는 방식과 행동 등 서민적 매력이 모두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22)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 않고 넓은 포용력으로 사람들을 감싸 안은 것도 그의 인기 비결이다. 브라질의 대표적인 해방신학자이자 룰라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던 프레이 베투는 “룰라 정권의 가장 큰 과오는 농토, 정치, 경제, 조세 등 어느 곳에서도 구조적 개혁을 단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룰라 대통령은 상대가 누구든 그의 입장을 경청하고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으며, 전통적 적대세력까지 끌어안았다. 이런 능력이 거의 절대적인 지지율로 나타난 것”이라고 평가했다.23)
<타임>지에서 “룰라는 부시와 차베스가 동시에 귀를 기울일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한 것도 이런 포용력 혹은 타협을 우선하는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2014년 그의 행보는?
3선 연임이 금지되어 있는 브라질의 헌법 때문에 룰라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헌법을 고쳐서 3선 연임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룰라는 “브라질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는 없다”는 뜻을 밝혔다.24)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지명한 지우마 호세프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2010년 10월 31일 호세프는 브라질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호세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룰라 덕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영국 BBC방송은 호세프가 당선된 배경을 “룰라 효과”라는 한마디 말로 정리했을 정도다.25)
브라질 헌법은 3선 연임을 금지하지만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2014년 혹은 2018년 대선 때 룰라가 다시 출마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룰라 역시 이에 대한 확답은 피하고 있는 상태다.
2009년 6월 룰라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에서 패한다면 (그다음 임기 때) 다시 한 번 선거에 나설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고, ‘마이크를 놓고 사람들의 주목을 잃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쏟아내곤 했다. 또 2010년 12월 20일 브라질TV ‘레테’와의 인터뷰에서는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내가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며 “때가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려보자”고 여운을 남겼다.26)
실제로 룰라는 2011년 3월 18일 정치, 사회 관련 전시회와 출판물 발행을 주로 하는 기획회사를 차려 정치에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또 4월 19일에는 PT당 지도부와 소속 단체장 등을 만나 “내년 지방선거에서 PT 시장, 시의원 후보를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27)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정치활동을 재개한 룰라는 과연 2014년 대선에 출마할 것인가? 그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확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앞일은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룰라가 브라질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였다는 사실 말이다.
|주|
1) 이본영, 「브라질 ‘룰라’에게 배우라」, <한겨레>, 2010년 9월 16일, 1면.
2) 조찬제, 「룰라, 아프리카로 간 진짜 이유는?」, <경향신문>, 2010년 7월 5일, 15면.
3) 이성형, 「가진 자들의 브라질에서 룰라의 브라질로」, <민족21>, 2002년 11월호, 124쪽.
4) 윤재설,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월간말>, 2002년 11월호, 86쪽.
5) 오삼교, 「브라질의 새로운 좌파 정치」, <현상과 인식>, 2003년 봄/여름호, 120쪽.
6) 안정숙, 「20세기 사람들 72: 룰라 이나시오 다 실바」, <한겨레>, 1999년 1월 10일, 15면.
7) 정운영, 「물가가 뒤집은 역사」, <한겨레>, 1994년 10월 11일, 5면.
8) 안정숙, 앞의 글.
9) 신원철, 「집권 임박,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 <월간말>, 1994년 6월호, 185~186쪽.
10) 김재중, 「‘색깔론’ 맞받아친 룰라 돌풍-경제 파탄론 등 ‘이념적 테러’ 안팎 역풍 극복」, <경향신문>, 2002년 10월 29일, 10면.
11) 안정숙, 앞의 글.
12) 안?용, 「브라질 경제위기 도대체 왜…무엇 때문에…미 음모론*중남미 도미노설 ‘양분’」, <경향신문>, 2002년 6월 23일, 9면.
13) 안치용, 앞의 글.
14) 박종생, 「추락하는 중남미 경제(중-1): ‘공격’당하는 브라질」, <한겨레>, 2002년 7월 19일, 1면.
15) 데이비드 플라이셔, 「해외칼럼: 브라질 대선 ‘룰라풍’」, <경향신문>, 2002년 10월 4일, 7면.
16) 오삼교, 앞의 글.
17) 이창곤, 「룰라의 브라질 앞날은」, <한겨레>, 2002년 10월 29일, 7면.
18) 이창곤, 「브라질 룰라 대국민 연설: “경제*사회개혁 동시 추진”」, <한겨레>, 2002년 10월 30일, 6면.
19) 권기태*김승진, 「브라질 좌파 대통령 룰라 뜻밖의 보수정책…경제살려」, <동아일보>, 2003년 4월 16일, 13면.
20) 양홍주, 「룰라 “이제 거리의 삶으로 돌아갈 것”」, <한국일보>, 2010년 12월 25일, 10면.
21) 이본영, 「브라질 ‘룰라’에게 배우라-이념 집착 않고 적대세력까지 포용 ‘화합 대통령’」, <한겨레>, 2010년 9월 16일, 5면.
22) 이본영, 앞의 글.
23) 이본영, 앞의 글.
24) 김향미, 「차베스 3선 권유에 룰라 “민주주의 근간 흔들 수 없다”」, <경향신문>, 2009년 11월 2일, 8면.
25) 이지선, 「성공한 대통령서 정권 재창출 이룬 룰라, 다음 행보는」, <경향신문>, 2010년 11월 2일, 8면.
26) 길윤형, 「룰라 “대선 재출마? 나도 몰라”」, <한겨레>, 2010년 12월 22일, 23면.
27) 고은경,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정치컴백’」, <한국일보>, 2011년 4월 21일,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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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덕은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레임덕은 없다”고 잘라 말하지만 레임덕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정권 말기에 레임덕을 겪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어느 누군가에게 레임덕은 먼 얘기다. 2011년 1월 1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의 이야기다. 퇴임 2주를 앞두고 펼친 여론조사에서 룰라는 87%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퇴임하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이렇게 높은 것은 여론조사가 생긴 이후로 브라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브라질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초유의 일이 아닐까 싶다.
지지율이 말해주듯 룰라는 브라질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룰라의 집권기에 브라질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2003~2008년까지 브라질 빈곤층은 43%가 줄어들었고, 인구 1억 9000여만 명 중 빈곤층에 속하던 3200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또 룰라 집권 첫해 12.3%였던 실업률은 6%대로 내려왔다. 8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브라질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8위로 부상했다. 또 그동안 브라질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채무국 신세에서 채권국으로 탈바꿈했다.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도 유치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2010년 브라질 대선에서 여당의 지우마 호세프 후보뿐만 아니라 야당의 조제 세하 후보까지 모두 룰라를 전면에 내세우고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사회민주당 조제 세하 후보는 대선을 앞둔 2010년 9월 “역사적 인물 룰라와 세하, 경험 있는 두 지도자”란 광고를 내보냈고, “내가 룰라의 정책을 지속시킬 적임자”라고 호소했다.1) 지우마 호세프 후보는 즉각 이를 비판했다. 해프닝 아닌 해프닝이 일어난 셈이다.
여당도 아니고 야당에서 룰라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룰라의 압도적인 지지율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선과 총선을 같이 치른 이번 선거의 포스터와 정치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은 퇴임을 앞둔 룰라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라고 지칭한 것도 과장이 아닌 셈이다.2)
선반공 출신 노조지도자에서 브라질의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된 룰라. 과연 룰라는 어떻게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차근차근 살펴보자.
노동자에서 정치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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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는 1945년 브라질 북동부의 가난한 마을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면서도 길거리에서 땅콩이나 사탕을 팔아야 했던 그는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상태로 15세 무렵부터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세 때는 옆 동료의 실수로 프레스에 깔려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1963년 룰라는 상파울로 외곽에 있는 산업지대인 ABC 공업단지(Santo Andre, Sao Bernardo, Sao Caetano)에 있는 자동차 공장 선반공으로 취직했다. 당시 공장에 다니고 있던 그의 형이 노조 가입을 권유했지만 룰라는 처음에 노조 활동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독학과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자격증을 딴 뒤 이 자격증을 인정해주고 처우를 개선해줄 것을 고용주에게 요구했지만 거절당한다. 그때 형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1966년 노조에 가입하게 된다.3)
1969년 공장노동자였던 임신 9개월의 아내를 간염으로 잃은 룰라는, 그해에 상베르나르도 금속노조 대의원을 맡았고, 1972년 금속노조 사회복지부문 제1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1975년에는 14만여 명의 노동조합원 중 92%의 지지를 얻어 상베르나르도 금속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다.
당시만 해도 노동조합은 정치적인 입장 표명보다는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등에 몰두하고 있던 때였다. 룰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1977년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브라질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노사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할 때 세계은행의 비밀보고서가 언론에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가 공식적인 인플레 수치를 조작해 발표한 것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 바람에 노동자들은 34.1%에 이르는 임금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룰라는 곧 금속노조를 이끌고 투쟁에 나선다. 1978년 5월의 일이다. 파업투쟁의 성격은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정부와 노동법원의 노사관계 개입 거부, 노동법의 개정, 노조활동의 자유보장 등 점차 정치적인 성향이 짙어졌다.4)
때마침 이해에 브라질 정부와 의회는 필수 기간산업 부문에 대한 파업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키자 파업은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5) 1979년 3월 금속노동자들은 다시 한번 총파업을 선언했다. 임금인상과 현장에 대한 통제력 증대를 요구하는 파업이었다. 정부는 곧 파업이 불법이라며 탄압을 시작했다. 그러나 야당은 이런 파업에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룰라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9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0년 2월 10일 상파울루에서 브라질 노동자당(PT)이 탄생했다. 당시 PT당은 창립 문건에서 “노동자들은 기존의 경제, 사회, 정치 제도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정치인들과 정당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데 지쳤다. 노동자당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독립을 위한 의지로 탄생했다”고 밝히고 있다.6)
또 “방에 앉아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는 사람들의 고루한 이데올로기와 자기도취는 이제 끝내야 한다. 당은 이론의 산물이 아닌 24시간 실천의 산물이다”라고 선언했다.7) PT당에 대해 룰라가 “브라질 역사상 엘리트의 뜻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최초의 정당”이라고 말한 것처럼 PT당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정당이었다.8)
PT당을 만들고 지도자가 된 룰라는 1980년 4월 또 한번 총파업을 벌인다. 48시간의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일 것, 고용안정 보장, 임금인상이 주요 요구조건이었다. 당시 브라질 정권을 잡고 있던 군부는 4월 17일 상베르나르도 금속노조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룰라의 위원장직을 박탈했다. 그리고 룰라를 비롯한 16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체포되었다.9)
50여 일 만에 파업은 끝났다. 비록 노동자들이 내건 요구조건은 수용되지 않았지만,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정당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PT당은 1982년까지 정당 요건을 모두 갖추고 본격적으로 정치 일선에 뛰어들게 된다.
1982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면서 룰라는 상파울로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득표율 10%를 기록해 4위에 머물렀다. 또 PT당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하원의원 8명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PT당은 계속 성장했다. 1986년 선거에서는 하원의원 16명이 당선되었다. 룰라도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상파울로에서 65만 6000표를 얻어 브라질 하원의원 중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1988년 시장 선거에서 PT당은 3개 주의 수도와 36개의 시에서 시장과 1,000명 이상의 시의원을 당선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특히 브라질 최대의 도시인 상파울로에서 PT당 출신 시장이 탄생해 PT당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몫을 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룰라는 군부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1989년 대통령 직접선거에 출마한다.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1989년 11월 15일 룰라는 대통령 선거에서 17%의 지지율을 얻어 결선투표에 올랐다. 당시 그가 내세운 공약은 임금의 대폭 인상, 과감한 농지개혁, 은행을 비롯한 모든 경제구조의 재편성, 외채의 완전지불 유예 등이었다. 급진적인 공약을 들고 결선투표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브라질의 빈부격차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탄생한 지 10년도 채 안 된 정당의 후보가 결선투표까지 진출하고, 결선투표에서도 총 3100만 표를 얻어 46%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통령 당선자 페르난두 콜로르는 룰라보다 400만 표 많은 3500만 표를 얻었다.
하지만 룰라는 빈민을 비롯한 노동자들에게는 지지를 얻었지만 국제투자자들과 기업인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일례로 당시 상파울루산업연맹 책임자는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기업인 80만 명은 브라질을 떠나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룰라의 당선을 반대했다.10)
대선 패배 후 룰라는 “나는 룰라를 위한 권력을 원치 않는다. 룰라가 있든지 없든지 노동자계급은 언젠가 권력을 획득하리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계급이 그것을 인식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11)
이후 룰라는 1994년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구호를 내걸고 다시 대선에 도전했다. 1994년 대선은 룰라에게 유리한 듯 보였다. 콜로르 정부의 실정과 부정부패로 브라질 경제가 파탄 상태였기 때문이다. 선거 초기에는 여론조사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재무장관으로 재임하던 사회민주당 소속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소 후보에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카르도소가 입안한 화폐개혁 정책인 ‘헤알 계획’으로 월간 48.2%에 이르던 물가상승률이 1.5%로 떨어지는 등 물가가 안정된 것에 브라질 국민들이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카르도소는 1998년 재선에 성공해 브라질 역사상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3전 4기
1998년 대권도전에 또다시 실패한 룰라는 2002년 10월 네 번째 대선에 출마한다. 카르도소 대통령의 실정으로 브라질은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 있었고, 룰라의 당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대선을 얼마 앞둔 2001년 6월 여론조사에서 룰라는 41.6%의 지지율을 기록해 18.4%만을 기록한 조세 세하 후보를 여유롭게 따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4년에도, 1998년에도 초기 여론조사에서 앞서가다가 뒤집혔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제,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 ‘헤알화’의 가치가 3%나 폭락하고, 국제금융시장에서 브라질 채권 보유비중을 낮추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브라질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했다. 브라질에는 경제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이것이 국제금융자본의 음모인지, 아르헨티나발 중남미 경제위기의 여파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룰라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제투자자들과 기업인들, 미국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폴 오닐 미국 재무장관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6월 21일 오닐은 브라질 사태가 ‘경제적인 사안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미국 납세자들의 돈을 정치적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브라질에 대책 없이 던져 넣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한 것이다. 룰라의 당선가능성이 높은 것이 ‘정치적 불확실성’이란 얘기다.12)
음모론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2002년 4월 룰라가 대선후보로 등록한 이후부터 브라질 금융사정이 나빠진 점을 지적한다. 2009년 400억 달러 이상이었던 외환보유액이, 2010년 4월을 기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해 6월까지 329억 달러로 떨어졌다는 것이다.13)
세계 헤지펀드 업계의 대부 조지 소로스가 한 말도 음모론에 힘을 실어준다. 조지 소로스는 2002년 7월 브라질 일간지와의 회견에서 “로마시대에는 로마인들만이 투표했다. 현대 세계 자본주의에서는 브라질인만이 아닌 미국 금융기관들만이 투표한다”며 “(선두를 달리고 있는) 노동자당의 룰라 후보가 당선되면 브라질은 국가 파산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14) 이 말이 알려지자마자 헤알화의 가치는 폭락했다. 그리고 브라질의 기업들은 외국계 은행으로부터 원금 상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룰라가 여론조사에서 앞서갈 때마다 헤알화의 가치는 계속 떨어졌다. 2002년 8월 여론조사에서 룰라와 집권 여당의 조세 세하 후보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자 헤알화의 가치가 3.8% 떨어졌고, 증시도 3.2%로 하락했다. 시장은 룰라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룰라가 급진적인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카르도소 정부도 조제 세하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룰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금융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나서서 “만약 적임자를 뽑지 않으면 브라질은 내년에 아르헨티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15)
그러나 룰라는 1989년 첫 대권 도전 이후 조금씩 자신의 급진적인 정책을 수정해나가고 있었다. 1989년 외채에 대한 이자 지불 중지, 국영 부문의 민주화?민영화 반대, 무토지 농민을 위한 토지개혁 등 급진적인 정책을 공약으로 내놓았던 룰라는, 1994년 대선에서는 국가 개혁 및 부패 일소, 사회적 약자의 시민권 보호, 환경보호, 경제적 분배와 고용 창출에 기여하는 생산 구조의 재편 등으로 한결 완화된 공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1998년에는 경제성장과 일자리 확보, 경쟁력 강화와 수출 증진을 위한 산업정책, 소득분배의 형평성, 굶주림과의 전쟁 등을 내세웠다. 2002년에는 IMF와의 협정 준수, 엄격한 재정 관리를 통한 경제안정화정책 수행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브라질 국내 기업가와 은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위덕대학교 오삼교 교수는 대선을 거듭할수록 달라지는 PT당의 정책에 대해 “점차 급진적 성격이 완화되고 브라질 자본주의의 관리와 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경향이 강화되어왔다”고 평한다.16)
룰라는 IMF와의 협정 준수, 외채 전액 상환을 거듭 강조하며 브라질 내 기업인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2002년 10월 열린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했지만 과반 득표에는 실패해 결선투표를 치른 결과 3전 4기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가시밭길을 헤치고
그리고 2002년 10월 28일 대국민 연설에서 룰라는 “(차기) 정부는 브라질이 지고 있는 국제적인 책임을 다하고 반인플레 정책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며 외채 지불정지 사태는 없을 것이고, 긴축재정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룰라는 가장 먼저 취할 정책이 가난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기 내에 브라질인이 적어도 하루에 세끼는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18)
룰라 앞에는 파탄 난 경제, 높은 실업률, 2,60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환 상환액 등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빈곤 퇴치라는 오랜 숙원도 해결해야 했다.
2003년 1월 정식 취임한 룰라는 우선 빈곤퇴치에 나섰다. 전투기 도입 사업을 중단하고, 이 예산으로 빈곤퇴치 사업을 벌인 것이다. 전체 인구 1억 7500만 명 중 31%인 5400여만 명이 하루 1달러 미만의 수입에 의존하는 빈곤층이며, 이 중 4000만 명이 만성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만큼 룰라는 ‘포미제로(Fome Zero: 기아제로)’ 정책 시행에 심혈을 기울였다. 취임 직후 각료들과 함께 빈민가를 둘러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편으로 그는 국제금융시장이 만족할 만한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미국 보스턴 은행 총재를 역임하고 사회민주당 소속의 엔리케 메이렐레스를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카르도소 정부에서 계속해온 재정긴축과 고금리 정책을 계속 유지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뜻밖의 보수주의(unexpected conservatism)’로 금융시장 안정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19)
이런 보수주의 정책 때문에 룰라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무원 연금개혁안과 더딘 농지개혁으로 그는 오랜 지지자들에게 ‘변절자’란 비판을 들었다. 또 공기업 민영화를 더 이상 추진하지 않아 우파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그 결과 취임 8개월 만에 84.3%에 이르던 지지율이 58.9%로 크게 떨어지기도 했다.
성장과 분배 사이에서 룰라는 균형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그 길은 좌파와 우파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가시밭길이었다. 가시밭길은 또 있었다. PT당의 중진의원들이 룰라를 ‘변절자’라고 비난하며 당을 떠난 데 이어, 2005년에는 룰라 비서실장 측근의 뇌물수수, 현직 장관의 대출청탁, 우편공사 등 국영기업들의 인사?납품 비리, PT당 의원의 야당 매수 의혹 등 여러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
지지율은 40%까지 떨어졌고, 탄핵까지 거론됐다. 재선도 불투명해 보였다. 여러 스캔들이 터지고, 전통적인 지지층이 이탈하면서 재선이 힘들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룰라는 2006년 대선에서 결선투표까지 간 끝에 재선에 성공했다. ‘기아제로’와 ‘볼사 파밀리아’라고 불리는 가족지원금에 힘입은 빈곤층의 지지 덕분이었다.
순풍에 돛 단 듯
룰라는 취임 초기부터 ‘포미제로’와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정책을 통해 빈곤층에게 지원을 해왔다. 이 두 정책은 룰라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의 양대 산맥이다. 카르도소 정부에서 시행하던 정책을 이어받은 ‘포미제로’는 빈곤층에 대한 식량 무상공급을 골자로 한다.
이에 비해 ‘볼사 파밀리아’는 저소득층 생계지원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현금지급 복지정책 중 가장 효과적인 정책으로 꼽히는 ‘볼사 파밀리아’는 생계와 교육을 결합한 것이다. 1240만 가구, 5000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 최대의 복지정책인 ‘볼사 파밀리아’는 자녀들이 학교에 나가고 예방접종을 하는 조건으로 일정액의 돈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자녀 수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대신 결석률이 15%에 이르면 지원이 보류된다.
문맹과 질병, 그리고 생계 등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이 제도는 브라질 경제에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우선, 이 제도를 통해 아동노동을 줄일 수 있게 됐다. 빈곤층 아이들은 생계를 위해 그동안 노동시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돈까지 지원하는 제도를 통해 아동노동을 없앨 수 있었다.
둘째, 교육을 통해 가난을 대물림하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게 됐다.
셋째, 질병으로 인한 유아 사망률을 줄일 수 있게 됐다.
넷째,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다.
실제로 ‘볼사 파밀리아’와 같은 빈곤퇴치 프로그램으로 인해 최저임금이 상승하면서 빈부격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2003~2008년 상위 10%의 소득이 매해 평균 3.9% 증가할 동안 하위 10%의 소득은 평균 9.6% 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효과는 빈곤퇴치 프로그램으로 빈곤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려 내수 시장을 키웠다는 것이다. 내수시장이 살아나면서 브라질 경제도 호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연평균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2008년에 IMF의 구제금융을 모두 다 갚고, 순채권국이 되었다. 현재 ‘볼사 파밀리아’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고, ‘포미제로’와 함께 이를 실현시킨 룰라는 2010년 5월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이 수여하는 ‘기아퇴치상’을 받았다.
가난은 나의 힘
룰라는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이 ‘가난’이라고 말한다. 가난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2010년 12월 23일 브라질TV와 라디오에 출연해 “나의 꿈과 희망은 서민의 영혼과 가난에서 나왔다”며 “빈곤층 출신이라는 사실이 도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20)
‘가난’했던 룰라는 ‘가난한 자’와 ‘빈곤한 자’, 그리고 ‘노동자’를 언제나 잊지 않았다. 비록 집권 1기에 ‘변절자’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성장과 분배라는, 좀처럼 잡기 힘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브라질을 경제대국으로 올려놓았다. 그에게 ‘남미에서 가장 성공한 지도자’란 평가가 붙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난에 대한 그의 정책 덕분에 그는 빈민층과 서민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기비결은 이게 다가 아니다. 룰라가 노조지도자로 명성을 떨치던 상베르나르도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룰라는 교육은 못 받았어도 머리 회전이 빠르고 커뮤니케이션을 잘했다.”
“그는 한 번 본 사람은 반드시 기억하고 다시 만나면 쒱 이름을 불렀다.”
“룰라는 대통령이 된 뒤 금속노조를 여러 번 찾아오고, 옛 친구들과 연락하며 뿌리를 잊지 않았다. 출신 기반을 잊지 않고 우리를 위해 일한 게 큰 지지를 받는 이유 같다.”21)
서민적인 소탈함도 룰라의 장점이다.
상파울루의 한 대학생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북동부 출신이 대통령이 돼 서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며 “말하는 방식과 행동 등 서민적 매력이 모두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22)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 않고 넓은 포용력으로 사람들을 감싸 안은 것도 그의 인기 비결이다. 브라질의 대표적인 해방신학자이자 룰라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던 프레이 베투는 “룰라 정권의 가장 큰 과오는 농토, 정치, 경제, 조세 등 어느 곳에서도 구조적 개혁을 단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룰라 대통령은 상대가 누구든 그의 입장을 경청하고 모두를 동등하게 대했으며, 전통적 적대세력까지 끌어안았다. 이런 능력이 거의 절대적인 지지율로 나타난 것”이라고 평가했다.23)
<타임>지에서 “룰라는 부시와 차베스가 동시에 귀를 기울일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한 것도 이런 포용력 혹은 타협을 우선하는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2014년 그의 행보는?
3선 연임이 금지되어 있는 브라질의 헌법 때문에 룰라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헌법을 고쳐서 3선 연임을 하라고 권유했지만 룰라는 “브라질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는 없다”는 뜻을 밝혔다.24)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지명한 지우마 호세프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2010년 10월 31일 호세프는 브라질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호세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룰라 덕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영국 BBC방송은 호세프가 당선된 배경을 “룰라 효과”라는 한마디 말로 정리했을 정도다.25)
브라질 헌법은 3선 연임을 금지하지만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2014년 혹은 2018년 대선 때 룰라가 다시 출마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룰라 역시 이에 대한 확답은 피하고 있는 상태다.
2009년 6월 룰라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에서 패한다면 (그다음 임기 때) 다시 한 번 선거에 나설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고, ‘마이크를 놓고 사람들의 주목을 잃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쏟아내곤 했다. 또 2010년 12월 20일 브라질TV ‘레테’와의 인터뷰에서는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내가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며 “때가 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려보자”고 여운을 남겼다.26)
실제로 룰라는 2011년 3월 18일 정치, 사회 관련 전시회와 출판물 발행을 주로 하는 기획회사를 차려 정치에의 뜻을 숨기지 않았다. 또 4월 19일에는 PT당 지도부와 소속 단체장 등을 만나 “내년 지방선거에서 PT 시장, 시의원 후보를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27)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정치활동을 재개한 룰라는 과연 2014년 대선에 출마할 것인가? 그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확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앞일은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룰라가 브라질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신뢰받는 지도자였다는 사실 말이다.
|주|
1) 이본영, 「브라질 ‘룰라’에게 배우라」, <한겨레>, 2010년 9월 16일, 1면.
2) 조찬제, 「룰라, 아프리카로 간 진짜 이유는?」, <경향신문>, 2010년 7월 5일, 15면.
3) 이성형, 「가진 자들의 브라질에서 룰라의 브라질로」, <민족21>, 2002년 11월호, 124쪽.
4) 윤재설,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월간말>, 2002년 11월호, 86쪽.
5) 오삼교, 「브라질의 새로운 좌파 정치」, <현상과 인식>, 2003년 봄/여름호, 120쪽.
6) 안정숙, 「20세기 사람들 72: 룰라 이나시오 다 실바」, <한겨레>, 1999년 1월 10일, 15면.
7) 정운영, 「물가가 뒤집은 역사」, <한겨레>, 1994년 10월 11일, 5면.
8) 안정숙, 앞의 글.
9) 신원철, 「집권 임박,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 <월간말>, 1994년 6월호, 185~186쪽.
10) 김재중, 「‘색깔론’ 맞받아친 룰라 돌풍-경제 파탄론 등 ‘이념적 테러’ 안팎 역풍 극복」, <경향신문>, 2002년 10월 29일, 10면.
11) 안정숙, 앞의 글.
12) 안?용, 「브라질 경제위기 도대체 왜…무엇 때문에…미 음모론*중남미 도미노설 ‘양분’」, <경향신문>, 2002년 6월 23일, 9면.
13) 안치용, 앞의 글.
14) 박종생, 「추락하는 중남미 경제(중-1): ‘공격’당하는 브라질」, <한겨레>, 2002년 7월 19일, 1면.
15) 데이비드 플라이셔, 「해외칼럼: 브라질 대선 ‘룰라풍’」, <경향신문>, 2002년 10월 4일, 7면.
16) 오삼교, 앞의 글.
17) 이창곤, 「룰라의 브라질 앞날은」, <한겨레>, 2002년 10월 29일, 7면.
18) 이창곤, 「브라질 룰라 대국민 연설: “경제*사회개혁 동시 추진”」, <한겨레>, 2002년 10월 30일, 6면.
19) 권기태*김승진, 「브라질 좌파 대통령 룰라 뜻밖의 보수정책…경제살려」, <동아일보>, 2003년 4월 16일, 13면.
20) 양홍주, 「룰라 “이제 거리의 삶으로 돌아갈 것”」, <한국일보>, 2010년 12월 25일, 10면.
21) 이본영, 「브라질 ‘룰라’에게 배우라-이념 집착 않고 적대세력까지 포용 ‘화합 대통령’」, <한겨레>, 2010년 9월 16일, 5면.
22) 이본영, 앞의 글.
23) 이본영, 앞의 글.
24) 김향미, 「차베스 3선 권유에 룰라 “민주주의 근간 흔들 수 없다”」, <경향신문>, 2009년 11월 2일, 8면.
25) 이지선, 「성공한 대통령서 정권 재창출 이룬 룰라, 다음 행보는」, <경향신문>, 2010년 11월 2일, 8면.
26) 길윤형, 「룰라 “대선 재출마? 나도 몰라”」, <한겨레>, 2010년 12월 22일, 23면.
27) 고은경,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정치컴백’」, <한국일보>, 2011년 4월 21일,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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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을영
2005년부터 월간 <인물과사상>에 시사인물포커스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만화에 살다』(2002)와 공저 『환경주의자들』(2001), 『미래를 파는 디지절 상인들』(2001), 『남성의 광기를 잠재운 여성들』(2001), 『베스트셀러과 작가들』(2001), 『상상력과의 전쟁』(2002), 『한국영화산업 개척자들』(2003) (이상 인물과사상사 펴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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