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에 빠졌을 때 읽는 책 -『농담』
피곤.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고 모든 근심들을 다 털어버리고 싶었다. 이해도 못하겠고 나를 기만하기만 하는 이 물질의 세계에 더 이상 머물러 있고 싶지가 않다. 다른 세계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 내 편안한 집일 수 있는 세계, 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세계…
글ㆍ사진 김지혁
201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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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 쿤데라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이다. 사랑, 우정, 증오, 복수 등 사소하고 사적인 삶에서 시작하여, 선의로 출발한 이념일지라도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암시하며 절대 신념과 획일주의를 경고하고 있다. 1948년 체코 공산혁명 직후 혁명적 낙관주의가 강요되던 시대에, 주인공 루드비크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여자 친구 마르케타에게 혁명의 낙천성을 비꼬는 농담을 적은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암울한 시대에 던진 그 농담 한마디가 운명의 비극을 연출한다.



어린 시절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편이었고 또 혼자 있는 걸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부모님이 즐겨 들으시던 팝송 테이프를 듣거나 손에 잡히는 책을 읽거나 집 앞으로 지나가는 기차를 구경하며 시간 보내는 걸 좋아했어요. 스노우캣처럼 박스를 뒤집어쓰거나, 심슨 가족에서처럼 혼자 원반을 던지고 주워서 다시 던지며 노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따분하지 않게 시간 보내는 방법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죠.

30대가 된 지금도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특히나 일할 때 누가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성격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인지 어시스턴트도 없이 여전히 혼자 작업하고 있지요. 특별히 대인기피증까진 아니겠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도통 말을 잘할 수 없는 인간형이긴 한 것 같습니다.

이렇듯 혼자 있는 것에 매우 익숙하고 편하게 느끼는 저이지만, 하는 일조차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 평소 바이오리듬이 깨지지 않게 시간을 관리하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술가는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고, 일하고 싶을 때나 일한다는 선입견이 많지만, 전 예술을 하는 게 아니어서 그런지 최대한 시간을 정리하고 계획해서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최대한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려 하는 것이죠.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관리해도, 한 번 실타래가 끊어져 생활 사이클이 무너져버리면 절망적인 무기력과 의욕상실이 찾아오곤 합니다. 일종의 슬럼프라 할 수 있겠죠.

이런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는데. 너무 무리한 일정을 한꺼번에 처리하면 찾아오는 피로성 후유증과, 어떻게 그려야 할지 자신조차 알 수 없을 때의 그 막연함이 부르는 절망감입니다. 이럴 땐 조금 쉬어주면서 긴장도 풀고 마음을 추스르는 게 많은 도움이 되긴 합니다. 그렇더라도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도 길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생활 사이클을 정상적인 루트에 올려놓으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보곤 합니다.

닐 영이나 셰릴 크로우 그리고 펄 잼 같이 다분히 미국적인 강하고 심플한 사운드의 음악들을 실컷 듣는다든지, 언제 봐도 항상 즐거울 수밖에 없는 시트콤 <프렌즈>를 시청한다든지, 감정의 줄다리기를 최고의 연출로 표현해내는 아다치 미치루의 예전 만화를 다시 보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얼마 전 무리한 스케줄로 몸 안의 배터리가 방전돼서 무기력해 있을 때 책장의 책들에서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던 부분만을(책에 낙서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밑줄을 그어두기보단 포스트잇을 사용했었습니다. 요즘은 그냥 전부 넘겨버리긴 하지만 말이죠.) 천천히 그리고 진지하게 훑어보며 힘을 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곳엔 문장과 함께 깊고 아름다운 저 자신만 알고 있는 풍경이 있었고, 향수에 젖은 비탄과 절망도 있었으며, 모든 것을 초월한 저만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긴 시간 많은 책들의 짧은 문장들을 곱씹었고 밀란 쿤데라의 『농담』 중 이 부분을 끝으로 깊은 사색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작업을 위한 충전도 튼실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피곤.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고 모든 근심들을 다 털어버리고 싶었다. 이해도 못하겠고 나를 기만하기만 하는 이 물질의 세계에 더 이상 머물러 있고 싶지가 않다. 다른 세계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 내 편안한 집일 수 있는 세계, 나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세계. 거기에는 길이 있고, 방랑객이 있고, 유랑하는 악사가 있고, 엄마가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런 생각을 떨치고 기운을 차렸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물질의 세계와 벌이는 나의 투쟁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한다. 반드시 모든 오류와 미망의 저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밀란 쿤데라의 책은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 문제에 관해서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만의 시적이고 무게 있는 글들은 항상 좋은 기운을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비록 전혀 다른 상황,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문장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그나저나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고, 트루게네프나 도스토예프스키 아저씨들이 들으면 섭섭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밀란 쿤데라’란 이름의 음이 주는 뉘앙스는 문학인 중에 가장 철학적이고 멋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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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읽고 그림으로 기억하다 김지혁 저 | 인디고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일러스트로 사랑 받고 있는 김지혁 작가의 ‘그림으로 그려낸 30권의 책 이야기’를 담은 독특한 에세이다. 책을 사랑한 일러스트레이터가 만난 책들의 면면에는 그 책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기까지 과정이 담겨 있다. 저자는 책과 자신의 그림 이야기를 편안한 친구와 대화하듯 조근조근 들려준다…

 




#밀란 쿤데라 #농담
9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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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

2013.02.22

밀란 쿤데라 문체 정말 좋아해요! <농담>도 읽어보고 싶네요. <하지만 나는 결국 그런 생각을 떨치고 기운을 차렸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물질의 세계와 벌이는 나의 투쟁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한다. 반드시 모든 오류와 미망의 저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 요 부분, 마음을 묵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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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rim49

2012.10.01

뭔가에 이끌리며 '농담'을 장바구니에 살포시 넣었어요.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먼저 읽었는데. 이게 처녀작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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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2012.10.01

지금 제가 읽어야 되는 책! 슬럼프. 난도쌤이 슬럼프는 게으름의 다른말이라고 했는데... 그말을 듣고 한동안 내가 게으른건가.그래도 열심히 살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좌절했었는데. 그냥 저는 열심히 살았는데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 슬럼프가 온건데. 뭐 여튼 정말 공감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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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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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1929년 체코의 브륀에서 야나체크 음악원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밀란 쿤데라는 그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프라하의 예술아카데미 AMU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다. 1963년 이래 「프라하의 봄」이 외부의 억압으로 좌절될 때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으며, 1968년 모든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저서가 압수되는 수모를 겪었다. 『농담』과 『우스운 사랑』 2권만이 쿤데라가 고국 체코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농담 La Plaisanterie』이 불역되는 즉시 프랑스에서도 명작가가 되다. 그 불역판 서문에서 아라공은 "금세기 최대의 소설가들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한바 있다. 2차대전 후 그는 대학생, 노동자, 바의 피아니스트(그의 아버지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를 거쳐 문학과 영화에 몰두했다. 그는 시와 극작품들을 썼고 프라하의 고등 영화연구원에서 가르쳤다. 밀로스 포만(Milos Forman), 그리고 장차 체코의 누벨 바그계 영화인들이 될 사람들은 두루 그의 제자들이었다. 소련 침공과 '프라하의 봄' 무렵의 숙청으로 인하여 그의 처지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책들은 도서관에서 제거되었고 그 자신은 글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금지되는 역경을 만났다. 1975년 그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왔을 때 "프라하에서 서양은 그들 스스로가 파괴되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1975년 프랑스로 이주한 후 르네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다가 1980년에 파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는 어떤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테레사와 토마스는 우연히 서로 만났다가 사고로 함께 죽는다. 그들의 운명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정들과 우연한 사건들과 어쩌다가 받아들이게 된 구속들의 축적이 낳은 산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죽음을 향한 그 꼬불꼬불한 길,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완만한 상호간의 파괴는 영원한 애매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듯 어떤 내면의 평화를 다시 찾는 길이기도 하다. 그 배경에는 60년대 체코와 70년대 유럽을 뒤흔들어놓은 시련이 깔려 있다. 지금은 멀어져버린 체코이지만 쿤데라의 작품 한복판에 주인공인 양 요지부동으로 박혀 있는 체코,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라기보다는 신화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나라, 유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그 본질이 더 잘 보이는 듯한 그 나라. 변함 없는 성실성과 배반,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찢겨진 존재들의 복합성, 그리고 또한 둘로 쪼개진 세계와 유럽의 드라마와 작가의 근원적 정신질환의 원인은 체코에 있었다.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 후 소설가로서의 성공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화가 너무나 급작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1968년까지 나는 체코 국내의 소설가였을 뿐 아무것도 외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 뒤에 작품들이 더러 번역이 되긴 했습니다만 체코 안에서 작가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프랑스를 작가로서의 조국으로 선택한 겁니다. 내 책들이 먼저 나온 곳은 파리였고 나로서는 그 상징적 의미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밀란 쿤데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다. 지혜의 그물망이 촘촘하게 얽혀 있는 그의 작품으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농담』『생은 다른 곳에』『불멸』『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별』『느림』『정체성』『향수』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가 탁월한 문학적 깊이를 인정받아서 메디치 상, 클레멘트 루케 상, 유로파 상, 체코 작가 상, 컴먼웰스 상, LA타임즈 소설상 등을 받았다. 미국 미시건 대학은 그의 문학적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8년에 출간된 『이별』은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문학상 프레미오 레테라리오 몬델로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별』은 현대의 살아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 놓인 우리의 삶을 마치 모자이크처럼 정교하게 수놓으면서 사랑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평론가, 번역가 등의 거의 모든 문학장르에서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외에도 『향수』와 오늘날 현대 소설이 지닌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의의를 쿤데라만의 날카로운 시각과 풍부한 지식, 문학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풀어 낸 에세이집 『커튼』등 다수가 있다. 국내외 많은 독자를 거느린 세계적 작가 밀라 쿤데라는 2023년 7월 12일 향년 94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