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한라산 영실”
11월 6일, 조계사에서 마주한 유홍준 작가와 관객 사이에 대기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객들의 정중앙 앞자리에서 일어난 유홍준 작가는 이윽고 무대 위에 올라 독자들과 제주도 답사기행을 시작했다.
201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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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탐라’를 되짚어보다
토크 콘서트의 시작은 ‘제주의 역사와 탐라 문화의 정체성’라는 주제의 유홍준 작가의 강연으로 꾸며졌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슬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야기는 독자들을 제주도의 푸른 섬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운 제주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시간상 공간상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영토 확장의 의미를 가진 존재에요. 더불어 난대성 아열대 기후로 늘 푸른 숲을 가진 장소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제주라는 존재를 가졌다는 것은 한민족의 복입니다. 그런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디냐는 질문에 저는 무조건 ‘한라산 영실’ 이라고 답합니다. 1700고지 위에 진달래꽃밭 아래로 이어지는 구상나무 숲은 정말 드라마 같은 구성이죠. (나의문화유산답사기 7권 p.167 참조)
그리고 제주도하면 오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오름은 기생화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주도에 가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죠. 다양한 오름 중에 용눈이 오름을 보았을 때 아름다운 능선이 대자연의 위대한 누드화를 보는 느낌을 주었죠. 이처럼 제주의 자연은 아름답고 경이롭죠. 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순상화산, 오름, 용암동굴의 존재는 지질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주 화산섬’과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로 했죠.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한줄기 선 위에 중간 중간 솟은 형태로 오름보다는 원시림을 보는 듯한 다른 감동을 줍니다.
역사 속의 제주
삼양동 유적지는 기원전후의 탐라국 형성기를 보여주는 최대의 마을 유적지로 의미가 깊습니다. 탐라인 발상지 전설을 갖고 있는 삼성혈은 이 유적지와 연결되죠. 탐라국이 독립된 국가(Kingdom)가 아닌 군장국가(Chiefdom)에만 머물렀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제주는 백제, 신라와 조공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육지부의 역사 속에 편입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교가 유입되었는데 정작 제주도 내에 불교 유적은 10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주사람이 흔히 말하는 “절오백, 당 오백” 이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제주도의 귀신이 너무 세서 불교가 정착을 하지 못했거든요. 제주의 상징인 돌하르방에 대한 이야기는 어제 방송에서 많이 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방송을 다시보시면 되겠습니다.(웃음)
제주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제주목사에 부임했던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를 빼놓을 수가 없죠. 1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 그는 제주도의 현 실정을 잘 담아냈는데 행정가로서 귀감이 될 인물입니다. 이후 조선시대에 대영제국이 제주도에 머물면서 50년간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나라의 해심을 측정해서 지도를 만들었는데요. 이는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화시키기 위해서 그 나라의 민속(Folk law)을 이해하기 위한 일환으로 벌인 활동으로 제가 옥션에서 아주 높은 가격을 주고 ‘해심지도’를 사서 제주박물관에 기증하여 지금 현재 전시중입니다. 아래에 ‘유홍준 기증’ 이라고 쓰여 있죠.(웃음)
해녀들의 제주
제주도에서 해녀삼촌(제주도에서는 진짜 살붙이가 아닌 사람은 형님, 누님, 아주머니, 아저씨 같은 호칭대신 모두 삼춘(삼촌)이라고 함)들이 제주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걸어놓는 소지가 흩날리는 와흘 본향당 횡나무를 보면 탄력이 대단하죠. 이와 유사하게 종달리 돈지할만당(여기서 돈지는 배가 닿을 수 있는 해안을, 종달리는 끝에 도달한 동네란 의미를 가진다)의 기암괴석에 길게 누워있는 나무에도 이런 소지들이 걸려있는데요. 해녀들의 바람이 살아있는 장소입니다. 관광이 아무리 중요하더라고 물색천과 소지는 그모습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저는 해녀삼촌에게 4.3사건은 뭐라고 할까… 민주항쟁도, 폭동도 아닌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에 가면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내용이 담긴 비석이 토막으로 나누어져 있죠. 이는 마치 학살의 현장을 연상케 합니다. 이 비석에는 소설의 전체 내용이 담겨있는데요. 이처럼 4.3사건은 민주항쟁이라고 명명해서 가치를 올려야하는 그런 문제의 것이 아닌 3만 명의 희생이 발생한 위로와 공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주도와 사람
민속학자인 김광언 씨가 표어에서 이즈미 세이이찌를 산악 로맨티스트라고까지 표현했는데요. 그는 한라산 등반 중 동료를 잃은 사건으로 자신의 전공을 민속학으로 바꾸고 제주도에 대해 평생을 연구한 인물입니다. 일본인이 집필한 것이라고 하여 아직도 한국어로 번역조차 되지 않았는데요. 이는 제주도에 대한 총체적인 보고서에 대한 외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주도 하면 나비박사인 석주명 선생을 빼놓을 수 없죠. 조선 전역에 나비를 채집하던 그가 제주도에 내려와 ‘제주도 총서’라는 여섯 권의 책을 집필하며 제주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했죠. 그의 영전에 ‘서귀포 귤빛여성합창단’이 제주어로 노래한 ‘도대지기’를 바치고 싶네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 p.461 참조)
2부-숨겨진 “뒷면”의 이야기
이번 토크콘서트에는 이제는 제주도의 필수 코스가 된 제주올레의 이사장 서명숙씨(이하 “서”)와 그의 절친한 임옥상 화백(이하 “임”) 이 스페셜 게스트로 등장했다.
유홍준 교수의 강연에 대한 짧은 소감 부탁드립니다.
서 : 유홍준 교수님 책은 이미 다 읽었는데요. 사적으로 그렇게 친하지 않은데 청중의 입장으로 만나게 되어 기쁘네요.
임 : 우선, 강연이 너무 길어요.(웃음) 예전에 300만 부 출판회에서도 이런 자리가 있었는데요. 거기에서 저는 유홍준 교수의 겉과 속의 차이를 까발리는 역할을 해서 박수를 많이 받았죠. (웃음) 오늘은 그 연장선상의 자리인 줄 왔는데 지금은 유 교수의 신도들만 잔뜩 있어서 까발리면 어떤 결과를 나올까 고민이 되네요.
서명숙 이사장은 제주도에 살고, 제주도의 올레 길을 창시한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이런 서 이사의 개인적 배경을 고려할 때 답사기를 읽은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서 : 저는 대학 때 비로소 뭍으로 올라가 기자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냈어요. 산티아고를 다니다 저의 고향 제주도의 길을 이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올레길을 낼 때 제주도의 풍경에 더하여 4.3사건의 상처가 담긴 장소도 포함시켰어요. 그런 길을 어떤 분은 관심을 가지고 보시고 아닌 분도 계셨는데요. 유홍준 작가님 책 속에는 그 부분이 언급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올레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올레 교과서 같은 책을 내주신 유 교수님께 감사드려요.
서 이사장님 입장에서 제주문화답사기 내용 중에 제주도에 대해서 이 부분은 나도 몰랐다하는 부분에 어떤 것이 있나요?
서 : 저도 30년 동안 제주도에 부재했었고 4.3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민속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모른다고 할 수 있거든요. 석주명 편전을 읽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해심지도나 일본학자들의 이야기는 잘 몰랐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얻은 게 참 많았어요. 유홍준 교수님이 오랜 관찰과 연구를 입담과 재치로 재밌게 표현해주셔서 관광걷기로서의 제주가 역사를 담은 제주로 알려지게 된 것 같아요.
임 : 이 시점에서 제가 유홍준 교수님께 질문 하나 하겠는데요. 교수님은 왜 글을 쓰시나요? 팔도버전으로 진달래꽃 이야기를 표현하신 것처럼 해주시죠.(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 p. 181)
유 : 충청도식을 ‘왜 물어유?’ 라고, 경상도식으로는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쓴다고 표현하고 싶네요. 글쟁이로서 사는 것은 투사로서 사는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 시절, 현장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것만이 조국을 위하는 길이고, 책을 통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글로 싸우는 것은 비겁한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습니다. 일반인이 아닌 전문가들은 글로써 우리가 원하는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문화유산답사기를 쓰는 것이 비록 내 인생에 없었던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글을 씀으로써 사람들은 한국문화유산을 통해 한국 문화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 생각하게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작가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지면 정치적 반창고로서 사용되기도 하는데 저는 글로써 대중을 만난 사람은 끝까지 글로써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 : 유 교수는 미술기자, 미술 사업가 오늘날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작가로서 많은 글을 썼는데요. 책을 계속해서 발간하는 이런 능력과 실천력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지요? 유 교수가 저녁 먹고 술자리 없이 집에 일찍 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책을 발간할 수 있나요?
유 : 방송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던 ‘대필작가설’ 과 상통되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저는 같은 기간 내에는 그렇게 많은 생산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67년에 입학해서 83년에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미술사 공부를 할 때 화가의 전기 20명은 채우고 죽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 미술사책(Story of Korean Art)도 쓰겠다고 마음먹었고요. 비록 1,000페이지라 책을 소파에서 들지 못할 무게가 되었지만 말이죠.(웃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획에 없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한 소재는 30년 전부터 모아왔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단기간에 다작을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죠. 습성이 되니까 아침 5시에 일어나면 책을 보거나 원고를 쓰게 돼는 것 같아요. 만약 제목이나 주제가 잡히지 않아 글이 구상하지 않을 때는 아예 글을 안 쓰지, 파지를 내면서 시간을 낭비하진 않아요.
임 : 이쯤에서 유 교수의 나쁜 버릇을 하나 폭로하도록 하죠. 유 교수는 꼭 글을 쓰다 막히면 지인들에게 책이 재밌는지 리허설하면서 닦달하는데요. 이렇게 히트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결정적 자리에 제가 있었다는 것 잊지 말아주세요. (일동 웃음)
유 : 사실 ‘진달래인가 철쭉인가’의 탄생 배경도 동태찌개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는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과정에서 탄생했어요. 고백하건데, 급할 때는 전화로 40-50분가량 읽어봅니다. 이런 과정이 대중적으로 검증한다는 점 그리고 읽으면서 제 자신이 정리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죠.
제가 청중을 대신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유 교수님이 이번 책을 제주도에 대해 쓰셨지만 애틋하고 더 쓰고 싶었던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떤 부분이었나요?
유 : 단연 해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해녀는 곧 없어질 직업이지만 그들이 몇백년 살아왔던 역사는 자산입니다. 해녀의 일생과 일상을 취재하면서 이를 문헌으로 남겨 무형의 자산으로 남겨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서울에 있어 이 작업을 하기 힘들기에 누군가는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 : 제주도에서 해녀삼촌들은 채취와 판매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올레길 사건으로 사회적 유족과 언론재단, 진짜 유족에게 받았던 비난으로 힘들었던 속에서 해녀 삼촌들을 만나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해녀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직업입니다. 사서 드시는 분들은 비싸다고 여기실지 모르지만 그 해산물은 삼촌의 목숨을 담보로 걷어 올린 것입니다. 거기다 그 분들은 일제시대와 4.3사태를 겪으면서 과부가 되어서도 생계를 위해 꿋꿋이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언젠가 제가 해녀삼촌들의 삶을 꼭 한번 정리해보고 싶네요.
유 : 책에 해녀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담겨있지만 출가해녀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담지 못했는데요. 착취당하며 사는 개인의 삶으로써가 아니라 민중의 삶의 일부로써 어떤 식으로든 문헌에 남기고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두 분 중 어느 한분이라도 빨리 해녀삼촌들의 이야기에 관한 책을 내주셨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유홍준 교수님은 나의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어떤 지역을 다룰 예정인지 알려주세요.
유 : 우선 8권으로는 충청도 쪽을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경기도와 서울도 아직인데요. 충청도가 늦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그곳의 채취를 가진 사람과 교류가 적어서 쓸 자신이 없었습니다. 또한 충청도의 숙박시설이 낙후된 곳이 많아 충청도의 정서를 느낄 수도 없었고요. 향토적 서정을 느낄 수 있는 숙박이 마련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당일코스로 글을 쓸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웃음)
위의 질문을 마지막으로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중했던 오늘의 토크콘서트는 끝이 났다. 유홍준 작가는 제주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외관뿐만이 아니라 그 역사의 아픔마저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와 떠난 문화유산답사는 짧았지만 독자들에게 우리가 길을 떠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길을 찾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토크 콘서트의 시작은 ‘제주의 역사와 탐라 문화의 정체성’라는 주제의 유홍준 작가의 강연으로 꾸며졌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슬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야기는 독자들을 제주도의 푸른 섬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운 제주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시간상 공간상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영토 확장의 의미를 가진 존재에요. 더불어 난대성 아열대 기후로 늘 푸른 숲을 가진 장소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제주라는 존재를 가졌다는 것은 한민족의 복입니다. 그런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디냐는 질문에 저는 무조건 ‘한라산 영실’ 이라고 답합니다. 1700고지 위에 진달래꽃밭 아래로 이어지는 구상나무 숲은 정말 드라마 같은 구성이죠. (나의문화유산답사기 7권 p.167 참조)
그리고 제주도하면 오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오름은 기생화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주도에 가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죠. 다양한 오름 중에 용눈이 오름을 보았을 때 아름다운 능선이 대자연의 위대한 누드화를 보는 느낌을 주었죠. 이처럼 제주의 자연은 아름답고 경이롭죠. 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순상화산, 오름, 용암동굴의 존재는 지질학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주 화산섬’과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로 했죠.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한줄기 선 위에 중간 중간 솟은 형태로 오름보다는 원시림을 보는 듯한 다른 감동을 줍니다.
역사 속의 제주
삼양동 유적지는 기원전후의 탐라국 형성기를 보여주는 최대의 마을 유적지로 의미가 깊습니다. 탐라인 발상지 전설을 갖고 있는 삼성혈은 이 유적지와 연결되죠. 탐라국이 독립된 국가(Kingdom)가 아닌 군장국가(Chiefdom)에만 머물렀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제주는 백제, 신라와 조공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육지부의 역사 속에 편입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교가 유입되었는데 정작 제주도 내에 불교 유적은 10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주사람이 흔히 말하는 “절오백, 당 오백” 이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제주도의 귀신이 너무 세서 불교가 정착을 하지 못했거든요. 제주의 상징인 돌하르방에 대한 이야기는 어제 방송에서 많이 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방송을 다시보시면 되겠습니다.(웃음)
제주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제주목사에 부임했던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를 빼놓을 수가 없죠. 1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 그는 제주도의 현 실정을 잘 담아냈는데 행정가로서 귀감이 될 인물입니다. 이후 조선시대에 대영제국이 제주도에 머물면서 50년간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나라의 해심을 측정해서 지도를 만들었는데요. 이는 영국이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화시키기 위해서 그 나라의 민속(Folk law)을 이해하기 위한 일환으로 벌인 활동으로 제가 옥션에서 아주 높은 가격을 주고 ‘해심지도’를 사서 제주박물관에 기증하여 지금 현재 전시중입니다. 아래에 ‘유홍준 기증’ 이라고 쓰여 있죠.(웃음)
해녀들의 제주
제주도에서 해녀삼촌(제주도에서는 진짜 살붙이가 아닌 사람은 형님, 누님, 아주머니, 아저씨 같은 호칭대신 모두 삼춘(삼촌)이라고 함)들이 제주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 걸어놓는 소지가 흩날리는 와흘 본향당 횡나무를 보면 탄력이 대단하죠. 이와 유사하게 종달리 돈지할만당(여기서 돈지는 배가 닿을 수 있는 해안을, 종달리는 끝에 도달한 동네란 의미를 가진다)의 기암괴석에 길게 누워있는 나무에도 이런 소지들이 걸려있는데요. 해녀들의 바람이 살아있는 장소입니다. 관광이 아무리 중요하더라고 물색천과 소지는 그모습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저는 해녀삼촌에게 4.3사건은 뭐라고 할까… 민주항쟁도, 폭동도 아닌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에 가면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내용이 담긴 비석이 토막으로 나누어져 있죠. 이는 마치 학살의 현장을 연상케 합니다. 이 비석에는 소설의 전체 내용이 담겨있는데요. 이처럼 4.3사건은 민주항쟁이라고 명명해서 가치를 올려야하는 그런 문제의 것이 아닌 3만 명의 희생이 발생한 위로와 공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주도와 사람
민속학자인 김광언 씨가 표어에서 이즈미 세이이찌를 산악 로맨티스트라고까지 표현했는데요. 그는 한라산 등반 중 동료를 잃은 사건으로 자신의 전공을 민속학으로 바꾸고 제주도에 대해 평생을 연구한 인물입니다. 일본인이 집필한 것이라고 하여 아직도 한국어로 번역조차 되지 않았는데요. 이는 제주도에 대한 총체적인 보고서에 대한 외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주도 하면 나비박사인 석주명 선생을 빼놓을 수 없죠. 조선 전역에 나비를 채집하던 그가 제주도에 내려와 ‘제주도 총서’라는 여섯 권의 책을 집필하며 제주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했죠. 그의 영전에 ‘서귀포 귤빛여성합창단’이 제주어로 노래한 ‘도대지기’를 바치고 싶네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 p.461 참조)
2부-숨겨진 “뒷면”의 이야기
이번 토크콘서트에는 이제는 제주도의 필수 코스가 된 제주올레의 이사장 서명숙씨(이하 “서”)와 그의 절친한 임옥상 화백(이하 “임”) 이 스페셜 게스트로 등장했다.
유홍준 교수의 강연에 대한 짧은 소감 부탁드립니다.
서 : 유홍준 교수님 책은 이미 다 읽었는데요. 사적으로 그렇게 친하지 않은데 청중의 입장으로 만나게 되어 기쁘네요.
임 : 우선, 강연이 너무 길어요.(웃음) 예전에 300만 부 출판회에서도 이런 자리가 있었는데요. 거기에서 저는 유홍준 교수의 겉과 속의 차이를 까발리는 역할을 해서 박수를 많이 받았죠. (웃음) 오늘은 그 연장선상의 자리인 줄 왔는데 지금은 유 교수의 신도들만 잔뜩 있어서 까발리면 어떤 결과를 나올까 고민이 되네요.
서명숙 이사장은 제주도에 살고, 제주도의 올레 길을 창시한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이런 서 이사의 개인적 배경을 고려할 때 답사기를 읽은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서 : 저는 대학 때 비로소 뭍으로 올라가 기자생활을 하다가 사표를 냈어요. 산티아고를 다니다 저의 고향 제주도의 길을 이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올레길을 낼 때 제주도의 풍경에 더하여 4.3사건의 상처가 담긴 장소도 포함시켰어요. 그런 길을 어떤 분은 관심을 가지고 보시고 아닌 분도 계셨는데요. 유홍준 작가님 책 속에는 그 부분이 언급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올레길을 걷게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올레 교과서 같은 책을 내주신 유 교수님께 감사드려요.
서 이사장님 입장에서 제주문화답사기 내용 중에 제주도에 대해서 이 부분은 나도 몰랐다하는 부분에 어떤 것이 있나요?
서 : 저도 30년 동안 제주도에 부재했었고 4.3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민속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모른다고 할 수 있거든요. 석주명 편전을 읽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해심지도나 일본학자들의 이야기는 잘 몰랐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얻은 게 참 많았어요. 유홍준 교수님이 오랜 관찰과 연구를 입담과 재치로 재밌게 표현해주셔서 관광걷기로서의 제주가 역사를 담은 제주로 알려지게 된 것 같아요.
임 : 이 시점에서 제가 유홍준 교수님께 질문 하나 하겠는데요. 교수님은 왜 글을 쓰시나요? 팔도버전으로 진달래꽃 이야기를 표현하신 것처럼 해주시죠.(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 p. 181)
유 : 충청도식을 ‘왜 물어유?’ 라고, 경상도식으로는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쓴다고 표현하고 싶네요. 글쟁이로서 사는 것은 투사로서 사는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 시절, 현장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것만이 조국을 위하는 길이고, 책을 통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글로 싸우는 것은 비겁한 것이냐는 질문에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습니다. 일반인이 아닌 전문가들은 글로써 우리가 원하는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문화유산답사기를 쓰는 것이 비록 내 인생에 없었던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글을 씀으로써 사람들은 한국문화유산을 통해 한국 문화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 생각하게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작가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지면 정치적 반창고로서 사용되기도 하는데 저는 글로써 대중을 만난 사람은 끝까지 글로써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 : 유 교수는 미술기자, 미술 사업가 오늘날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작가로서 많은 글을 썼는데요. 책을 계속해서 발간하는 이런 능력과 실천력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지요? 유 교수가 저녁 먹고 술자리 없이 집에 일찍 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책을 발간할 수 있나요?
유 : 방송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던 ‘대필작가설’ 과 상통되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저는 같은 기간 내에는 그렇게 많은 생산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다만 제가 67년에 입학해서 83년에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미술사 공부를 할 때 화가의 전기 20명은 채우고 죽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 미술사책(Story of Korean Art)도 쓰겠다고 마음먹었고요. 비록 1,000페이지라 책을 소파에서 들지 못할 무게가 되었지만 말이죠.(웃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획에 없던 문화유산답사기에 대한 소재는 30년 전부터 모아왔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단기간에 다작을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죠. 습성이 되니까 아침 5시에 일어나면 책을 보거나 원고를 쓰게 돼는 것 같아요. 만약 제목이나 주제가 잡히지 않아 글이 구상하지 않을 때는 아예 글을 안 쓰지, 파지를 내면서 시간을 낭비하진 않아요.
임 : 이쯤에서 유 교수의 나쁜 버릇을 하나 폭로하도록 하죠. 유 교수는 꼭 글을 쓰다 막히면 지인들에게 책이 재밌는지 리허설하면서 닦달하는데요. 이렇게 히트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결정적 자리에 제가 있었다는 것 잊지 말아주세요. (일동 웃음)
유 : 사실 ‘진달래인가 철쭉인가’의 탄생 배경도 동태찌개 앞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는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과정에서 탄생했어요. 고백하건데, 급할 때는 전화로 40-50분가량 읽어봅니다. 이런 과정이 대중적으로 검증한다는 점 그리고 읽으면서 제 자신이 정리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죠.
제가 청중을 대신하여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유 교수님이 이번 책을 제주도에 대해 쓰셨지만 애틋하고 더 쓰고 싶었던 부분이 있으셨다면 어떤 부분이었나요?
유 : 단연 해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해녀는 곧 없어질 직업이지만 그들이 몇백년 살아왔던 역사는 자산입니다. 해녀의 일생과 일상을 취재하면서 이를 문헌으로 남겨 무형의 자산으로 남겨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서울에 있어 이 작업을 하기 힘들기에 누군가는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 : 제주도에서 해녀삼촌들은 채취와 판매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올레길 사건으로 사회적 유족과 언론재단, 진짜 유족에게 받았던 비난으로 힘들었던 속에서 해녀 삼촌들을 만나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해녀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직업입니다. 사서 드시는 분들은 비싸다고 여기실지 모르지만 그 해산물은 삼촌의 목숨을 담보로 걷어 올린 것입니다. 거기다 그 분들은 일제시대와 4.3사태를 겪으면서 과부가 되어서도 생계를 위해 꿋꿋이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언젠가 제가 해녀삼촌들의 삶을 꼭 한번 정리해보고 싶네요.
유 : 책에 해녀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담겨있지만 출가해녀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를 담지 못했는데요. 착취당하며 사는 개인의 삶으로써가 아니라 민중의 삶의 일부로써 어떤 식으로든 문헌에 남기고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두 분 중 어느 한분이라도 빨리 해녀삼촌들의 이야기에 관한 책을 내주셨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유홍준 교수님은 나의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어떤 지역을 다룰 예정인지 알려주세요.
유 : 우선 8권으로는 충청도 쪽을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경기도와 서울도 아직인데요. 충청도가 늦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제가 그곳의 채취를 가진 사람과 교류가 적어서 쓸 자신이 없었습니다. 또한 충청도의 숙박시설이 낙후된 곳이 많아 충청도의 정서를 느낄 수도 없었고요. 향토적 서정을 느낄 수 있는 숙박이 마련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당일코스로 글을 쓸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웃음)
위의 질문을 마지막으로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중했던 오늘의 토크콘서트는 끝이 났다. 유홍준 작가는 제주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외관뿐만이 아니라 그 역사의 아픔마저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와 떠난 문화유산답사는 짧았지만 독자들에게 우리가 길을 떠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길을 찾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유홍준 저 | 창비
1993년 제1권 ‘남도답사 일번지’부터 2011년 제6권 ‘인생도처유상수’까지 인문서 최초 300만부 판매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가 제7권 신간 제주편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을 출간했다. 전작들과 달리 이번 신간은 한권을 오롯이 제주에 할애해 제주의 자연과 문화유산, 역사와 사람 이야기로 풍성하게 채웠으며 그 깊이와 집중도 또한 답사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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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윤나리
스스로를, 물음표와 느낌표의 이성과 감성을 두루 갖추었다 자칭하는 일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와 함께 생활한 탓에 책, 음악,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얇고 넓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항상 다양한 매체를 향해 귀와 눈, 그리고 마음을 열어두어 아날로그의 감성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채사모2기.
나랑
2012.11.23
브루스
2012.11.22
이제는 관강이 아닌 제주의 역사를 느끼러 가보고 싶습니다.
우유커피좋아
201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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